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화. 성(姓)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방주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거래를 마치고 바로 돌아가. 우리를 따라올 필요는 없어.”
그녀는 지하 방주 사람들이 산 요괴들에게 적의를 품고 그들의 거점을 알아낸 뒤, 기회를 봐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진 않았다. 명예 회장들의 은혜와 압박은 아직도 그 효과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장목화는 산 요괴의 소굴 위치를 파악한 지하 방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에게 해당 정보를 흘릴까, 그것을 걱정하고만 있었다. 그 주민들과 산 요괴 사이의 원한은 아주 깊었다.
“예, 서 회장님!”
이 밀수팀을 담당하는 방주의 경비대 우두머리가 즉각 응했다. 그들 역시 본인들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산 요괴의 거점까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가고 싶진 않았다.
이때 용여홍이 한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 차는 어쩌죠?”
산 요괴 소굴은 차로 갈 수 없는 곳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당연히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으로만 닿을 수 있는 곳이어야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아쉽네. 로봇으로 변신할 수 있는 차면 우리랑 같이 갈 수 있을 텐데.”
성건우가 아쉬움을 표했다. 타르난의 오토봇이 매우 그리운 모양이었다.
사실 장목화는 용여홍, 백새벽에게 차를 지키고 있으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 사이에 자신과 성건우가 산 요괴의 소굴로 가면 구조팀은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새벽이 그러길 원치 않는 듯했다. 그 때문에 장목화도 지하 방주의 밀수팀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 돌아가진 말고, 둘만 남아서 우리 차를 좀 지켜줘.”
그들에게 주의사항을 일러둔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은 군용 외골격 장치가 든 나무 상자를 하나씩 짊어졌고, 백새벽은 인공지능 갑옷 두 벌이 든 상자를 담당했다. 전술 배낭에도 고성능 배터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윽고 산 요괴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구조팀은 점차 험해져 차로는 이동하기 힘든 산길에 접어들었다.
* * *
산 요괴들은 어느 절벽 위에서 살았다. 그곳까지의 길은 차로는 통행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일반인이 넘어가기에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파란 얼굴에 날카로운 이를 가진 산 요괴들은 각기 다른 물자가 든 상자를 짊어지고도 마치 평지처럼 날쌔게 움직였다.
구조팀도 유전자 개량, 개조를 받은 덕에 겨우 그들을 뒤따랐다.
목적지에 도착한 장목화는 주위부터 한 번 둘러보았다. 주위에 크고 작은 산 요괴가 적지 않았지만, 그 중 특별히 나이가 많은 이는 없었다.
산 요괴 대부분은 짐승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아이들만 밀수로 얻은, 몸에 대강 맞는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상자를 가지고 돌아오는 어른들을 보고, 아이들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 아빠, 삼촌, 이모가 거래할 때 덩달아 얻었다며 주머니에서 새콤달콤한 자두 사탕을 꺼내주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확성기를 꺼낸 성건우는 전에 했던 말을 살짝만 바꿔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절벽 위에 사는 산 요괴들을 설득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산 요괴 부족 중 일부에 불과해 총 2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성건우는 단 세 차례 반복 만에 모든 설득을 마쳤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는 설득 작업을 할 때도 산 요괴 집단을 엄격하게 구획했다. 일단은 각성자로 의심되는 상대와 비교적 나이가 많아 경험이 풍부한 이들부터 설득을 시작하고, 다음으론 각 방면에서 평범한 이들을,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어리둥절해하는 아이들을 설득했다.
모든 산 요괴가 구조팀을 열정적으로 맞이하자, 성건우는 그제야 한 손으로 눈꺼풀을 눌러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막은 후,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넣어 알록달록한 사탕을 잔뜩 꺼냈다.
놀란 용여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탕을 왜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녀?”
그는 성건우가 든 사탕이 회사의 제작 상품이란 걸, 공헌 점수를 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용여홍도 선볼 때나 동생들 앞에서 위신을 세우려고 그런 사탕을 사본 적이 있었다.
이내 성건우가 약간 힘없이 답했다.
“우리 중에 자라지 않는 녀석이 하나 있거든. 어렸을 적 입은 옷이랑 사탕을 엄청 좋아해.”
용여홍에게 답해준 후, 성건우는 애써 웃으며 어린 산 요괴들을 바라봤다.
“먹고 싶지? 한 사람당 하나씩 줄게. 하지만 그 전에 나한테 ‘고마워, 형’이라고 말해야 해. 다 먹고 난 뒤에는 나를 따라 춤을 춰야 하고.”
용여홍은 성건우를 보며 속으로만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 건우가 자라지 않는 그 녀석인가?’
사고 유도로 경계심이 사라진 산 요괴 아이들은 웃음 짓는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건우 곁으로 몰려들어 앳된 목소리로 재잘재잘 외쳤다.
“고마워, 형!”
“오빠, 고마워!”
목소리만은 평범한 아이들의 소리와 똑같았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목화는 백새벽, 용여홍을 불러 절벽 위의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인들의 도움 아래 그들이 모아둔 책과 잡지, 신문 등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에 말했던 그 상황은 너희 부족에만 있었던 일이야, 아니면 다른 산 요괴 부족에도 있었던 일이야?”
장목화가 신중하게 물었다.
구조팀을 이곳까지 안내한 산 요괴 대표는 고개를 긁적였다.
“우리 부족은 하나야. 다만 규모가 너무 커서 함께 모여 살면 산속의 안전한 장소는 견디지를 못해. 맑은 물도 부족하고, 오염되기도 쉽지. 그래서 성에 따라 나뉘어 살아. 너희랑 거래하는 것도 어디 우리 가문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겠어? 그래서는 그렇게나 많은 물건을 모을 수도 없는데.”
안도한 장목화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거래한 물자를 다른 집성촌에 나눠줄 때 그들이 가진 책, 잡지, 신문을 다 빌려올 수 있을까?”
산 요괴 대표는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답했다.
“그럼. 그들이 가진 것도 많지는 않을 거야. 책과 잡지 따위의 수집을 좋아하는 건 우리 집성촌밖에 없거든. 뭐 하나 알려줄까?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까지는 우리 집성촌에서 좋은 학교에 입학한 사람이 가장 많았어!”
“너희 성이 뭔데?”
백새벽이 끼어들었다.
산 요괴 대표는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성은 산양 이 씨야.”
산양은 아이언마운틴 시티 북쪽에 자리한 곳이었다. 당시 그들 중 적잖은 이는 해외로 나갔고, 더러는 분노의 호수 구역이나 지금의 레드스톤 마켓이 자리한 그 도시에서 살았다.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이 무슨 대꾸를 하기 전, 산 요괴 대표가 다시 강조하듯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산양 이 씨 사람들이야. 괴물이나 아류인이 아니라.”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에 울컥한 용여홍은 돌아서 동굴 밖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한 산 요괴 아이는 받은 사탕을 입에 쑤셔 넣고는 그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버리는 대신 잘 싸서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다.
“그건 쓸모가 없는 건데?”
용여홍이 일렀다.
그러자 아이는 크지만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이렇게나 예쁜데요!”
용여홍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과 한바탕 군무까지 춘 성건우는 적당한 곳을 찾아 덜렁 드러눕더니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 사이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은 산 요괴들이 모아준 문자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일단 목록이나 표제부터 살피면서 문제가 있을 법한 것만 골라 자세히 읽었다.
그러던 중, 백새벽은 눈에 딱 띄는 한 책의 표제를 발견했다.
《23살의 천재 과학자, 인수영》
잡지는 이미 표지와 앞쪽의 몇 페이지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너덜너덜해서 표제도 쪽 머리 부분에서나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백새벽은 바로 잡지를 장목화에게 건넸다.
“건우가 그 트라우마에서 봤다던 정기 간행물이에요.”
종이 질이 상당히 좋은 이 잡지는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색이 심하게 바래지도 않았고 촉감 역시 탄탄하고 매끄러웠다.
“인수영?”
장목화는 있는 그대로 놀라고 기뻐하며 그 잡지를 받아들었다.
빠르게 절반 정도 남은 인터뷰를 읽었지만, 천재 과학자라 불리는 젊은 여성의 인생관과 세계관, 가치관만 주로 나와 있을 뿐 현재 연구 중인 항목이나 일하고 있는 장소 같은 언급은 없었다.
인수영은 매우 일반적인 구세계 과학자 같았다. 특별히 관심을 둘 법한 부분은 없어보였다.
구세계 파괴전 각 대형 국가에는 과학 기술이 대대적으로 발전해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젊은 과학자들도 100명은 못 되더라도 50명은 반드시 넘을 텐데, 그 모두가 꼭 9대 연구원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볼 순 없었다.
정신을 다잡은 장목화는 확인 겸 인터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았다. 인터뷰는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아서 글자 수는 6천 자도 채 되지 않았다. 읽기에 부담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내용을 다시 살피는데, 장목화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인수영이 언급한 세계관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적잖은 SF 작품에 인간의 의식과 기억을 컴퓨터와 가상 네트워크에 업로드하는 내용이 나오죠. 제가 보기에 이건 일종의 예언 같아요.
미래의 인류는 어쩌면 의식 생명의 형식으로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백업만 해둔다면 죽음을 맞아도 끝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상응하는 철학을 구상해 내가 왜 나인가의 문제를 해결해야겠죠. 처음부터 본체와 백업 사이의 윤리적인 모순을 통제해야 할 겁니다.」
미래를 상상하는 인수영의 이 이야기에, 장목화는 번뜩 한 생각이 났다.
영생인 프로젝트!
‘설마 인수영이 영생인 프로젝트의 주최자 중 하나였을까? 어느 연구원의 주요 과학자였던 걸까?’
장목화는 쿵쿵대는 심장을 안고 인터뷰를 마저 다 살핀 뒤에야 그 내용을 백새벽, 용여홍에게도 보여주었다.
기계 승려와 영생인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용여홍은 장목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입가로 안타깝다는 듯 한숨이 흘러나왔다.
“잡지가 좀 멀쩡한 상태였다면 좋았을 텐데. 인물 소개도 없으니, 이거 참. 앞부분이 남아있었다면 인수영이 어디 사람인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그 후로 어떤 기구에서 일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요.”
용여홍이 언급한 정보는 사실 쓸모 없다면 쓸모없지만, 쓸모 있다면 등골을 오싹하게 할 정도로 중요한 비밀과 연루돼 있을지도 몰랐다.
예컨대 인수영이 만약 아이언마운틴 시티 현지인이라면, 그리고 그녀의 직계 가족이 제2 식품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그녀가 일찍이 빙원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에 다녔었다면?
영생인 프로젝트의 주최자로 의심되는 그녀가 만약 불가의 성지와 연관되어 있다면,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었다.
현재 대부분의 영생인은 불가에 귀의해 보리나 장생을 믿으며 당시의 연구기지를 유리 정토로 부르고 있었다.
“일단 인수영이 식물인간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겠네요.”
언제 깨어난 건지, 어느새 성건우가 가까이 다가와 이야기했다.
그의 답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이 정기 간행물의 발행일은 구세계 파괴로부터 딱 일주일 전이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답했다.
“응, 인수영이랑 철강공장의 방민서, 이진용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여. 승려 교단의 유리 정토 안에 관련 단서가 있을지 궁금하네.”
성건우는 순간 흥분한 듯 말을 받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승려 교단에 가입해서 유리 정토에 들어가 볼게요.”
제도 선사의 이름을 헛되지 않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누던 구조팀은 다른 책과 잡지, 신문을 계속 살폈다.
선별 작업은 저녁 무렵에야 끝났지만 더 이상의 단서는 없었다.
절벽을 떠나려던 그때, 성건우는 잊지 않고 이전의 사고 유도 효과를 거뒀다. 혹시라도 손님을 열렬히 환영하게 된 산 요괴들이 나쁜 마음을 먹은 자들까지 끌어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구조팀도 이런 공간과 환경에서는 과하다 싶은 경계심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