595화. 통화
그린올리브 구역, 용여홍과 백새벽이 숨은 방.
“목표랑 같은 층에 사는 우리 기억도 모르는 사이에 노출된 거 아냐?”
용여홍이 겁에 질려 묻던 순간, 외시경 너머를 살피던 백새벽은 돌아서 그를 바라보다 잠시 머뭇거린 끝에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 우린 우리가 세운 대책에 따라 모르는 사이 기억이 노출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했잖아. 최대한 겐이 있는 방에서 멀리 떨어져서 부근에 몰래 설치해둔 카메라로 상황을 관찰하는 거.
우리가 있는 이 방은 복도 반대편 끝이야. 계단을 바로 마주하고 있지도 않고 약간 빗겨났어. 오가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러니 기억이 노출됐을 확률은 극히 낮아.
목표가 차라리 잘못된 대상을 죽일지언정 단 한 명의 적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신조가 있는, 지나치게 신중한 녀석이 아니라면 그는 절대 우리를 처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야.”
다른 층으로 이동하거나 이 아파트 건물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경우 남들에게 모습을 들키고 단서를 남기기 쉬웠다. 그게 아니면 백새벽도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있으려 했을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 설득됐던 용여홍은 다시 또 생각이 바뀌었다. 백새벽도 이곳에 있으니만큼 아무리 대비하고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쪽이었다.
“내 생각에는 상대가 지나치게 신중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 같아. 진짜 신부와 그 수많은 가짜 신부를 생각해봐. 사실 그들은 전부 비슷한 경향이 있었잖아. 그들처럼 기억을 가지고 장난칠 수 있는 각성자들의 행동 스타일은 비슷할 수밖에 없어.”
백새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세워둔 대책대로 움직이자. 더는 나도 모르는 새 기억을 조작당하지 않게.”
진짜 신부에게 기억을 조작당했을 당시의 감정은 그녀의 머릿속에도 깊이 새겨져 있었다.
용여홍은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점착 메모지 한 다발을 꺼냈다.
목표가 말인 영역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일 상황에 대비하고자, 두 사람은 전에 진짜 신부에 맞섰을 때처럼 중요한 기억을 간략하게 적어 수시로 그것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기억을 조작당했는지,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낯선 사람이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용여홍이 작성한 메모를 살피는 사이, 백새벽은 그녀의 휴대용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그 후 잠시 조작 끝에 소프트웨어 하나를 실행했다.
게네바가 만든 것으로, 네트워크를 이용해 핸드폰이나 유선 전화에 전화를 걸 수 있는, 구세계의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둔 소프트웨어였다.
백새벽은 번호를 입력한 뒤 연결을 눌렀다.
당연히 오레이의 손녀 아비아의 위험한 핸드폰에 저장된 수상한 번호는 아니었다. 그 번호에 전화했을 경우 결과는 예측할 수도 없었고, 아직은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백새벽이 입력한 번호는 바로 성건우가 새로 마련한 핸드폰 번호였다.
강력한 적을 상정하고 몇 가지 대책을 마련한 구조팀은 조를 나눠 행동하기 전 어느 정도 준비를 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를 위해 성건우는 어느 행인에게 핸드폰을 대신 구입하고 통신망에 가입해달라는 사유를 이식하고 그에게 충분한 보수를 지급했었다.
그리고 그 핸드폰을 손에 넣고 번호를 확인한 후에야 장목화, 성건우도 레드울프에 있는 우딕의 집으로 향했었다.
뚜르르, 뚜르르⋯⋯.
[연결 중]
지금 백새벽은 게네바의 네트워크 신호를 사용했다. 게네바는 일찍이 부근의 핸드폰 기지국에 침입한 상태였다.
[통화 중]
컴퓨터 화면 속 소프트웨어 창 글자가 바뀌고, 성건우의 음성이 흘렀다.
-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선(禪)과 오토바이 수리 방송국입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 반기계 승려 제도 선사입니다.
- 장난 좀 치지 마!
바로 이어진 장목화의 타박과 함께 누군가를 때리는 듯한 가벼운 타격음도 전해져왔다.
그리고 성건우의 목소리는 즉각 진지해졌다.
- 무슨 이상이라도 있어?
“응.”
백새벽은 조금 전 누군가 층을 잘못 찾았다는 사실을, 덧붙여 자신과 용여홍의 추측도 빠르게 전했다.
전화 건너편의 장목화는 곧장 명령을 내렸다.
- 차 길가에 세워봐. 자리 바꾸자. 넌 통화에 집중해.
- 네.
성건우도 지체하지 않고 명령에 따랐다.
이후 그가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말했다.
- 영상 통화로 바꿔봐.
백새벽은 몇 번의 클릭으로 영상 통화에 연결했다.
그러자 곧 화면에 성건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건우는 곧 보조석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웃었다.
- 이제 창을 숨기고 아무 일도 없던 척해.
용여홍은 성건우의 방법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혹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능력은 대화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거 아니었어? 창을 숨겨버리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느껴질 텐데 어떻게 숨어있는 적에 맞서?”
게다가 성건우가 가진 능력 중 전자파 신호를 통해 영향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것은 사유 유도뿐이었다. 문학청년-억지쟁이, 그리고 사지 동작 불능은 지금으로서는 아예 쓸 수 없을 듯했다.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 난 전자파를 방해할 수도 있잖아.
이야기를 하는 사이 방 안의 꺼져 있던 절전등이 창백한 빛을 발했다.
치직- 치직-
소리와 함께 영상 통화 창에 뜬 성건우의 모습도 왜곡되었다.
다시 그 모든 건 빠르게 안정되었고, 성건우는 더 여유로운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작할지는 신경 쓰지 마. 나름의 묘책이 있으니까.
‘그건 팀장님이 즐겨 하던 말 아닌가?’
용여홍이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무렵, 화면 속의 성건우는 고개를 틀어 옆을 바라보았다.
“팀장님, 그쪽 아니에요!”
치직- 치직-
영상 통화 창 속 성건우의 인영이 재차 약간 왜곡되는 듯했다.
백새벽과 용여홍은 시선을 주고받은 뒤 성건우의 말을 믿기로 했다.
장목화와 함께 있는 그가 헛소리를 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던 백새벽이 영상 통화 창을 숨겼다. 현재 컴퓨터 화면에는 카메라와 연결된 감시 화면과 몇몇 아이콘밖에 남지 않았다.
곧이어 백새벽은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조심해야 해. 5분에 한 번씩 기록을 확인하면서 기억과 비교하는 거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내용이 조작되지 않게.”
용여홍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래!”
* * *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이 태양을 삼키며 사방이 적잖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형태 없는 그림자가 백새벽과 용여홍의 방으로 스윽, 들어오더니 두 갈래로 나뉘어 백새벽, 용여홍의 머리로 각각 스몄다.
두 사람의 심령 세계와 잠재의식 속, 중요한 기억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그림자는 두 사람과 성건우의 대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가장 최신 기억인 이것은 그림자가 가장 관심을 둔 부분이기도 했다.
“통화 창을 숨기고 아무 일도 없던 척하라고? 전자파 신호로 영향 범위를 넓인 상황에서는 대화를 통해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의도적으로 창을 숨겼어? 나름의 묘책이 있다고?”
그림자는 하나씩 물음표를 떠올렸다. 코끝에 위험의 냄새가 닿는 듯했다.
그는 상대가 다른 방식으로 동료의 기억을 감시할 수 있거나 방 안에 더해진 누군가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계속 이들의 기억을 뒤지고 조작한다면 제 발로 그물에 뛰어드는 셈이 될 터였다.
절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림자는 그 즉시 백새벽과 용여홍의 머릿속에서 물러났다. 순간 멀찍이 자리한 괴물이 보이지 않는 촉수 두 갈래를 황급히 거둔 듯했다.
두 사람에게서 떨어진 촉수는 직선거리로 수십 미터 밖에 있는 건물의 어느 방 안으로 거둬졌다.
그것들은 선글라스를 낀,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에게 속해 있었다. 남자의 금갈색 머리는 5대 5로 가르마를 타 놓은 상태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대대적으로 뒤져보고 또 조작하기 위해 반드시 자신과 목표 사이의 거리를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좁혀놓아야 했다.
이내 남자는 감히 현장에 머물러 있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황급히 방을 떠났다. 그동안 뒤를 힐끔 돌아보던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란도 나서도록 해야겠어.”
* * *
장목화, 성건우는 막 오후가 됐을 무렵, 그린올리브 구역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곧장 게네바를 찾는 대신 일단 백새벽과 용여홍이 숨어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장목화는 바로 걱정을 드러냈다.
“어때, 기억이 조작된 것 같은 느낌이 있어?”
백새벽은 고개를 저으며 점착 메모지 한 다발을 꺼냈다.
“아뇨. 적어도 이것들과 관련된 기억은 조작되지 않았어요. 우리 팀원들에 대한 인지도 정상적이고요.”
“그 메모지 중 빠진 게 있나 확인해볼게.”
장목화는 점착 메모지를 받아든 뒤 자신의 보조 칩 안에 저장된 내용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혹시 또 적이 백새벽의 기억을 조작한 후, 그 기억과 관련된 메모지를 제거하고, 해당 기억까지 삭제했을지도 몰랐다.
말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의심되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와 맞선 상황이라면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장목화는 다중으로 검증할 계획을 세워뒀었다.
한편 성건우 역시 전술 배낭 안에서 그의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 용여홍이 적은 중요 기억을 검사했다.
그때였다. 그가 돌연 용여홍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
용여홍은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성건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건우는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문제가 있어.”
“뭔데?”
용여홍은 덜컥 겁이 났지만, 성건우 중에는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녀석도 있다는 걸 떠올리고 조금 더 침착하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곧이어 용여홍은 허리를 굽히고 성건우의 휴대용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성건우는 바로 그의 귓가에 대고 매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 빠졌잖아. 해당 내용이 담긴 메모지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내 컴퓨터 저장본에도 없어.”
“그럴 리가!”
용여홍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말도 안 돼! 설마 건우랑 팀장님이 외출하기도 전에 모두가 영향을 받았던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성건우의 컴퓨터에 저장된 백업 파일에도 관련 내용이 빠져있을 리는 없었다.
성건우는 계속 진지하게 말했다.
“작은 흰둥이에 대한 네 관점과 생각이 빠져있⋯⋯.”
“잠깐!”
순간 용여홍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난 간략한 것들만 적었어. 그렇게 상세한 내용까지 적지는 않았다고. 그러니까, 빠진 게 아니야.”
성건우는 몹시 의심스럽다는 듯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작은 흰둥이를 좋아한다는 건 기억하고 있어?”
용여홍의 머릿속에서 돌연 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굴은 타는 듯 화끈거리고 머리 꼭대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는 백새벽, 장목화 쪽을 바라보았다.
성건우가 모든 이야기를 거의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그런지 두 동료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했다. 아니, 그들은 애초에 이쪽의 동정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용여홍은 고개를 돌려 분노가 어린 눈으로 성건우를 노려보려 했다. 하지만 또 수틀린 친구가 이 사실을 큰소리로 외쳐댈까 봐 두려워서, 결국 조용히 비는 쪽을 택했다.
“마, 말하지 마.”
입을 뗀 성건우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답했다.
“알, 겠, 어. 네가 잊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그의 얼굴에는 정말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웬일로 이렇게 친절해?’
용여홍은 지금의 성건우는 농담을 좋아하는 녀석인지, 아니면 성실한 녀석인지, 감정을 중시하는 녀석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