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78화 (578/649)

578화. 황야의 습격

거점 안의 집 중 더러는 구세계에서 쓰던 걸 어느 정도 고친 것이었고, 더러는 목재로 새로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두 스타일의 건물들은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느낌을 냈다.

성건우, 장목화가 느꼈던 것처럼 이곳에 더 이상 인간은 없었다. 곳곳에 또렷한 대량의 혈흔만 남아있었다. 벽에 뿌려져 있거나 바닥에 멀리까지 흩어진 혈흔은 거의 모든 건물 주위에서 볼 수 있었다.

‘……학살이다.’

처음 보자마자 이 생각을 떠올린 용여홍은 이후 수색을 진행하면서도 의혹은 점점 짙어졌다.

학살이 발생한 것 같다고 의심되는 곳치고, 여기엔 시체 한 구 보이지 않았다. 가끔만 발견되는 손가락이나 썩은 살점 따위가 전부였다.

설마 이곳에 살던 모든 황야유랑자가 폭격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걸까?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발견된 살점 수가 너무 적었다.

게다가 거점 안에선 장작을 패는 용도의 도끼를 포함한 그 어떤 무기도 보이지 않았고, 이불, 담요, 옷, 각종 식량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원래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거점 안의 황야유랑자들은 겨울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각 집에는 다른 자원과 교환할 수 있는 금속 제품과 연료 발전기 두 대가 쌓여있었다.

탐색을 마친 백새벽이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무심자 집단에 습격당한 것으로 의심되네요.”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한 용여홍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덧붙였다.

“만약 강도단이나 포획대면 발전기랑 금속 제품도 싹 가져갔을 거야. 그런 것들은 때론 노예보다 가치가 더 높거든. 또 변이 생물이나 다른 야수였다면 무기나 옷, 이불, 담요까지 가져가지는 않았을 테고. 그러니까 무심자 집단만이 이런 현장을 남길 수 있지.

여러 황야유랑자는 겨울을 맞아 식량이 부족해진 무심자들이 가장 공격성이 강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해. 근데 사실 봄날의 무심자라고 해서 다를 건 없지. 긴 겨울을 지내고 살아남은 무심자들에게 더 이상 남은 식량은 없고, 그래서 더더욱 보충에 급급해하니까.”

장목화는 안전부의 다른 대대에서 복역할 당시에만 무심자 집단의 거점 습격을 몇 번 경험했었다. 반고 바이오에 의탁해서 살아가던 거점은 그들의 도움 아래 순조롭게 위기를 넘기고 이렇게 끔찍한 재난을 피했다.

곧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야에서 살아가는 유랑자들이면 절대 그런 무심자에 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을 거야. 보아하니 그들은 실력 면에서 완전히 압도당했던 것 같아.”

백새벽은 전에 맞닥뜨렸거나 들었던 걸 떠올리며 대꾸했다.

“이곳은 원래 그렇게 강력한 무심자 집단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봄이 된 이후 갑자기 이곳으로 이주해온 거죠.”

장목화는 조용히 침묵에 잠긴 성건우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어쩌죠?”

용여홍이 물었다.

거래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용여홍은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내일 다시 출발할 건지, 아니면 하늘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으니만큼 계속해서 이동할 건지를 묻고 있었다.

이때 돌연 성건우가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부근에 혹시 다른 황야 유랑자 거점이 있어?”

“20킬로미터 안에 세 군데 더 있어.”

게네바의 답변을 듣고, 백새벽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곳들은 아직 습격당하지 않았을 거야. 그 무심자들은 여기서 얻은 식량으로 한동안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거고, 그런 상황에서 공격성은 낮아져.”

배를 두둑이 채웠을 때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한껏 게으름 피우는 야수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장기적인 보존이 불가능한 상황에 한 번에 너무 많은 먹잇감을 사냥한다는 건 대대적으로 낭비였다. 지능이 야수보다 약간 높은 무심자라면 그러느니 차라리 가지고 있는 식량이나 해치우기를 택할 것이었다.

성건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발적으로 제안했다.

“그 무심자 집단, 처치하고 갈까요?”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그들 실력을 봤을 때 습격에 나서면 나머지 세 거점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데⋯⋯. 시도는 해보자. 근데 무턱대고 달려들면 안 돼.”

지금의 구조팀에게 무심자 집단 처치는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다지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 * *

저녁 무렵, 하늘 가장자리가 아직 태양 빛을 붉게 머금고 있을 때, 게네바, 용여홍이 환경 정보를 수집하고 비교 분석한 끝에 목표 집단을 찾아냈다.

그들은 비교적 큰 언덕 안, 비밀스러운 한 동굴을 점거하고 있었다.

카멜레온 타입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게네바가 근처에 숨어들어 자세한 관찰을 진행했다.

“동굴 입구에 경비 역할을 하는 네 무심자가 있어. 각각 엽총, 소총, 산탄총,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고.”

장목화가 의혹과 감탄을 반씩 드러냈다.

“꽤 무기가 빵빵하네? 전의 그 황야유랑자 거점을 기습해 얻은 건가?”

백새벽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꾸했다.

“그러기도 하겠지만, 전의 현장을 봤을 때 그들의 화력은 원래부터 만만치 않았던 것 같아요.”

게네바가 말을 이었다.

“동굴 안에서 가끔 독특한 기운이 흘러나와. 그 기운에 경비를 선 무심자 넷이 두려움에 벌벌 떨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고?”

장목화가 되물었다.

“고등 무심자인가?”

성건우도 약간 흥분한 듯했다.

순간 용여홍도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어쩐지 그들이 그 황야유랑자 거점을 박살 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 무심자들은 강력한 화력뿐만 아니라 각성자에 상당하는 우두머리도 있는 모양이었다.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들 내력에 일정한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커.”

고등 무심자 수는 극히 드물었다. 큰 폐허 도시 안, 무심자 수가 수천수만에 달했을 때야 나타날까 말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게네바는 이곳 동굴에 무심자가 50명이 채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으니, 아무리 가능성이 작다고 해도 있기만 하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명령을 내렸다.

“장비 갖춰. 뜻밖의 상황에 대비하자. 작은 흰둥이는 저격 위치로 가고, 작은 빨강이는 겐이랑 같이 정면으로 돌진해. 내가 지원할게. 야는 맨 뒤에서 영향을 발휘하면서 전체적인 상황을 통제하는 거야.”

한 차례 바쁘게 움직인 끝에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백새벽은 게네바를 뒤따라 그가 조금 전 정찰하면서 찾아둔 저격 위치에 이르렀다.

반쯤 마른 나무 위인 이곳으로 오니,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동굴 입구에 네 무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를 조정한 백새벽이 천천히 조준하는 사이, 검은 늪 철갑뱀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용여홍과 카멜레온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게네바는 몰래 숨어 으슥한 곳에 자리한 동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목화는 성건우를 돌아보며 단단히 일렀다.

“사고 유도는 쓸 생각도 하지 마. 저들은 네 말을 못 알아들으니 아무 효력도 없을 거야.”

그만한 전투 지능과 경험이 있는 성건우라면 당연히 이 점을 알고 있으리라 믿지만, 갑자기 또 다른 인격이 이상한 시도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떨쳐버릴 순 없었다. 그녀가 주의 주는 건 실제론 경고인 셈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한창 몸을 풀던 성건우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지금 저 둘을 따라가지 않으면 놓칠 텐데요.”

그의 준비 동작은 양범구로부터 배운 방송 체조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절도 있으면서도 민첩했다.

잠시 성건우를 흘겨본 장목화는 용여홍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움직여 한 걸음씩 따라가기 시작했다.

게네바는 이미 카멜레온 인공지능 갑옷의 은신 능력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물론 장목화는 전기 신호로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곧 용여홍은 동굴 밖에서 경비 역할을 하는 네 명의 무심자를 보았다.

전부 남성으로, 평범한 무심자처럼 등이 살짝 굽어 있었고, 눈동자는 혼탁했으며, 흰자는 잔뜩 충혈돼 있었다. 기름진 머리카락도 잔뜩 헝클어진 데다 얼글 근육도 어느 정도 변형된 상태였다.

몸에 잘 맞지도 않고 곳곳에 기운 흔적이 가득한 옷차림의 무심자들은 각각 소총, 엽총, 산탄총, 기관단총을 쥐고 있었다.

사실 대형 세력의 정규군에게 무기가 다양하다는 건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에 맞는 모든 총알이 다 갖춰져 있어야 했고, 그에 맞는 수리 방법도 다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후방 지원의 효율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유적 사냥꾼들은 이 부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고, 쓸모가 있으면 쓰고 쓸모가 없으면 바로 버려버리는 무심자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용여홍은 네 명의 무심자에 집중하며, 백새벽이 첫 번째 총성을 울리길 기다렸다. 상당히 미약한 기척과 함께 빠른 속도로 날아든 첫 번째 총알은 기관단총을 쥔 무심자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녀석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피가 붉은 꽃처럼 피어났다.

그 신호에 맞춰 숨어 있던 곳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용여홍과 장목화는 동굴을 향해 쿵쿵 달려갔다. 돌격하는 와중 돌격 소총과 군용 외골격 장치에 장착된 기관단총을 이용해 화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밀집된 총성 속에 세 무심자 중 하나는 백새벽의 총에 머리가 터져 죽었고, 다른 하나는 근처에서 몰래 접근해 제압한 게네바에게 처형당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총알 여러 발을 맞고 온몸으로 피를 뿜었다.

그들이 바닥으로 쓰러져가던 그때, 동굴 안에서 이 기척을 느낀 건지 한 무심자가 튀어나왔다.

이번에 나타난 무심자는 여자였다. 얼굴이 더럽고 꾀죄죄한 그녀는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무심자의 시선은 용여홍을 살짝 앞질러 장목화에게 고정되었다.

순간 장목화의 반신은 마비가 되었다. 더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다룰 수도 없이 그녀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여자 무심자는 손에 쥔 산탄총을 들어 올렸다.

이때 장목화가 황급히 눈빛을 흐리자, 여자 무심자가 쥔 산탄총은 위쪽으로 2인치 정도 들어 올려졌다.

탕!

대량의 잔 탄알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갔다.

이것이 바로 공간 환각이었다. 장목화는 이 능력으로 적의 판단을 유도하면서 아무도 없는 곳을 겨냥하게 했다.

야수와 같은 직감을 바탕으로, 사격에 실패하자마자 위험을 감지한 여자 무심자는 황급히 동굴 안으로 물러나 다른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이때, 그녀의 다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사지 동작 불능이었다.

콰릉!

바닥에 쓰러졌던 장목화가 동굴 입구를 향해 바주카포를 한 발 쐈다.

폭발은 그 고등 무심자를 집어삼키며 그녀의 육신 일부를 찢어버렸다.

짙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 게네바, 용여홍도 연달아 동굴로 달려들었다.

* * *

구조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높은 곳에 걸려 흔들리는 시신들이었다. 흔들리는 건 조금 전 폭발로 인한 기류의 영향이었다.

싹 발가벗겨진 시체 중 일부는 심지어 피부까지 벗겨져 붉은 살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족히 수십은 될 법한 이들은 전에 습격을 받은 그 거점의 황야유랑자들이었다. 그중 가장 나이가 어린 시신은 겨우 몇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다.

그 어린 생명이 동굴 천장에 걸려 힘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니, 용여홍의 눈가도 붉게 젖어버렸다.

이후 손에 들린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쳐든 그가 폭발을 피해 숨어 있던 무심자들을 향해 난사를 시작했다.

다다다-

무심자들은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총알에 그대로 관통을 당하거나 신체 일부를 잃었다.

한 차례 난사를 마친 용여홍이 탄창을 바꾸려던 그때였다.

웅-

뭔가 머릿속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서도 본능적으로 기인하는 강렬한 두려움이 차올랐다.

이에 용여홍은 무기를 쓰는 것도 잊은 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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