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화. 동굴 속
순간, 동굴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의 피부는 반 토막 난 철탑처럼 검은 편이었다. 거기다 머리는 새집 같은 데다 눈빛은 혼탁하고, 흉악한 기운을 가진 남자는 역시 또 하나의 무심자였다.
웃통은 벗고 캔버스 바지만 입은 남자는 계속 낮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에게서 발산되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게 하는 기운에 용여홍은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제 무게도 지탱하지 못하고 주저앉을 뻔했다.
유일하게 그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게네바는 동굴 안 바위 뒤에 숨어 엄청나게 뛰어난 기술로 응전하는 무심자들과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 무심자 중 더러는 개인용 바주카포를, 더러는 원거리에 더 적합한 저격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게네바에게 어느 정도 위협을 가하기에는 충분한 무기였다.
하지만 게네바는 그것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현재 카멜레온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동굴 환경에 애를 먹고 있는 건 뒤따라 들어올 장목화 때문이었다. 이 적들을 완전히 제압해야만 폭발로 인한 충격의 여파와 파편에 뒤따라 들어올 장목화를 다치지 않게 보호할 수 있었다.
용여홍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검은 늪 철갑뱀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내 장목화는 실체화된 공포가 거대한 쇠망치처럼 심장을 연거푸 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방금 막 동굴로 들어온 그녀는 덜덜 떨지도, 몸서리를 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잔뜩 흥분한 표정이었다.
‘또 다른 고등 무심자? 겐이 전에 말한 그 녀석인가? 이렇게 규모가 작은 무심자 집단에 고등 무심자가 둘이나 있다고? 확실히 뭔가 이상해.’
개인용 바주카포를 내던져버린 장목화는 숨통을 조여오는 두려움 속에 유탄 발사기를 쳐들었다.
자극 장애!
게네바의 정탐 결과를 들었던 장목화는 일찍이 이 자극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바꿔두었었다. 두려움과 공포를 흥분과 설렘으로 바꿔둔 것이다.
이 영감의 원천은 당연히 성건우였다.
탕!
쏘아져 나간 유탄 한 발이 건장하고 피부가 검은 고등 무심자에게로 날아갔다. 고등 무심자는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콰릉!
유탄은 남자 고등 무심자의 상반신을 그대로 명중했고, 그로 인한 폭발에 그의 몸은 산산이 조각났다.
뒤이어 게네바와 숨바꼭질하던 무심자들이 용감무쌍하게도 한 명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다다다-
하지만 연이어진 게네바의 총격에 그들은 분분히 쓰러졌다.
이제 정신을 차린 용여홍은 다시 동굴 깊은 안쪽을 향해 돌진했다.
능숙하게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의 탄창을 바꾼 그는 끊임없는 근거리 사격으로 도중에 만난 적들을 소탕했다.
그러던 그때, 그의 시야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무심자였다.
눈빛이 혼탁하고 얼굴 근육과 치아가 물어뜯기 적합하게 약간 변이돼 있다는 걸 제외하면, 평범한 어린아이와 아무런 차이도 없어 보였다.
등이 살짝 굽은 아이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용여홍을 보며 몸을 덜덜 떨었다. 공포에 질려 울고 있는 그 눈이 더더욱 가련하게만 보였다.
결국 용여홍도 아이 앞에선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수류탄을 꺼내든 어린 무심자는 핀까지 냅다 뽑아버리곤 흉악한 눈빛을 번득이며 그대로 용여홍에게 내던졌다.
흠칫 놀란 용여홍은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날리면서 허공에서 몸을 웅크렸다.
콰릉!
용여홍은 다행히 직접적인 충격은 피했지만 대량의 파면과 여파에는 꼼짝없이 휩싸였다. 인공지능 갑옷이 그 모든 것을 막아주어 참 다행이었다.
유일하게 보호받지 못한 부위가 있다면 T1형 기계 팔이었으나 이것의 강도도 검은 늪 철갑뱀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헉, 헉…….”
숨을 헐떡이던 용여홍이 몸을 굴리며 일어났을 때 조금 전의 그 어린 무심자는 이미 장목화에 의해 온몸이 벌집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무심자들을 쓰러뜨리며 동굴 깊은 안쪽에 이른 구조팀은 어린 여자 무심자 두 명과 그녀들이 업은 아이들 몇 명을 만났다.
두 무심자는 잔뜩 긴장한 채 구조팀을 응시하며, 평균 연령이 5살도 채 안 될 것 같지만 흉악한 느낌만은 충만한 아이들을 제 뒤로 숨겼다.
“우우-.”
두 여자가 우는 소리를 내며 적들을 위협하려 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지만 절대 물러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을 보자니 장목화, 용여홍도 그대로 멈춰서 아무 공격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그들을 앞지른 유탄 한 발이 동굴 안쪽 깊은 곳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릉!
폭발음과 함께 인영들이 하나둘 풀썩 쓰러졌다.
이후 장목화, 용여홍의 곁에 이른 게네바가 낮은 합성음을 냈다.
“지금의 저들은 인간의 적이야. 자비심은 인간에 대한 죄일 뿐이다.”
게네바의 말을 듣고 장목화는 입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게네바의 핵심 설정 중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을 더 잘 모시기.
이내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저들이 꼭 인간만 먹고 사는 건 아닌데⋯⋯.”
말을 잇던 그의 입이 다물렸다.
그때 마침 성건우, 백새벽이 동굴 천장에 매달려 바람에 말려지고 있는 발가벗은 시체들을 지나 이미 엉망진창이 된 깊은 안쪽으로 들어왔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백새벽은 이곳 상황에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고 간단히 이야기했다.
“완전한 무심자 집단이네요.”
이는 황야유랑자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단어였다. 그들은 무심자가 이룬 소형 사회를 부락이나 부족으로 일컫는 건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 느꼈다. 이 때문에 주로 집단이란 단어로 대체하는 편이었다.
빠르게 원상태를 회복한 장목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겨우 수십으로 이뤄진 무심자 집단에 능력을 각성한 고등 무심자가 둘이나 있다니. 비율상 너무 비정상적인 일이야. 단순한 특수 사례나 자연스러운 돌연변이의 발생 비율로도 설명이 안 돼. 배후에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고등 무심자가 얼마나 희귀한지는 그때 그 안여향, 오수혁 팀이 늪 1호 폐허를 탐색하며 이런 상황에 크게 대비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들 자체가 수천수만 명으로 이루어진 무심자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아니라면요.”
백새벽이 장목화 말의 허점을 메웠다. 늪 1호 폐허 같은 곳이면 특수한 수종이가 없었다 한들 무심자 규모만으로도 여러 고등 무심자의 탄생을 뒷받침하기엔 충분했다.
장목화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단 조를 나눠서 여길 수색하고 시체를 조사하면서 무슨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한번 보자.”
용여홍도 마음을 진정시킨 뒤 백새벽을 도와 동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한참 후, 게네바가 1차 검시 결과를 알려왔다.
“시체들에는 바늘구멍이나 수술을 받은 흔적이 없다.”
그렇다면 우선 과학 실험으로 인해 이 무심자들에게 이상 현상이 나타났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었다.
실험에서 정기적인 채혈 검사와 비교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또 때로는 수술을 통해 실험 효과를 판단하기도 했다.
한 시체 옆에 쪼그려 앉은 성건우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말했다.
“거의 모든 시체에 림프종 등을 앓는 등 방사능 흔적이 남아 있네요.”
용여홍이 약간 놀란 듯 흠칫했다.
“그런 것도 알아?”
성건우가 바로 게네바를 가리켰다.
“겐이라면 언제든 믿어도 되니까.”
조금 전 게네바와 이미 이런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결과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가 강요한 일이었지만.
곧이어 백새벽이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그걸로는 아무것도 설명이 안 돼. 수많은 무심자가 활동하는 구역은 오염이 심각한 곳이야. 안 그럼 그들은 일찍이 대형 세력의 정규군에 의해 완전히 척결됐겠지.”
성실한 성건우가 반박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대형 세력이 그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황야유랑자 거점도 많잖아? 그들의 인력에도 한계가 있어. 숨기에 적합한 곳은 차고 넘치도록 많기도 하고.”
이번엔 용여홍이 백새벽을 도왔다.
“근데 그런 황야유랑자 거점은 대부분 환경이 비교적 열악하잖아. 겨우 살아갈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돼. 농사짓기 적합하고, 수자원도 그다지 오염되지 않은 곳은 다 대형 세력이 점거했어.”
짝!
결국 장목화가 나서서 손뼉을 한 번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좋아, 좋아. 조사 계속하자고.”
7, 8분 후, 온전치 못한 시체 옆에 쪼그려 앉은 장목화가 굵은 줄무늬의 남색 긴바지에 달린 금속 장식을 더듬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성이 엄청 강하네⋯⋯.”
성건우가 다가오며 호기심을 표했다.
“구세계에서는 그런 게 유행이었을까요? 성별에 따라 각자 다른 극의 바지를 입는 거죠. 그럼 남녀는 어느 정도 가까워지기만 해도 서로한테 끌어당겨지지 않을까요? 별 호감이 없다면 거리를 좀 유지해달라고 부탁하고요.”
‘이건 또 대체 무슨⋯⋯.’
장목화는 역시 자신 같은 범인은 성건우의 생각을 절대로 좇아갈 수 없음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그래도 그녀가 갖은 생각을 짜내 호응해주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귀와 눈이 밝은 게네바가 이미 그에게 알아서 대답해주고 있었다.
“나도 비슷한 문제를 발견했다. 시체들이 입은 옷과 바지의 금속 장식이 모두 자화(磁化)돼 있어.”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던 장목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원래 옷을 입고 있고, 나머지는 황야유랑자들에게서 빼앗은 옷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누군가의 옷은 자화된 장식이 붙어있고 다른 누군가의 옷은 멀쩡한 것이 아닐까?
장목화의 추측은 빠르게 확신으로 바뀌었다. 용여홍, 백새벽이 동굴의 다른 출구 부근에서 방망이, 비수, 식칼, 쇠막대 등의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중 금속인 것은 많건 적건 모두 자화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장목화가 추측에 나섰다.
“이 무심자 집단은 심각하게 오염된 곳에서 왔을 거야. 거긴 무슨 이유가 있어 아주 강한 자기장이 형성돼 있는 거고. 근데 지금은 그들이 원래 거기에 살았던 건지, 아니면 여기로 오는 중에 거치기만 한 건지는 모르겠네.”
“그들 중 고등 무심자 수가 많은 건 강력한 자기장 영향 때문일까요?”
용여홍의 말에, 순간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한 번 시도해봐.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잖아?”
용여홍은 거의 반사적으로 성건우를 째려보았다.
‘내가 바보냐?’
성건우는 계속해서 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그게 된다면 적당한 사람을 찾아 각성 능력이 유전되는지도 한번 확인해볼 수 있잖아.”
용여홍이 아무 대꾸도 못 하던 사이, 결국 장목화가 나서주었다.
“참 나. 각성자가 나타난 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유전이 가능했다면 회사에서 너랑 나를 이렇게 독신으로 내버려 뒀겠냐?”
성건우가 반박했다.
“아직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죠.”
장목화는 그냥 능숙하게 그를 무시하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이제 부근의 다른 황야유랑자 거점에 가서 이 근처에 오염이 심각하고 자기장의 이상 현상을 보이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자. 음, 여기 시체들은 묻어버리자. 조금 깊이 묻어버리고 가치 있는 물건은 전부 챙기고. 낭비할 순 없잖아. 나중에 거래할 때 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