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화. 괴물
경험이 풍부한 전사 장목화는 결코 두려움에 얼어붙지 않았다. 노련하게 그 손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도록 곧장 벽 쪽에 붙었다.
그와 동시에 팔을 든 그녀는 개인용 바주카포 사신으로 문 뒤에서 흘러나오는 어둠과 지면을 받친, 피범벅 된 손바닥을 겨눴다.
뒤이어 장목화의 왼 어깨가 반동에 살짝 흔들리더니, 그대로 쏘아져 나간 바주카포가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콰광!
폭발음이 울려 퍼졌지만 짙은 어둠은 흔들리기는커녕 피어오른 붉은 화염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피범벅 된 손바닥은 안쪽으로 거둬들여졌다가 밖으로 뻗어 나오기를 반복하며 반대편 손과 함께 바닥을 기어 몸을 끌어냈다.
그것들 역시 격렬한 폭발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했다. 손상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손에 연결된 몸은 짙은 어둠에 숨어 윤곽만 어렴풋이 보였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사람 같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람이라기에는 기이했다.
폭격이 소용없는 걸 보고 개인용 바주카포 사신을 냅다 집어 던진 장목화는 그래도 물러나려 하지 않고 꿋꿋이 앞으로 나섰다.
이내 그녀는 양 팔꿈치를 교차시켜 앞으로 기어 오는, 인간 의식을 가진 듯한 미지의 괴물을 향해 왼팔을 뻗었다.
파지직!
한 줄기씩 뻗어 나온 은백색 아크가 허공에서 한 덩어리로 뭉친 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짙은 어둠을 때렸다.
그러자 복도 전체가 한낮처럼 밝아졌으나, 미지의 괴물을 숨긴 어둠까지 밝히지는 못했다.
장목화는 수많은 전광이 흩어지기 전,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어둠 속 저 묵직한 몸을 이끌고 나오는 괴물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미친 듯 질주했다.
이 복도 중턱에는 갈라지는 길이 없어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적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달리면 그만이었다.
힘껏 달리며 뒤에서 쫓아오는 무시무시한 생물에게만 정신을 집중한 장목화는 즉각 공간 환각을 발휘했다.
그 능력 아래 길을 착각한 상대가 복도 양쪽 방으로 들어간 사이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벌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뻗으며 양팔을 끊임없이 교차시키고 있는 미지의 괴물은 계속해서 복도를 따라 그녀를 뒤쫓았다.
‘내 능력이 소용이 없는 건가?’
장목화는 쉬지 않고 달리며 얼굴에 거울이 박힌, 녹회색 제복 차림의 인형 하나를 꺼냈다.
그 도구로 스스로에게 자극 장애 능력을 발휘한 그녀는 이 환경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화염에 갑자기 불살라졌을 때의 느낌으로 바꾸었다.
순간 몸을 바르르 떤 그녀의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급속도로 분비되었다.
쿵! 쿵! 쿵!
장목화의 달리기 속도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 빨라졌다.
그녀의 목표는 복도 끝에 자리한 갈림길이었다.
* * *
황야에 자리한 성건우 역시 밀물처럼 밀려든 짙은 어둠을 마주했다.
어둠의 가장자리에서는 피 칠갑이 된 창백한 손 두 개가 교차적으로 지면을 받치며 보일 듯 말 듯 뒤쪽 몸통을 목표 근처로 끌어오고 있었다.
탁!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성건우가 소리 나게 오른손을 튕기며 여유롭게 말했다.
“사지 동작 불능.”
번갈아 앞으로 뻗어오던 피범벅 된 손은 순간 움찔하는가 싶더니 계속해서 몸통을 끌고 기어 왔다.
“젠장!”
유약하고 겁 많은 성건우는 욕을 지껄인 뒤 군용 외골격 장치의 화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유탄 하나가 쏘아져 나갔고, 전광에 휩싸인 금속 탄환이 그 뒤를 따랐다. 또렷한 붉은색 레이저도 눈 깜짝할 사이 성건우와 그 어둠 사이의 거리를 가로질렀으며, 싯누런 총알들도 폭풍우처럼 그쪽을 뒤덮었다.
이것이 바로 제도 선사가 숭배하는 우세한 화력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기는 어둠에 그대로 삼켜져 버렸다. 나머지는 피범벅이 된 손바닥과 그것에 연결된 몸통에 닿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의 소리만 냈을 뿐,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진 못했다.
“괴물이다!”
성실한 성건우는 펄쩍 뛰며 허공에서 몸을 틀더니 미친 듯 질주했다.
쿵쿵쿵!
달리던 와중에 그가 파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확성기를 꺼내 외쳤다.
“속담에 원한은 풀어야지, 맺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어. 일단은 상황부터 파악하는 게 어때? 지금 당장 멈춰. 안 그럼 혼쭐이 날 거다!”
사고 유도였다.
하지만 어둠 속 괴물은 성건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러한 영향을 대폭 줄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지 이번에도 잠시 멈칫했다가 계속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기어 왔다. 더불어 그가 남긴 혈흔은 앞으로 다가오는 어둠에 잠식되었다.
대지가 경미하게 진동하는 가운데,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성건우는 더 빠르게 속도를 냈다.
그러던 그때였다. 어떤 성건우일지 모르는 그가 결정을 내린 듯 오른손을 뻗어 아래쪽 허공을 강타했다.
쾅!
피범벅이 된 손바닥 전방의 지면이 무너지며 거대한 구덩이를 형성했다.
어둠 속 괴물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 안에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내가 이렇게나 강하단 말이야?”
성실한 성건우가 놀란 듯 자신의 오른팔을 살펴보았다.
‘내 물질 간섭이 허공 너머 지면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하다고?’
원래는 일정한 장애물을 만들어 상대의 속도만 늦출 생각이었다.
성건우가 의아해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앞으로 밀려들던 어둠 또한 그 구덩이에 가라앉았다.
그때, 피범벅이 된 창백한 손바닥이 다시 그 어둠 가장자리에서 뻗어 나왔다. 두 손은 전처럼 번갈아 가면서 지면을 받치고 박박 기었다.
고개를 돌려 상황을 관찰하던 성건우도 바로 이 광경을 목격했다.
“아이씨, 이건 너무하잖아!”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 다시 내달리기 시작한 그가 확성기를 높이 쳐들었다. 이번에는 사유 유도의 방식이었다.
“잘 들어. 난 아는 사람이 아주 많고 친구도 무척 많아. 계속 날 쫓아오면 그 사람들 다 데려와서 널 짓밟아줄 거야! 지금도 포기하기에는 늦지 않았어. 같이 염불이나 외는 게 어때?”
뒤에서 출렁이며 밀려드는 어둠과 두 팔을 뻗으며 기어 오는 괴물 모두 아무 변화가 없었다. 전과 다름없이 성건우를 끈질기게 쫓는 그것들의 속도는 외려 점점 빨라지고 있는 듯했다.
성급한 성건우는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좋아! 패싸움이 통하는지 보자!”
이야기하는 사이 성건우의 상반신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 하나는 유약하고 겁많은 성건우, 하나는 자비로운 제도 선사, 또 하나는 악을 증오하는 성건우였다.
그들 중 더러는 친구를 소환하려는 듯 허공으로 손을 뻗었고, 더러는 육식주를 움켜쥔 채 아득하게 짙어진 눈동자를 드러냈다. 몇몇은 생명 천사 목걸이를 쥔 채 목표에게 정신을 집중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의식 박탈!”
제도 선사가 장엄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육식주에서 청록색 빛이 피어오르자 어둠 속 괴물이 양손을 멈췄다.
그런데 금세 원상태를 되찾은 괴물은 전보다 더 포악해져서 거의 나는 듯 빠르게 기어 왔다. 성건우가 들고 있는 물건이 그가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쏜살같았다.
“심장 마비!”
악을 증오하는 성건우가 즉각 생명 천사 목걸이를 이용했으나 피로 범벅이 된 창백한 손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아직이야?”
성실한 성건우가 켕기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괴물은 당장 그를 따라잡을 듯했고, 어둠은 이 세상을 다 잠식할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유약하고 겁 많은 성건우가 허공에서 한 인영을 끄집어냈다. 노란색 옷에 빨간색 가방을 멘, 수종이였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 역시 도우미를 불렀다.
검은색 가운을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른 이두형이었다.
두 조력자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성건우를 뒤덮을 듯했던 어둠은 그대로 굳고 바닥을 박박 기며 달려들던 괴물도 멎어버렸다.
이후 그 둘은 눈 깜짝할 사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산산이 조각난 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황야 역시 꿈이나 환상처럼 흐릿해졌다.
* * *
눈을 번쩍 뜬 성건우는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그는 침착하게 양팔을 벌리고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신실한 목소리에, 장목화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반응을 보였다.
“너도 꿈꿨어? 모르는 사이에 잠든 거야?”
그녀는 자신이 기원의 바다 안에서 그 섬을 연구하고 있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 빌린 숙소는 방 두 개에 침대는 하나씩밖에 없어서, 현재 장목화와 성건우는 중앙에 권총 등으로 장애물을 쌓아 침대를 함께 쓰고 있었다.
수시로 황야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타인과 같은 침대를 쓰는 건 그다지 거북해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야외에는 가릴 자리조차 없었다.
장목화는 이런 상황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지만, 다른 방에 배정된 용여홍이 잘 잘 수 있을지는 걱정이 좀 되긴 했다.
“안 그럼 꿈을 꿨겠어요?”
장목화는 그 성실한 태도에 개의치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어둠 속의 괴물한테 쫓기는 꿈이었어? 사냥꾼 길드에서 봤던 그 임무의 설명이랑 엄청 비슷했지?”
탁!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어쩐지, 어딘가 익숙하더라니!”
장목화는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근데 두통이나 구역감, 피로감 같은 것들은 안 느껴지는데. 당장이라도 다시 잠들 수 있을 것도 같고. 너도 한참 달리던 중에 깨어난 거야?”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저는 이것저것 시도해볼 생각으로 이두형 선생님과 수종이를 소환했어요. 그러니까 그 괴물이 놀라서 달아나는 것 같던데요. 역시 꿈이었네요. 이두형 선생님과 수종이는 제가 원하는 대로 곧장 소환됐을 뿐만 아니라 어떤 갈등도 빚지 않았거든요.”
지금의 성건우는 방금 막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성급한 성건우였다.
“그게 통했다고?”
장목화는 자신이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그것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은 것도 성건우가 어둠 속 괴물을 놀라 달아나게 한 덕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건우는 재차 양팔을 벌리고 몸을 살짝 젖히며 도취된 듯한 말투로 장목화의 질문 아닌 질문에 답했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나요!”
장목화는 새삼 그 말이 어디에나 쓸 수 있는 만능임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꿈에 연루되어 있기에 유난히 더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작은 흰둥이랑 작은 빨강이도 비슷한 꿈을 꿨는지 물어보자.”
“지금 깨우겠다고요?”
제도 선사는 어떻게 그렇게 배려가 없을 수 있냐는 듯 대꾸했다.
그러나 장목화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인격이 바뀐 그는 다시 또 매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지금 바로 가시죠!”
장목화는 눈동자를 위로 살짝 굴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벌써 화장실 가려고?”
거실에 앉아있던 게네바가 바로 물었다.
그는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지능 로봇으로서 동료들이 잠든 방의 기척까지 살피지는 않았다.
게네바의 질문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장목화는 그의 사고방식이 어쩐지 점점 성건우와 비슷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팀에 두 명의 성건우가, 아니, 열한 명의 성건우가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말하기 전 느릿하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낮에 사냥꾼 길드에서 본 그 A급 임무 기억해?”
게네바는 빠르게 장목화의 숨은 말뜻을 파악했다.
“그 꿈을 꾼 거냐?”
“응.”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다 벌써 백새벽, 용여홍이 잠든 방으로 살금살금 향하는 성건우를 보았다.
끼익-
그러나 성건우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백새벽이 먼저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곧장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랑 작은 빨강이, 같은 꿈을 꿨어요. 사냥꾼 길드에서 본 임무 설명과 엄청나게 비슷한 꿈이요.”
“맞아요, 맞아.”
뒤따라 나온 용여홍이 동조했다.
“우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