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65화 (565/649)

565화. 강자 상봉

“좋은 아침.”

백새벽은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예의 있고 겸손하지만, 상대와 약간 거리를 두는 태도였다.

이를 보고 용여홍의 심장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가면을 쓰지 않은 초유근은 웃음을 터뜨리며 친근하게 말했다.

“너희가 지하 방주 관리위원회 명예 회장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이때 흰 가운을 걸친 친절한 손의 대주교 델로우도 가까이 다가왔다.

제일 먼저 그를 발견한 성건우가 돌연 앞으로 두 발짝 나왔다. 그리고 원숭이 가면 속에서 쏟아진 그의 눈빛이 델로우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파직!

교회당 홀 안, 벽등들이 동시에 확 밝아졌다가 빠르게 어두워졌다.

파직- 파직- 파직-

벽등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와중, 모든 이들은 전류가 흐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어둠에 숨어있던 경계 교파의 구성원들은 무의식중에 더 안으로 몸을 웅크리며 최대한의 안전을 도모했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초유근, 모지현, 소양규 일행은 심장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살짝 급변한 안색으로 두 발짝 물러났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를 보고 장목화가 성건우 곁으로 다가가 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내 델로우가 손을 펼치며 뒤돌아 구조팀에게 등을 보였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네.”

성건우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 뒤, 웃음을 그렸다.

“두 강자가 만났을 때는 이런 분위기가 형성돼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장목화는 조용히 성건우를 아래위로 흘겼다.

‘……너 스스로 연출한 상황이라는 거냐? 도대체 어떤 구세계 콘텐츠를 봤길래 이렇게 된 거냐? 계속 이딴 식으로 굴면 앞으로 하루에 구세계 콘텐츠 시청 시간 2시간으로 줄여버릴 거야. 쓸데없는 짓 다시는 못 하게!’

그때, 다시 돌아선 델로우가 온화하게 웃으며 물었다.

“내가 강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당신의 머리카락이 알려줬습니다.”

성건우 표정에 어린 진심은 가면에 막혀 드러나지 않았다.

“음?”

델로우는 의아하다는 듯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장목화는 잠시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고선, 측전방으로 한 걸음 나서며 성건우를 자신의 뒤쪽에 살짝 숨겼다.

“저들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와 당신의 나이를 통해 높은 지위와 강한 실력을 짐작했다는 뜻입니다.”

의혹을 흩어버린 델로우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친절하게 물었다.

“관찰력들이 아주 뛰어나군. 듣자 하니 자네들이 지하 방주의 전 주인 디마르코의 통치를 전복시켰다지?”

“그렇습니다.”

장목화도 솔직하게 답했다. 어차피 레드스톤 마켓 주민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굳이 숨길 필요성도 느낄 수 없었다.

델로우가 재차 물었다.

“자네들은 평소에는 이곳에 머무르지도 않고 이곳에서 대량의 자원을 구하지도 않는다던데, 왜 그런 일을 한 건가?”

오른손을 들어 왼 가슴에 얹은 성건우는 우렁차고 진지하게 답했다.

“전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순간 델로우를 비롯한 이들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몇 초 후,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초유근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 구세군 사람이야? 근데 구세군 중에서도 그런 이념을 견지하고 있는 건 노인들 말고 거의 없는데.”

“아니야.”

백새벽이 숨도 쉬지 않고 답했다. 그녀도 이젠 동료 성건우의 허튼소리를 차단하는 타이밍쯤은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곧이어 장목화는 손목을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미안한데 우리 할 일이 있어서. 얘기는 돌아와서 하는 게 어떨까?”

“좋아.”

친절한 손의 구성원들은 언제나 이름처럼 친절했다.

구조팀은 경계 교회당 밖으로 나가 어젯밤 아이언마운틴 입구에서 이쪽으로 옮겨둔 지프에 올랐다.

그들을 눈으로 배웅하던 초유근은 돌연 감정 어린 한숨을 뱉었다.

“진짜 강하네요. 정말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있었어요.”

델로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게다가 저 사람은 저 팀의 팀장인 것 같지도 않았지.”

팀장은 분명 키 큰 여자인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초유근 일행은 다시금 침묵에 빠졌다.

* * *

근 1년 만에 구조팀은 다시 레드스톤 마켓에 들어왔다.

전과 마찬가지로 또렷한 변화는 없었다. 현지 사냥꾼 길드와 방주에 속한 비자 무역 회사를 제외한 구성원 대부분은 높은 경계심을 유지한 채 안전을 위해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었다.

“이번에는 왜 비엘이 안 보일까요?”

용여홍의 중얼거림을 듣고 장목화가 웃었다.

“걔는 지난번 있었던 그 사건 이후론 우리가 자기 앞에 두 번 다신 나타나지 않길 바랄 거야.”

구조팀을 막을 수 없는 비엘에겐 먼저 알아서 피하는 길밖에 없었다.

* * *

구조팀은 곧 지하 시장 맨 아래층에 자리한 치안소에 이르렀다.

현임 마을 경비대 대장이자 치안소의 치안관 도제훈은 그의 책상 앞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익숙한 구조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명호처럼 가면을 쓰지 않음으로써 모든 주민의 믿음을 사고 있었다.

“듣자 하니 구세군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던데?”

성실한 성건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의 도제훈은 앳된 얼굴로 간결하게 대꾸했다.

“연합 공업으로부터 군용 외골격 장치를 한 무더기 구입하고 싶다더군.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갈 계획이라고도 하고.”

도제훈은 이곳에 온 손님의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현재 레드스톤 마켓에서 무기 사업을 장악한 건 레드리버인과 지하 방주이기 때문이었다.

구세군이 원하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테레사 부인이나 방주 관리위원회를 통해야 했다.

그리고 이 구조팀은 방주 관리위원회 명예 회장이었다. 거기다 당시 테레사 부인을 도와 남편의 사인을 조사하고, 때맞춰 잃어버린 무기를 찾아 그녀가 세력과 루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줬던 것도 바로 이 구조팀이었다.

또한 도제훈은 구조팀과 연합 공업의 밀수 상인이자 무기 거래를 위주로 하는 리만과의 관계도 두텁다는 걸 들은 바가 있었다.

장목화가 얼굴에 쓴 우아한 중 가면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 한 무더기? 절대 간단한 일이 절대 아닌데. 레드스톤 마켓은 연합 공업과 내내 관계가 좋았잖아. 그래도 지난 몇 년간 여기서 얻은 군용 외골격 장치는 세 대뿐인데. 지하 방주에서 수십 년에 걸쳐 모은 것들을 더한다 해도 두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야.”

짧은 시간 안에 군용 외골격 장치 한 무더기를 얻으려 한다면, 퍼스트 시티에 가서 연합 공업과 공식적인 거래를 하는 게 나았다.

“일단은 연부터 맺고 두세 대 정도를 거래하겠다는 거지. 그 이후의 일은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도제훈은 늘 그랬듯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누구도 그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레드스톤 마켓이라는 루트를 이용해 일차적으로 접근하고 어느 정도 신뢰를 쌓은 뒤 공식적인 밀수 거래를 하겠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목화가 화제를 전환했다.

“도 대장, 미안하지만 말 좀 전해줄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랑 좀 만났으면 해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는 그쪽 마음대로 정하라고 해.”

구세군에 연합 공업과 정식적인 합작 의향이 있다 해도 앞으로의 거래는 밀수의 방식으로 이뤄져야 했다.

퍼스트 시티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퍼스트 시티를 우회하려면 일단 오렌지 컴퍼니에 들렀다가 골든코스트를 거쳐야만 연합 공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에는 해운을 통해 충분히 직접 거래가 가능했다. 기껏해야 도중에 소형 세력이 빽빽하게 늘어선 골든코스트나 임해 연맹을 거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항구를 가진 대형 세력이라도 다른 공업을 재건하는 데 바쁜 데다가 자원도 부족해 배를 만들 여력이 없었다.

현재 해상에서, 그러니까 골든코스트부터 스피릿 아일랜드를 잇는 항로에서 가장 활약하고 있는 것도 만들어진 지 7, 80년 이상 된 골동품들이었고 급기야는 100년 이상 된 배들도 소수 있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도제훈이 냉정하게 반문했다.

가면 아래 가려진 장목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그냥 우리가 이번에 레드스톤 마켓에 온 건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가기 위해서란 사실만 알려주면 돼.”

지금 시대에 아이언마운틴 시티 폐허에 가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기이하고 의아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도제훈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렇게 전할게. 결과는 사람을 시켜 방주 관리위원회를 통해 알려줄게.”

빠르고 순조롭게 대화를 마친 도제훈은 일어나 치안소를 떠나는 구조팀을 배웅하다가, 평소와 달리 오늘 유난히 조용한 성건우를 힐긋 쳐다보았다.

“오늘은 전처럼 시끄럽지 않네.”

원숭이 가면을 쓴 성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전에 강자의 면모를 보여주려고 힘을 좀 과하게 썼더니 머리가 또 어지러워서.”

그는 왜 그랬는지 이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도제훈 역시 연유를 캐묻지도 않았다.

“강자의 면모?”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라면 강자로 불려도 되잖아?”

도제훈은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만약 성건우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의도적으로 실력을 뽐내는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 건립 이래, 이따금 이곳에 찾아와 일을 처리하는 공포 주교를 제외한다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도제훈은 지하 방주의 디마르코가 그 정도 수준으로 의심되는 강자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 구조팀에게 처리된 만큼 다시 확인할 길은 없었다.

장목화는 못 봐주겠다는 듯 성건우를 놀렸다.

“쯧, 지금 자랑하는 거야?”

성실한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굉장히 느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가를 치른 도제훈은 어떤 상황에도 무표정했다.

‘자랑하기 위해서 자기 실력을 드러내다니. 적에게 대비하라고 미리 친절하게 안내하는 거랑 뭐가 달라?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짓이잖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기계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더 티가 났다.

* * *

저녁 무렵, 아직 태양이 하늘 가장자리에서 구름을 불태우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레드스톤 마켓의 유일한 고층 빌딩 앞에 이른 구조팀은 구세군 출신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만났다.

구조팀은 그들 중 욕설을 줄줄이 늘어놓던 앵무새 주인 칸나처럼 친근함을 유발하는 능력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있으리라 의심했다. 산 요괴들이 저도 모르게 그들을 믿고, 또 열렬히 환영한 건 분명 그 이유때문일 터였다.

그 때문에 장목화는 용여홍, 백새벽에게 직선거리로 300미터 이상 떨어진 폐건물 꼭대기에서 이곳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언제든 저격이나 폭발로 장목화와 성건우를 깨울 수 있게 만반의 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 게네바는 6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배치됐다. 이는 상대의 실제 영향 범위가 구조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경우를 대비하는 방책이었다.

구세군 출신으로 의심되는 이들 역시 마냥 방심하지는 않은 듯했다. 장목화, 성건우가 만난 것은 단 둘뿐이었다. 아마도 나머지는 각기 다른 건물 꼭대기나 폐허 으슥한 곳에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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