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끝?
레드울프로 돌아온 구조팀은 수종이가 묵던 그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 세 개짜리 집으로 갔다.
장목화는 잠시 창가에 서서 저 멀리 그린올리브 구역의 등불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퍼스트 시티의 유산은 역시 넉넉하네.”
물이 적은 겨울이 막 지났는데도 이곳의 전기 공급은 넉넉한 편이었다.
물론 퍼스트 시티에 수력 발전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도시 주위에는 구세계가 남긴 원자력 발전소 하나와 석탄 발전소도 두 곳이 있었다.
만약 전력 소모량이 어마어마한 퍼스트 시티의 산업 대부분이 이 구역에 집중돼 있지 않았다면 도시에 전력 부족 현상 같은 건 없었을 것이었다.
시선을 거둔 장목화가 팀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방으로 돌아가 쉬어. 정해진 시간에 맞춰 교대로 불침번 서자.”
게네바는 중저음 합성음으로 답했다.
“나한테는 방도, 침대도 필요 없잖아. 누워서 절전모드를 활성화하든 소파에 앉아서 절전모드를 활성화하든 아무 차이도 없다. 어디든 충전할 수 있는 곳이기만 하면 되지.”
장목화가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이라면 앉는 것보단 눕는 걸 더 편하게 여겨. 겐, 그렇지 않아?”
빠르게 계산해보던 게네바가 금속 목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렇지.”
이후 장목화가 먼저 화장실을 쓰겠다고 말하려던 그때, 용여홍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팀장님, 악몽 관련 사건에서 저희는 뭘 할 수 있을까요?”
우딕과 휴고를 위한 복수든, 더 많은 사람의 피해를 막는 것이든, 사실상 구조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용여홍은 현실 속의 적이면 이만한 실력과 장비를 갖춘 구조팀은 아무리 규모가 큰 전쟁 속에서도 적잖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악몽처럼 실체가 없고 실제로 접촉하기도 어려운 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구조팀에서 실력도 가장 강하고 이런 일에 응대하는 데 가장 뛰어나기도 한 성건우 역시 악몽 속에서는 어쩌지 못하고 이두형과 수종이에게만 의지해 억지로 상대를 쫓아내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것은 한 번 이상 쓸 수 없는 수였다.
몇 초간 고민하던 장목화가 답했다.
“우선 악몽에도 근원은 있을 거야. 그 근원은 실체가 있는 존재겠지. 심지어는 휴고나 우딕처럼 다른 사람의 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일 수도 있어. 그 정도만 좀 다를 뿐인 거지.
또 둘째, 우리가 퍼스트 시티에서 활동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어. 힘을 다한다 한들 보조적인 역할밖에 못 해. 기껏해야 진아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들은 여명샛별처럼 이런 악몽에 대적하는 전문가들일 테니까.
셋째, 만약 아무 단서도 없다면 우리도 여기서 마냥 죽치고 있을 순 없어. 불모지 13호 유적에 있는 호움 난임 센터야말로 우리 진짜 목적지잖아.”
팀장이 표한 또렷한 생각에 용여홍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씻을 차례를 기다렸다.
장목화가 다 씻고 방으로 들어오자,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자신을 강화할 수도 있단 말은 안 했어요.”
“그런 말을 하면 작은 흰둥이랑 작은 빨강이가 압박을 느끼지 않을까? 각성하지도 않은 애들한테 심령 세계 속의 승급은 불가능하잖아. 이만 불 꺼.”
장목화는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 * *
기원의 바다.
장목화는 재차 그 섬에 올랐다.
지도를 구현해낸 그녀는 급하지 굴지 않고 아주 천천히 이동하며 지하 빌딩 입구를 찾았다.
익숙한 주차장을 지나 지하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이른 장목화는 이번에는 그 안에 들어가는 대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우딕이 미쳤을 당시의 느낌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단지 몇 차례 만났을 뿐인 휴고보다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함께 싸운 적 있는 우딕에 대한 감정이 더 깊었다.
그런 우딕에게 뭔가 안 좋은 상황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말로 그가 미쳐버린 것을 확인한 순간에는 깊은 슬픔과 분노, 낙담, 실망감이 밀려왔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실감했다. 친구에게 충분한 도움이 돼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는 갈망이 차올랐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장목화는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지금 그녀가 마주한 섬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냉정하고 무정한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가족, 친구, 익숙한 삶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트라우마로 발전할 정도는 아니었다.
장목화는 감정을 둔화시키고 심령을 봉쇄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섬을 극복한다고 가족, 친구, 익숙한 삶을 잃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로 제한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그 두려움의 정도를 낮추면 되지 않을까? 그 두려움을 스스로를 강화하는 동력으로 삼으면 되는 것 아닐까?
지하 빌딩으로 통하는 수많은 엘리베이터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장목화는 당시의 갖가지 디테일을 떠올리며 미쳐버린 우딕을 보고 느낀 분노, 슬픔, 낙담과 실망을 최대한 그대로 되돌리려 애썼다.
감정은 마치 연료처럼 그녀의 마음속 갈망을 활활 불태웠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장목화는 대지가 바르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인 진동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목화는 이에 놀라기는커녕 기뻤다. 그간 수많은 시도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섬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우 약한 변화였지만 그래도 이번 시도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아주 약간의 진동이었어. 그 정도 동기론 충분하지 않은 건가? 그래서 두려움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뭔가 빠뜨린 게 있나?’
약간 지친 장목화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감정을 연료로 쓴 만큼 정신 소모가 커진 탓이었다.
* * *
심령의 복도, 912호, 여객선 위.
성건우는 이 트라우마에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방식으로 혼란한 밤을 피했다. 그런 뒤 높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 아래, 갑판에서 적당한 목표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입니다!”
성건우가 매우 열정적으로 인사한 상대는 어느 애쉬랜드인이었다. 나이는 40살이 채 안 됐으나 이 배의 승객 중에서는 연장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성건우에게 물었다.
“당신은?”
사실 그는 자신이 성건우를 모른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건우의 적극적인 태도가 그런 확신조차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보세요, 우리는 같은 배의 탑승객입니다. 둘 다 애쉬랜드인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성건우는 혼란한 상태가 아닐 때는 이 트라우마 안에서 능력을 사용해도 오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역시 애쉬랜드인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전생에 100년을 함께해야 같은 배를 탄다는 말이 있지요.”
성건우는 곧장 그에게 물었다.
“혹시 아이언마운틴 시티 폐허에 가본 적 있으십니까?”
애쉬랜드인은 매우 의아해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긴 골든코스트 해역이잖습니까. 아이언마운틴 시티까지는 멀어도 한참 멀죠!”
그가 아는 건 구세계 파괴 이전의 아이언마운틴 시티인 듯했다.
실망한 표정을 드러낸 성건우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곳에 안 가봤다면 할 이야기도 없겠네요. 나중에 봅시다.”
이후 그는 다음 피해자 아니, 다음 목표를 찾았다.
그렇게 성건우는 한동안 바삐 움직이며 갑판 위의 모든 승객과 일대일 대화를 마쳤다.
그도 만약 집단을 대상으로 영향을 발휘해 뭔가를 물었을 때 발생할지 모를 뜻밖의 상황에 대한 염려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성가시고 번거로운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갑판 위 승객들에 대한 탐문을 마치고 나니 성건우도 매우 지쳐버렸다.
그러나 고생이 무색하게도 그들 중 아이언마운틴 시티 폐허에 가본 522호 주인은 없었다.
‘지금 갑판에 있는 사람들은 전체 승객 중 3분의 1도 안 돼. 힘내자!’
성건우는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는 한편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
수면을 통해 정신을 회복해야 했다.
* * *
다음 날 오전.
지프를 몰고 휴고 여관 근처로 돌아간 구조팀은 어제 만난 그 치안요원들을 마주쳤다.
차창을 내린 장목화가 먼저 인사를 했다.
“무슨 발견이라도 있었습니까?”
어제 그들에게 질문했던 그 치안요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어젯밤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습니다!”
‘어젯밤에는 악몽을 꾼 사람이 없었다고?’
장목화는 모종의 생각에 잠긴 채 시선을 거뒀다.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성건우가 추측에 나섰다.
“기겁한 나머지 다시는 이곳에 올 엄두도 내지 못한 건가?”
마음 같아서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던 용여홍이 말을 받았다.
“그럴지도.”
구조팀은 곧 반 바퀴를 돌아 진아교 거점에 도착했다.
지금 아파트 정문 앞에는 누군가 경비원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장목화는 간단히 목적을 밝혔다.
“클리프를 찾으러 왔습니다.”
경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의 그곳으로 가십시오.”
아파트로 들어가 1층 왼쪽 끝방으로 향한 구조팀은 그곳에서 꿈 파괴자 클리프를 다시 만났다.
클리프가 입을 열기 전, 장목화가 먼저 물었다.
“그 악몽에 대한 단서라도 발견하셨나요? 저희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검은 가운을 걸친 클리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달지기의 주시 아래, 그 악몽은 이미 사라졌네. 자네들도 더는 걱정할 것 없어. 상황은 끝났으니.”
‘뭐?’
구조팀 전원이 같은 표정을 했다. 이런 답을 들으리라 예상치 못한 것은 누구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혼란에 휩싸인 채 진아교 거점이 자리한 아파트에서 빠져나온 구조팀은 바깥 햇살에 눈을 찔린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상황은 끝났다고? 상황이 끝났다니.
구조팀원들은 기뻐하는 대신 깊은 침묵에 빠졌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적막한 분위기 속, 각자 다 지프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백새벽은 차를 다른 방향으로 몰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팀은 전에 빌려둔 그 건물을 지나게 되었다.
그 건물 입구에서는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머리가 금갈색인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였다.
지프는 그 건물을 그대로 지나쳐 레드울프 구역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거의 300미터 정도 이동했을 무렵, 게네바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남자 봤나? 선글라스 낀 남자.”
“왜?”
용여홍이 물었다.
게네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선글라스와 관련한 빛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한 끝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남자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는 완전히 불투명한 재질이 아니었다. 완전히 불투명한 선글라스였다면 착용자 역시 앞을 볼 수 없었다.
“뭔데?”
용여홍이 캐물었다.
게네바는 눈으로 붉은빛을 몇 차례 번득이며 답했다.
“그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