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상상력
이윽고 장목화는 자신과 성건우에게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악몽이 수종이와 이두형…… 선생님한테 놀라 도망친 거라고요?”
백새벽은 이두형을 선생이라 부르는 것에 습관이 돼 있진 않았다.
이내 성건우가 턱을 매만지며 장목화의 답을 가로챘다.
“모든 불가능을 배제하고 남는 게 진상이니까. 적어도 우리한테는 두통이나 구역감, 피로감, 불면증 등등 아무 후유증도 안 나타났잖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용여홍이 질문을 제기했다.
“만약 악몽에 나름의 의식이 있고, 놀라 달아날 수도 있다면 이런 짓을 저지르는 이유는 뭘까? 악몽 전파? 수많은 이들이 불면증과 두통을 앓는 걸 보는 게 좋아서?”
사실 용여홍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마땅한 이유가 아니었다. 동시에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성건우 같은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마저 헤어나올 수 없게 하는 악몽이면 분명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동기가 있을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강자가 모여든 퍼스트 시티에서 활동할 이유는 없었다.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현재까지 이 악몽 때문에 사망한 사람은 없어. 미치거나 또렷한 이상 현상을 보인 이도 없고⋯⋯. 전체적으로 꽤 순한 편이야.”
그녀는 어느 꿈 영역 각성자가 실력이 향상한 후 살짝 모종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순간 흥분한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달라질지도 몰라요. 꿈에서 육식주를 사용하자마자 어둠 속 괴물이 광분했거든요. 보아하니 물건을 알아볼 줄 아는 것 같던데요.”
성건우의 육식주는 불가 성지에 의해 개조된 물건이었다.
그러자 용여홍이 흠칫 놀랐다.
“현실에서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장목화는 바로 팀원을 위로했다.
“당분간은 안 그럴 거야. 정말 이두형 선생님과 수종이 때문에 놀라 달아났다면 무턱대고 달려와 우리랑 대적하려 하진 않겠지. 적어도 수종이나 이두형 선생님이 우리 주위에 숨어있을 가능성부터 확인하고 덤빌 거야. 근데 수종이랑 이두형 선생님이 어디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던가?”
꿈을 통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악몽은 구조팀원들을 통해 최근 이두형이나 수종이와 만난 적 없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것이 특별히 설치한 함정일 가능성을 걱정하지 않을 순 없을 터였다.
이내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그것이 모든 확인을 마쳤을 무렵, 우리는 이미 도시를 떠나 악몽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진 불모지 13호 유적에 도착해 있을 거고.”
용여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제 게네바가 대화의 주제를 본론으로 돌렸다.
“이 악몽의 근원은 대체 뭐지?”
“다른 가능성도 있어.”
앞서 장목화는 전체적인 상황이 비교적 순하다는 사실에 근거해 일단 특정 능력의 실험일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었다.
“도시 안에 통제할 수 없는, 신세계와 연결된 교차점이 하나 더 늘어난 거지. 그곳 기운은 느릿하게 밖으로 퍼지고 있지만 넓은 범위에서 악몽을 유발할 뿐, 누군가를 무심병에 걸리게 할 정도는 아닌 거지.
그렇다면 퍼스트 시티 주도자들이 질서의 손과 사냥꾼 길드를 통해 조사하려는 건 그 교차점의 위치일 거야. 하지만 이 가능성으로는 악몽이 왜 이두형 선생님과 수종이 때문에 놀라 달아난 건지는 설명이 안 돼.”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날이 갈수록 상상력이 좋아지시네요!”
‘……별로 칭찬 같지 않은데.’
장목화는 그를 살짝 흘긴 뒤 다시금 말을 정리했다.
“사실 우리가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야. 여긴 퍼스트 시티잖아. 하늘이 무너져도 막아줄 지붕이 있다고.
정보 획득 속도를 잘 파악하면서 악몽이 이두형 선생님과 수종이가 우리 주위에 숨어있지 않다는 걸 알아내기 전에 바로 퍼스트 시티를 떠나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겸사겸사 휴고 사장한테 물어봐도 되겠다. 그 사람이 몸담은 진아교가 믿는 건 꿈 영역을 관장하는 달지기 여명이니 분명 관심을 보일 거야.
그리고 회사에 보고도 해야겠어. 상부 거물들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떤 제안을 할지 확인하는 거야. 뭐,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없어요.”
용여홍이 제일 먼저 고개를 저었다.
백새벽과 성건우, 게네바도 같은 답을 하자 장목화는 무선 통신기를 찾아 그 자리에서 반고 바이오에 상황을 보고했다.
반고 바이오 내부의 무선 통신기 앞엔 직원들이 24시간 상주하고 있었다.
할 일을 마친 장목화가 손뼉을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가서 다시 자자. 무슨 기이한 꿈을 꾸게 되면 바로 얘기하고.”
성건우는 곧장 용여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왜! 왜 그런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건데!’
용여홍은 애써 스스로를 다잡으며 팀장의 지시에 응했다.
이때 장목화에게로 시선을 돌린 성건우가 놀리는 듯한 투로 물었다.
“섬은 잘 극복하고 있어요?”
잠시 망설이던 장목화는 어려움을 팀원들과 함께 나누기로 했다.
그녀는 황량하고 아무도 없는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과 같은 이번 섬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뒤 목에 약간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그건 아마 가족과 친구, 동료, 그리고 익숙한 삶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상징일 거야.”
성건우는 감탄하며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
“오오! 그 안에서는 길 안 잃었네요?”
장목화는 몰래 이를 악물었다.
그 사이, 백새벽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적도 없고 이상 현상도 없으니 길이 덜 헷갈리겠지.”
용여홍도 얼른 동조한 뒤 본인 생각을 덧붙였다.
“맞아. 그 섬들은 모두 트라우마에 대응하죠. 마음속 두려움의 표현이에요. 그걸 해결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현실에 근거하는 거예요.
팀장님이 첫 번째 섬을 극복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통제할 수 없는 혼수상태를 직면하고 각성 실험에 자원해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잖아요. 그러니까 방법을 찾기만 하면 그 섬도 바로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에도 그 두려움에 용감하게 직면해야⋯⋯.”
이 대목에서 용여홍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본인 역시 장목화의 친구이자 동료, 익숙한 삶의 일부로서 그녀에게 가족, 친구, 동료, 익숙한 삶을 잃는 공포를 직면하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로 느껴졌다.
장목화도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래, 내가 그걸 모를까 봐? 근데 그런 상황을 어떻게 일부러 직면할 수 있겠어. 설마 유약하고 겁 많은 건우처럼 자발적으로 팀원을 전멸시킬 기회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이후,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전체적인 상황을 분석한 게네바가 두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첫째, 스스로를 냉정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을 둔화시키기. 그럼 누군가를 잃어도 크게 힘들거나 트라우마를 앓진 않을 거야.”
“어딘가 귀에 익는데?”
성건우가 귀를 쫑긋 세우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성실한 성건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가 전에 했던 제안이잖아?”
성건우들이 또 한 차례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게네바가 말을 이었다.
“둘째, 스스로 더 강하게 만들기. 모든 걸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장목화는 이번에도 속으로만 빈정거렸다.
‘아니야, 그건 지나치게 이상적이야. 게다가 그건 무한루프라고. 충분히 강해져야만 그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해야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강해질 수 있는 거니까.’
이때 바삐 언쟁 중이던 성건우가 짬을 내어 제안했다.
“희생의 의미와 생명의 가치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모두가 힘을 합치면 못할 게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깨닫는 것도 방법이에요. 그럼 잃어버린 무언가도 그저 다른 방식으로 팀장님과 함께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 의미와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요.”
‘일리가 있는 것도 같네.’
한창 조용히 생각만 하던 장목화가 화제를 바꿨다.
“음, 넌 이번 유람선 탐색으로 뭘 좀 알아냈어?”
성건우는 발견한 규칙을 나열한 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아직은 우리를 위해 앞장을 서줄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를 찾지 못했으니 모든 것이 정상인 대낮에 522호 방 주인을 찾아보려고요.”
“어떻게 찾으려고?”
용여홍의 물음에, 성건우가 웃었다.
“트라우마의 순서로 볼 때 유람선에 올랐을 당시 그는 이미 각성자였어. 즉, 유람선에 탑승한 그는 아이언마운틴 제2 식품회사에 방문한 적 있다는 거야. 트라우마 속 사람들한테 그 화제로 대화를 걸면 찾을 수 있을 거야.”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이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야.”
장목화가 걱정스럽게 일렀다.
토론을 마친 뒤 각자 방으로 돌아간 구조팀은 다시 잠들었다.
이후 날이 밝도록 별일은 없었다. 악몽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백새벽이 질문했다.
“오늘 바로 휴고 사장을 찾아갈 건가요?”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답했다.
“그러자.”
* * *
차에 오른 용여홍은 뒷좌석 유리창 너머 거리의 상황부터 살폈다.
멀지 않은 곳의 평민 진료소 밖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들 낯빛이 창백하고,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
매우 비정상적인 광경이었다. 그린올리브 구역 주민 대부분은 생계를 겨우 유지할 만한 수입 한계선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기에 특별히 심각한 병을 앓는 게 아닌 이상 의사를 보러 가려 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좀 나아질 때까지 그냥 앓고 견딜 뿐이었다.
또 이 부근에서 이렇게 많은 중증 환자가 나타날 리도 없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 어젯밤 겪은 일과 사냥꾼 길드의 임무를 떠올린 용여홍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 그 악몽을 꾼 사람들일까?”
용여홍 바로 앞에서 운전 중인 백새벽이 동조해주었다.
“아마도.”
“나도 볼래, 나도.”
성건우는 즉각 게네바와 용여홍 몸 위를 가로질렀다.
용여홍도 익숙한 듯, 그냥 친구에게 깔린 채로 중얼거렸다.
“근데 어젯밤 악몽은 중간에 끊겼고 우리 중 두통이나 구역감, 피로감 등등의 증상은 없었는데.”
장목화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 우린 오랜 경험을 해온 전사야. 실력도 나쁘지 않고 의지도 굳건하고.
꿈에서라도 본능에 의지하면 그린올리브 주민보다야 꽤 오래 버틸 수 있었어. 야가 수종이랑 이두형 선생을 불러 악몽이 놀라 달아나게 할 때까지도. 근데 저 주민들은 아마 그 전에 괴물에 잡혔거나 어둠에 잠식됐을 거야.”
그러면 악몽에 따른 증상이 생기고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게네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론 성건우의 몸을 받쳤다.
“영향받은 인간은 진료소 앞에 선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 거다. 대부분은 이런 상황을 마주해도 하루 그냥 버티지. 푹 자면 회복되는지 보려고.”
그 스스로 만들어낸 인간 행동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한 판단이었다.
장목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백새벽에게 말했다.
“음, 가자. 한 바퀴 돌아서 휴고 여관으로 가는 거야.”
그래야 그들이 부근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