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화. 교구 회의
현실로 돌아와 눈을 뜬 장목화는 어둠 속 천장을 빤히 응시했다.
귓가에 성건우의 깊은 숨소리가 들렸고, 벽 너머에는 인간 의식 두 줄기와 생체 전기 신호가 느껴졌다.
느릿하게 한숨을 토해낸 장목화는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그 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
* * *
다음 날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배터리 충전을 한 구조팀은 이 층에 나타난 방주 관리위원회 임시회장 울리히를 만났다.
“마을 경비대 대장 도제훈이 제 편에 자료를 보내왔습니다.”
울리히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히며 경계 교파의 구성원이 아닌 집사로서의 예를 갖췄다.
“구세군이 정리한 정보인가? 겨우 하룻밤 지난 건데.”
장목화가 의혹을 표했다. 서동수, 여상희와 헤어질 때 하늘이 꽤 어두웠었다. 더불어 에너지가 귀한 이 시대는 대부분 밤이 되면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밤샘 작업을 하고 싶어도 그럴 조건이 안 돼 못하는 때도 있었다.
이내 성건우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과연 구세군이네요. 한다면 한다!”
울리히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하니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그냥 손에 든 자료만 장목화에게 조용히 넘겼다.
자료를 대충 훑어본 장목화는 주요 내용이 자신들이 이미 파악한 아이언마운틴 폐허 관련 정보임을 확인했다.
이내 그녀는 자료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이 장에는 단 한 줄의 문장만 적혀 있었다.
「인수영은 제8 연구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됨.」
순간 장목화의 눈빛이 굳어졌다.
“왜 그래요?”
가장 먼저 성실한 성건우가 장목화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솔직한 게네바가 곧장 그를 저지했다.
“지금은 토론하기 좋은 때가 아니야.”
게네바는 그 붉은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방주 관리위원회 임시회장 울리히의 얼굴을 스캔했다.
그를 보고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 겐, 그렇게까지 대놓고 경계할 필요는 없잖아. 진정해.’
다행히 디마르코라는 폭군의 집사 노릇을 해왔던 만큼 울리히의 관찰력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그는 곧 침착하게 질문을 건네왔다.
“서 회장, 혹시 제가 도 대장에게 전해야 할 말이라도 있을까요? 없다면 저는 이만 관리위원회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러 가보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답했다.
“아직은 없네요.”
이후 울리히가 떠나자마자, 장목화가 자료의 마지막 장을 팀원들에게 보여주었다. 백새벽은 가장 빠르게 그 정보에 담긴 중요한 의미를 파악했다.
“제8 연구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그렇다면 인수영이 영생인 프로젝트의 주최자 중 한 명일 가능성은 크지 않은 거네요.”
그녀는 영생인 프로젝트를 담당한 것이 어느 연구원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북방에 자리한 제8 연구원은 아니리라 확신했다.
승려 교단의 유리 정토가 자리한 승려 황원은 넓은 의미로 북방에 속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유리 정토는 해당 연구원의 본부로 의심되는 곳이었다.
이내 성실하고 반박하기를 좋아하는 성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 인수영이 제8 연구원 사람이면서 영생인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면? 연구원끼리 인재를 공유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백새벽은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용여홍은 다시 또 반박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한데 엄청 낮아. 비밀 유지를 위해서라도 9대 연구원은 각자 정보를 최대한 숨기고 보호했을 거야. 오레이는 제3 연구원의 수석과학자였지만 다른 연구원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잖아.”
“되게 열심히네.”
어떤 인격으로 바뀌었는지 모를 성건우가 용여홍을 힐긋 바라보았다. 가면을 쓰지 않은 그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용여홍이 변명에 나섰다.
“난 토론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거라고!”
장목화는 목을 가다듬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저지했다.
“상반된 정보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일단은 구세군의 판단을 믿어야 할 것 같아. 그럼 인수영은 부회장, 찰리, 이 교수, 박사 중 누구일까? 아니면 인수영은 구세계가 파괴되었을 당시에 이미 목숨을 잃었을까?”
부회장, 찰리, 이 교수, 박사는 구세계부터 살아온 많지 않은 제8 연구원 구성원이었다. 이미 신세계에 진입한 그들은 평소에는 잠들어 있다가 가끔만 활동한다고 했다.
이는 구조팀이 제8 연구원 특파원 카오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성건우는 제멋대로 이들을 제8 연구원의 4대 거두라고 부르곤 했다.
성건우가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일단 이 교수는 배제할 수 있겠네요. 인수영의 성은 인이니까요.”
용여홍은 바로 반박했다.
“이 교수는 그저 별명일 뿐이니까 꼭 이 씨가 아닐 수도 있어.”
이 말을 내뱉자마자 그는 복수의 쾌감을 느꼈다.
놀랍게도 그의 말에 성건우가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고지용의 성이 꼭 고가 아니라 용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휴,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아니, 유전자 개조를 했는데도 키가 겨우 175센티미터고,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고, 성적도 겨우 중간 정도고⋯⋯.”
맥락도 없이 노선을 바꿔 자신을 놀리기 시작한 성건우를 본 용여홍의 얼굴은 곧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성건우의 말에 틀린 것도 없었다. 용여홍은 자체 회복 능력 증강, 면역력 강화, 반응 속도 가속이란 세 종류의 유전자 개조를 했어도 키는 이전과 똑같았다.
그리고 지금 용여홍은 슬프게도 반응 속도 가속이 사고의 속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건우의 조롱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백새벽이 대화를 원래 궤도로 돌려놓았다.
“넷 모두 가능성은 있어요. 그들이 본명이 아닌 별칭을 쓴 건 뭔가를 감추기 위해서였을 테니까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역시 앞으로 조사해야 할 부분이겠네.”
* * *
며칠 후, 성건우의 정신은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그리고 구조팀이 떠나기로 한 전날 밤, 에이돌른 휘하 3대 교파의 교구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장목화는 팀원들에게 경계 교회당으로 가서 그들의 회의를 참관하고, 질서 유지를 돕자는 제안을 했다.
성건우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급기야 양손, 양발을 들고 펄쩍 뛰었다.
이를 보고, 솔직한 게네바가 진지하게 충고했다.
“야, 네 병증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주의해야겠어.”
성건우 역시 솔직하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의 협상, 교대 메커니즘은 꽤 성숙해졌거든.”
* * *
지하 방주에 머물고 있던 구조팀의 다섯 구성원은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경계 교회당 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세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물론 그건 겉으로 보이는 광경에 불과했다. 각 통풍구 안이나 창문 밖의 으슥한 곳에 토론에 관심을 보이는 교회당 경비와 레드스톤 마켓 주민이 얼마나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성건우가 계산하기론 곳곳에 숨어 있는 이들의 수는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서너 배에 달할 것 같았다.
그때, 성건우가 불쑥 외쳤다.
“비엘, 다 보여!”
하지만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엘을 속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성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이어 구조팀이 벽등의 어스름한 빛으로 밝혀진 교회당 안의 빈자리에 앉자 어디에선가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변성기를 맞은 소년처럼 탁한 소리였다.
성건우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전술 배낭을 풀어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먹을래? 이런 때에 해바라기씨가 빠져서야 쓰나.”
용여홍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성건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통통한 해바라기씨가 한 줌 쥐어져 있었다.
“해바라기씨? 어, 어디서 났어?”
성건우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내가 적당한 때에 꺼내 먹으려고 사탕이랑 해바라기씨를 모아둔 거 알고 있었잖아. 휴, 사탕은 그 애들에게 다 나눠줘 버렸지만.”
그 애들은 산 요괴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용여홍은 꼭 일고여덟 살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이내 장목화는 전혀 사양치 않고 손을 뻗었다.
“나도 좀 줘.”
“어? 이러면 맞는데.”
성건우가 돌연 하이 파이브 하듯 장목화의 손바닥과 가볍게 부딪힌 뒤, 아주 적은 양의 해바라기씨를 올려주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픽 웃으며 해바라기 씨를 움켜쥐었다.
“뭐, 어렸을 때 하던 게임이야?”
용여홍은 바로 불평을 쏟아냈다.
“그냥 쟤가 하는 장난이에요. 수시로 저랑 진원이, 다른 애들을 놀렸어요. 간식을 준다면서 손 내밀게 만들어 놓고 그 손 찰싹 때리는 거.”
장목화는 애써 웃음을 꾹 참았다.
“너야 워낙 잘 속으니까.”
공연히 입을 놀렸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해진 용여홍을 보고, 장목화가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덧붙였다.
“그만큼 네가 순수하다는 거지.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거고.”
“뒷말은 어떻게 도출된 거지?”
솔직한 게네바가 물었다.
“그러게, 그러게.”
성실한 성건우가 맞장구를 쳤다.
“곧 시작한다! 다들 조용!”
장목화는 빠르게 손을 들어 곧 시작하려는 교구 회의를 가리켰다.
경계 교회당의 주교, 강건한 육체와 민머리의 성직자 안토넬라는 지위와 실력으론 이 자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진 못했지만, 주최자의 신분으로 경계 성휘 앞에 섰다.
그는 회의에 참석하려고 일부러 행차한 공포 주교 성 지그문트를 힐긋 바라본 뒤 큰 소리로 말했다.
“이번 교구 회의의 의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경계와 공포 중 어떤 것이 달지기의 첫 번째 속성인가.”
질서 유지 임무를 맡아 이 자리에 참석한 초유근은 마음 같아서는 손을 번쩍 쳐들고 ‘친절함’도 선택지 중 하나로 더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물을 흐리지 않기로 했다.
‘친절함이 우선이지, 친절함이!’
곧이어 안토넬라가 의제를 발표하자 호리호리한 체격에 요괴 가면을 쓴 성 지그문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경계죠. 우리가 위험을 마주할 때 왜 공포를 느끼겠습니까? 바로 태생적인 경계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지를 마주할 때 왜 공포를 느끼겠습니까? 그것에 잠재된 위험에 대한 경계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귀한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계심 때문이에요. 우리는 공포라는 감정을 알기 전, 갓난아기일 때부터도 여러 상황을 본능적으로 경계합니다!”
순간 공포 교단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 바들바들 떨며 반박에 나섰다.
“아닙니다. 우리는 갓난아이일 때부터도 공포라는 감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은 그것을 유전자에 기록해두고, 대를 거듭해 물려줬어요. 간단히 말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모르는 갓난아기는 아주 먼 옛날부터 살아남을 수 없었고, 그렇게 그 유전자는 자연히 맥이 끊기게 된 겁니다.”
‘이번 토론 수준은 꽤 높네.’
장목화가 흥미로운 듯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곁에선 수시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이 몰래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소리였다.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던 장목화는 살짝 인상을 쓰면서도 본인 역시 해바라기씨를 조금씩 집어 들었다.
그 이후 토론이 심화될수록 장목화는 점점 더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종국엔 해바라기씨를 들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 해바라기씨는 남몰래 성건우의 차지가 되었다.
토론에 한창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때였다.
장목화는 순간 경계 교회당 홀이 약간 어두워진 걸 느꼈다.
그녀는 쿵쿵대는 심장을 안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전방의 거대한 성휘를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하얀 문 뒤의 짙은 어둠 속, 어렴풋한 여성의 인영이 전보다 더 또렷해진 모습으로 이곳에 모인 많은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