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62화 (562/649)

562화. 또 다른 사람들

경계 성휘 아래, 친절한 손의 대주교는 초유근과 소양규, 모지현 등을 이끌고 현지 주교 안토넬라를 만났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민머리인 그는 검은 망토를 두른 채 간소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척 보기만 해도 상당히 강건해 보이는 그 성직자는 두 팔을 들어 가슴팍 앞에 교차시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경계는 신의 힌트. 델로우 대주교, 자네들 방은 이미 마련해뒀네.”

머리숱이 적은 델로우 대주교는 원래 친절한 손의 가장 정식적이고 경건한 예절인 포옹으로 인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경계심을 드러낸 안토넬라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상대에게 등을 보였다.

곧이어 델로우가 레드리버어로 인사를 건넸다.

“친절하게 대하라. 서로를 믿으라.”

양대 교파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이 차이는 경계 교파와 공포 교단 사이의 교리상 해석 차이와도 완전히 달랐다. 친절한 손은 나머지 두 조직과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친절한 손이 믿는 것 역시 10월의 달지기 에이돌른이라는 것뿐이었다.

경계 교파와 공포 교단이 같은 뿌리에서 난 형제라면 친절한 손은 밖에서 주워온 자식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말 사실이기도 했다.

혼란의 시대, 친절한 손은 한데 뭉쳐 무심자와 각종 변이 생물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람들로부터 기원했다.

이들은 협조와 단결에 의지해, 힘겹게나마 피로 범벅된 한 줄기 길을 내고 각기 다른 거점을 개척하면서 에이돌른에 대한 신앙을 전파했다.

친절한 손의 이념은 구세군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그 둘 역시 오랜 기간 긴밀하게 합작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친절한 손이 경계 교파와 공포 교단의 교구 회의에 고정적으로 사람을 보내기 시작한 건 에이돌른의 신탁이 내려진 신력 10년부터의 일이었다.

이들의 존재로 인해 경계 교파와 공포 교단도 그전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된 갈등과 싸움을 멈추게 되었다.

초유근이 노상에서 자조하듯 하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신도들이 교리상의 해석 차이로 불필요한 싸움을 하는 걸 원치 않았던 달지기가 일부러 친절한 손을 그들에게로 보낸 것만 같았다.

일행들이 분분히 등을 돌리며 경계 교파 주교 안토넬라를 향해 예를 갖추자 친절한 손의 대주교 델로우는 그제야 온화한 태도로 편안하게 말했다.

“난 일찍이 레드스톤 마켓에 와서 지하 방주의 그 사람과 만난 적이 있네. 오랜 친구인 셈이지.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한 번 만나볼 수 있겠나?”

간소한 흰색 가면을 쓴 안토넬라는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디마르코는 이미 죽었네. 지하 방주의 주인은 바뀌었어.”

델로우는 처음 듣는다는 듯 물었다.

“자네들이 한 짓인가?”

안토넬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외부인 다섯이 한 짓이야.”

델로우는 더더욱 놀랐다.

“그자들도 달지기의 신도인가?”

안토넬라가 재차 고개를 저었다.

“그자들이 무얼 믿는지는 확신할 수 없군. 하지만 그자들이 달지기의 신도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평소에도 레드스톤 마켓에 머무르지 않고 가끔만 오고. 자네들도 조금 전 그들을 봤을 거야. 자네들이 교회당에 들어왔을 때 마침 홀을 나가 지하로 돌아가고 있었거든.”

순간 옆에서 진지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초유근은 안토넬라가 말하는 외부인이 백새벽 일행, 바로 구조팀임을 깨달았다.

‘그 사람들이? 델로우 대주교님이 생각하기에 그보다 강한 각성자를 처치했다고? 백새벽이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지? 동료들도 대형 세력 출신인 것처럼은 보였지만 그렇게까지 강해 보이진 않았잖아. 너무 어렸다고.’

하나하나 빠르게 떠오르는 생각 속, 초유근은 본능적인 의심을 품었다.

“주교님, 지하 방주의 원래 주인을 죽인 게 다섯 명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가 방금 본 사람들은 네 명뿐이었는데요.”

안토넬라는 솔직하게 답했다.

“지능 로봇이 하나 더 있었지. 이번에는 오지 않았고.”

‘백새벽의 그 지능 로봇인가?’

초유근은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겨우 몇 년이 지난 건데 백새벽이 내가 우러러볼 정도의 수준에 이르고, 실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팀에 들어갔다고? 나도 지난 몇 년간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게 아닌데. 그때 비하면 천지 차이로 달라졌는데.’

잠시 고민하던 델로우가 질문했다.

“주력은 그 지능 로봇이었나?”

‘맞아, 그래. 지능 로봇은 특정 영역의 각성자한테는 천적과도 같잖아. 설령 상대가 이미 심령의 복도에 진입했다 해도⋯⋯.’

이 사실을 떠올리며 초유근은 무의식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안토넬라가 덤덤하게 답했다.

“난 잘 모르겠군.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거든. 현장을 포착한 감시카메라 영상도 없고.”

친절한 손의 대주교 델로우는 그의 반응에 더더욱 의혹이 샘솟았다.

“그 사람들은 외부인인데다가 달지기를 믿지도 않는데, 자네들은 그들이 교회당 지하에 난입해 방주의 주인을 죽이는 것을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방주의 주인은 달지기의 신도였네.”

친절을 내세우는 자신들의 교파라도 문을 활짝 열고 강도를 환영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안토넬라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낮아졌다.

“달지기께서 묵인하신 일이야.”

화들짝 놀란 델로우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달지기께서 방주의 주인을 죽이는 것을 묵인하셨다고? 그럼 당시 자네들은 왜 동참하지 않았지? 자네 교파의 실력이면 그런 일 정도는 손쉽게 마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공포 주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새도 없었나?”

안토넬라는 어떠한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전처럼 양손을 들어 올리며 예를 취할 뿐이었다.

“경계는 신의 힌트.”

* * *

오후가 됐을 무렵, 구조팀은 또 다른 밀수팀을 따라 아이언마운틴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오전에는 방주 안에 남아있는 다른 책들을 한 차례 선별했지만 그렇다 할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또 짬을 내어 경계 교회당에도 한 번 들러 경고자 송하균과 주교 안토넬라를 만나 그들에게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대한 자료를 얻기도 했다.

지하 방주 관리위원회와 산 요괴의 약속 장소는 어느 산길 모퉁이였다.

한쪽은 절벽이고, 다른 한쪽은 낭떠러지라 매우 험준한 지형이었다.

이제 보니 산 요괴들이 이곳을 택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밀수업자들이 적의를 보인다 치면, 절벽 위에 숨어있던 동료들이 바로 큰 바위를 굴려 떨어뜨리고, 그 사이 본인들은 천부적인 능력을 토대로 낭떠러지를 기어 내려가 빽빽한 숲으로 사라지면 되었다.

구조팀 네 사람은 속속들이 지프에서 내려 차 옆에서 기다렸다.

대략 10분 정도 지나자, 짙은 파란색 피부에 뾰족하고 날카로운 이 때문에 매우 험악한 인상의 산 요괴들이 절벽 위에서 덩굴을 타고 내려왔다.

어인들과 마찬가지로 경계심이 상당한 이들은 주위를 슥 둘러보자마자 낯선 이들 네 명을 발견했다.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 벌써 파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확성기를 든 성건우가 힘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긴장할 것 없어. 너희는 사람이고 우리도 사람이야. 너희는 자원을 거래하러 왔고, 우리도 자원을 거래하러 왔지. 그러니까⋯⋯.”

그는 정신력을 아끼고자 익숙한 추리 광대 능력을 사용했다.

순간 설득된 산 요괴들은 자발적으로 대표 하나를 보냈다.

“거래하려는 자원이 뭐지?”

그가 사용한 언어는 사투리 억양이 묻어 있는 애쉬랜드어였다.

그 말에 장목화가 앞으로 두 걸음 나섰다.

“밀가루 세 상자랑 아이언마운틴 시티 폐허 관련 정보를 거래하려고.”

밀가루 세 상자는 그들의 잉여 무기로 지하 방주와 교환한 물건이었다.

산 요괴 대표는 몇 초간 멍한 표정을 드러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뭘 알고 싶은데?”

장목화는 일단 가장 간단하게 물었다.

“너희 부족 중 혼란의 시대에 아이언마운틴 시티 깊은 곳에 들어가 본 일원이 있나?”

산 요괴 대표가 꽤 능숙하게 답했다.

“처음에는 없었어. 거긴 아주 위험하거든. 우리 조상들은 그곳의 무심자들이 대부분 제거된 후에야 식량을 찾으러 가봤었지.”

장목화는 곧장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곳에서 어떤 기이한 일을 겪거나 하지는 않았대? 뭔가 유용한 물건이나 정보를 얻었다던가?”

산 요괴 대표는 딸랑이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여태껏 우리가 찾은 건 식량과 옷, 이불 위주였어. 가끔 찾아낸 다른 물건은 거래하려고 산에 찾아온 이들한테 팔아버렸고. 음, 당시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무시무시한 능력이 있는, 강력한 무심자가 적지 않았대. 그래서 조상들은 그들을 우회해 다녔는데, 그런 곳에선 기이한 일 같은 건 없었다나 봐.”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신문이나 잡지, 책 같은 건 안 가져왔고?”

일반적으로 구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를 만나지 않는 이상 그런 물건을 팔기란 매우 어려웠다.

산 요괴 대표의 짙은 파란색 얼굴에 약간 이상하다는 표정이 어렸다.

“있기야 있지만 불을 피우는 땔감으로 쓰거나, 벽에 바르거나, 침대로 쓰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썼어. 근데 이틀 전에도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하던데. 직접 와서 보기도 했는데 가져간 책은 없었어.”

“어떤 사람이?”

순간 장목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가 그런 질문을 했다고? 그것도 이틀 전에?’

그리고 성건우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통한이 어린 목소리로 질책했다.

“너, 너희들,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낯선 사람을 사는 곳에까지 들이면 어떡해!”

산 요괴들은 동시에 침묵에 빠졌다. 이제야 그것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한 차례 대화를 마친 끝에, 구조팀은 이틀 전 산 요괴 부족을 찾은 것이 전에 만난 구세군으로 의심되는 이들임을 확인했다.

게다가 그들은 모종의 능력을 사용해 산 요괴들의 경계심을 지우고, 손님으로서 융숭한 환대까지 받은 듯했다.

장목화는 빠르게 이 사실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했다.

‘산 요괴 중에도 각성자는 있지만 그 수는 적어. 부족 전체에 단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여태까지도 그 영향을 지속시켰다면 상대는 심령의 복도 급, 혹은 그 이상의 각성자겠지.

그 사람들이 산 요괴 부족에게 어떠한 책도, 잡지도, 신문도 가져가지 않은 건 그중 가치 있는 단서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거야.

근데 꼭 그러리라 확신할 순 없지. 그들이 우리가 파악한 단서를 모르고 있거나, 우리와는 다른 단서를 파악하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고 가치 없는 기록도, 우리한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어.’

구세군으로 의심되는 그 사람들은 구조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고,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는 것이 많다면 구조팀에게는 유용한 단서라도 그들에게는 평범한 단서라 산 요괴 부족에 그대로 남겨둔 것일 테고, 파악한 정보가 구조팀보다 빈약하다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도 실제론 어마어마한 비밀이 담겨 있는 단서의 진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일 터였다.

둘 다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구조팀은 반드시 산 요괴가 가진 자료들을 다시 살피며, 가치 있는 단서가 남아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며 눈짓과 손짓을 했다.

‘가! 얼른 가서 친구가 돼!’

아직도 기력을 찾지 못한 탓에 지쳐 보이는 성건우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재차 확성기를 들었다.

“어때, 좀 이상하지 않아? 우리한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를 너희가 사는 곳으로 데려가 손님 대접이라도 해줘야지.

속담에 이런 말도 있잖아. 집에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밖에서는 친구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앞으로 거래할 수 있는 식량과 옷감이 늘어나는 거야⋯⋯.”

이 유도에 전방의 산 요괴들과 절벽 위에 숨어 있던 산 요괴들은 전부 설득되었다. 결국 그들은 오늘 당장 구조팀을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지하 방주의 밀수 팀은 그 모습을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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