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74화 (574/649)

574화. 대담한 가설

성건우의 헛소리가 끝나자 잠시 머뭇거리던 용여홍이 말했다.

“사실 이번 수확을 수확이라고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들어갔던 곳이 정말로 제2 식품회사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까요.”

“일단은 맞다고 치자.”

장목화의 말에, 용여홍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음, 그럼 다른 추측도 가능해요. 첫째, 강준호가 바로 유옥로에 빙의한 그 존재일 수 있어요. 자기 사진과 소개를 제거한 건 비밀 유지를 위해서죠.

근데 팀장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유옥로의 얼굴은 짙은 원한에 일그러져 있었다고 했으니, 딱 맞아떨어지는 얘기는 아닐 것 같네요.

그럼 두 번째, 작은 흰둥이가 전에 추측했던 것처럼 유옥로에 빙의한 존재는 그 사람한테 어느 정도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순간 백새벽이 용여홍의 말을 끊었다.

“내 말뜻은 그게 아니었어. 유옥로는 그 존재가 처음으로,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빙의해 있던 몸이야. 그러니 자연히 그 몸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다는 거지.

그리고 당시 팀장님이랑 야가 본 유옥로는 빙의된 지 얼마 안 된 때였을 거야. 안 그럼 직원 소개란을 그렇게 오래 들여다볼 이유가 없잖아.

그래도 네 추측이 틀렸다고 볼 순 없어. 어쩌면 그 존재는 빙의 전부터 유옥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구세계가 파괴됐을 당시 이미 무심자가 된 유옥로를 선택해 그 사람한테 빙의한 거겠지. 그 사람과 계속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장목화는 귓가에 제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처음부터 빙의 대상을 바꿀 생각이 없었던 거네. 유옥로의 육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까지 522호 방 주인의 육체를 점거하지 않았던 거야.

음, 야가 했던 추측의 앞부분과 결합해보면 유옥로와 강준호는 정말로 사귀는 사이였는지도 몰라. 근데 유옥로를 좋아하던 누군가가 유옥로한테 빙의한 뒤 정적의 사진을 보고 깊은 원한을 느껴 그걸 찢어버린 거지. 그렇게 보면 유옥로가 일그러진 표정을 드러낸 것도 말이 돼.”

이 대목에서 장목화는 잠시 또 뜸을 들였다.

“그렇다면 방민서와 이진용의 아들, 즉 신형 치료를 받기 위해 북방의 어느 병원으로 이송된 식물인간도 이 가설에 포함될 수 있어.”

돌연 백새벽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맞아요! 그 사람은 당시 제2 식품회사에서 일하면서 유옥로를 몰래 좋아했거나 서로 좋은 감정이 있었는지도 몰라요. 다만 아직 확실한 관계는 아니었던 거죠. 그러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거예요.

그리고 몇 년 후,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 그 사람은 모종의 상태로 회귀했어요. 멀리서 자신의 부모님을 뵙고 상황을 파악하고, 한편으로는 아이언마운틴 시티로 와서 유옥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려고 했던 거죠.

근데 뜻밖에도 회사의 다른 직원 강준호와 사귀고 있는 걸 발견한 거예요. 강준호는 그 사람의 여자친구를 빼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직원 소개란 위의 그 사람 자리까지 뺏어갔어요. 이를 보자마자 그 사람의 분노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했을 거예요.”

장목화는 백새벽의 가설에 신이 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직 가설에 불과해도 꽤 합리적인 데다 여러 방면에서 딱딱 맞아떨어졌다.

‘역시, 세심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저런 추측을 할 수 있다니까.’

장목화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성건우, 용여홍, 게네바를 바라봤다. 그들에게는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셋은 백새벽의 박자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듯 멍하니 귀만 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장목화의 시선을 느낀 성건우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들었다.

짝짝짝!

어김없이 때아닌 성건우의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느닷없이 손뼉을 쳐대는 건 성건우의 습관이기에, 백새벽도 그냥 덤덤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분석이 결코 부끄러워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장목화 역시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성건우를 무시하고 용여홍과 게네바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 무슨 생각이라도 있어?”

게네바가 분석 결과를 알렸다.

“천천히 더듬어나가 보면 상당히 합리적이군. 근데 증거가 부족하지 않나? 어떻게 오늘 얻은 수확만으로 그렇게 많은 것들을 추측해낸 거지?”

그가 보기엔 입술 자국 반쪽만 보고 삶과 죽음에 연루된, 아주 슬픈 러브스토리를 추측해 낸 것 같았다.

용여홍도 비슷한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너희는 세심하다기보단 좀 둔한 편이잖아.”

늘 세심하고, 스스로가 감정이 풍부하다고 자부하는 용여홍은 속으로만 열심히 아니라고 항변했다.

이때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성건우 민주 협의회 회원이 좀 부족한 것 같네요. 자기를 여성으로 정의하는, 직감이 뛰어난 성건우가 필요하겠어요. 그래서 우리의 사고가 불완전하고 결함이 많았던 가봐요.”

우리란 바로 성건우 안의 그 성건우들을 가리켰다.

단박에 성건우의 말뜻을 이해한 장목화의 얼굴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너 지금, 여성 인격까지 만들어내고 싶다는 거야?’

여자 성건우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짧게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게네바는 성건우의 아쉬움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지금 우리한테 직감이 뛰어난 여성 동료가 둘이나 있잖아. 유일한 문제가 성건우 민주 협의회 회원이 아니란 거지만. 근데 이거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너희 반고 바이오 혼인 관리 조례에 따르면 결혼하면 한 가족이 되니까, 그럼 절반은 성건우 민주 협의회 회원이 될 수 있는 거다.”

순간 흠칫 놀란 용여홍이 속으로 포효했다.

‘잠깐, 잠깐만. 겐!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런 망할!’

장목화와 백새벽 역시 약간 굳은 표정을 드러낸 그때, 게네바가 또 하나 문제를 발견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근데 너희 반고 바이오 혼인 관리 조례에선 중혼을 허락하지 않지? 일부일처제니까 야 너는 둘 중 한 사람만 선택할 수 있겠군. 아니, 아니지. 선택이란 표현은 좀 적합하지 않아. 혼인은 상호적인 거니까⋯⋯.”

“겐. 딴 길로 새지 마.”

결국 장목화가 심호흡을 길게 뱉으며 저지했다.

“그러지.”

겐이 입을 다물자, 용여홍이 얼른 대화를 본론으로 되돌렸다.

“만약 유옥로한테 빙의했던 그 사람이 정말 방민서와 이진용의 아들이라면 그 사람은 참 선했던 거네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522호 방 주인을 포함한 수많은 유적 사냥꾼이 제2 식품회사에 난입했는데 그 사람은 그냥 사람들을 쫓거나 무시했을 뿐, 실제로 해를 끼치진 않았잖아요.”

그러지 않았다면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는 일찍이 금지 구역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성건우는 곧 왼손을 들어 가슴팍 앞에 세웠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백새벽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랬으면 불가의 성지가 되지도 않았겠지.”

그 후로 한 차례 더 토론을 나눈 뒤 장목화가 정리에 나섰다.

“지금 보기는 꽤 합리적인 추측이야.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랑 장하시 연합 철강 공장, 이 두 불가 성지를 하나로 연관 지을 수 있으니까. 근데 그렇다고 꼭 사실이라 볼 순 없어.

5대 불가 성지는 보리와 장생이라는 두 달지기에 연루돼 있어. 두세 곳이 한 조를 이루고 있다는 건 그럴듯하지만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가 꼭 장하시 연합 철강 공장에 관련돼있으리라 볼 수는 없어. 타이시티 제1 고등학교나 호움 난임센터, 대강시 임해 마을과 관련돼있는지도 모르잖아.”

즉, 5대 성지는 보리와 관련된 한 조, 그리고 장생과 관련된 다른 한 조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내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지금 우리가 세운 건 대담한 가설일 뿐이니까요.”

본인 말버릇을 따라 하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도 헛웃음이 터졌다.

“야, 자꾸만 딴 길로 가지 말고. 방금 우리 추측이 맞다고 가정해보자.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와 장하시 연합 철강 공장이 정말 한 조인 거야. 그들을 하나로 잇는 중요 인물은 방민서의 식물인간이 된 아들이지.”

장목화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공백을 뒀다. 이 대목에서는 아무리 담대한 장목화라도 조금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자는 세상에 강림한 보리가 빙의한 대상일까? 아니면 당시 그 실험이 그 사람을 보리와 접촉하고, 보리가 되게 만든 걸까? 그리고 그와 같은 실험에 참여한 강소월은 감찰자나 장생이 된 거고?”

강소월의 심령 방 번호는 5로 시작했다. 그 번호는 5월의 달지기인 감찰자나 한 해의 달지기인 장생에 대응했다.

순간 용여홍은 불안해졌다.

‘팀장님, 벼락 안 맞게 조심하셔야겠는데요.’

백새벽 또한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다가 반례를 제기했다.

“방민서는 구세계 파괴 전 한동안 아들이 주위에 나타나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이건 방민서 아들이 당시 이미 보리 영역에 해당하는 능력을 얻었고, 그 실력도 매우 강했다는 뜻이에요. 만약 그자가 달지기라면 구세계 파괴 당시 자신의 부모님과 연모 대상을 보호하지 못했을 리 없어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가 그 실험으로 보리가 된 거라면 신세계는 뭘까? 그리고 또 오레이의 말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제8 연구원의 일부 구성원이 어둠의 앞잡이가 됐다고 했었잖아.”

성건우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호방하면서도 모든 단서를 연결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에게도 이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팀원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자, 장목화가 먼저 입을 뗐다.

“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교대로 휴식하자. 내일 오전에는 다시 제2 식품회사로 돌아가 오늘 있었던 일을 확인해야 하니까.”

팀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목화가 다시 한번 더 당부했다.

“오늘 서동수 팀이 만났다는 그 고등 무심자, 조심해야 해.”

서동수는 그 고등 무심자가 특이하게도 그들의 배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외곽에서 감시를 맡은 구세군 구성원 두 명을 우회해 서동수와 여상희 근처에까지 잠입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특수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팀은 이미 전멸했을지도 몰랐다.

그 때문에 서동수는 그 고등 무심자가 자신의 의식을 숨기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리 영역의 예지 능력처럼 목표의 상태를 몰래 살피는 능력도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팀장의 당부를 들으니 용여홍은 순간 밤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산골짜기에 불어오는 바람 속에 뭔가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하듯 말했다.

“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겐도 있잖아요. 겐은 24시간 내내 감시가 가능해요. 배터리만 충분하면 되죠. 게다가 팀장님도 생물 전기 신호를 감지할 수 있고요. 그 고등 무심자라도 그것까지 숨길 순 없을 테니, 이 근처로 접근하면 팀장님한테 바로 발각될 거예요.”

“그거야 그렇지만⋯⋯.”

장목화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와 동시에 용여홍은 밤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불어오는 바람도 약간만 싸늘할 뿐이었다.

그때, 성건우가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었다.

“아까 전까지 여길 지켜보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는데 이젠 사라졌네요.”

장목화도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그러게⋯⋯.”

‘⋯⋯놀리지 마요.’

용여홍도 장목화가 이런 상황에 절대 농담할 사람이 아니란 걸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백새벽, 게네바는 모두 침묵에 잠겨 주위를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장목화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정말로 없어진 것 같아. 이제 가서 자자. 전에 정한 순서대로 불침번 서자. 겐은 수고 좀 해줘. 오늘 밤은 절약 모드로 전환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래.”

현재 겐의 배터리는 충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