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61화 (561/649)

561화. 친절한 손

용여홍과 백새벽이 답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제도 선사 성건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왼손을 세우고 낮은 소리로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저희는 보통 이것을 숙혜(宿慧)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몬티스는 전생, 혹은 전전생에 불교도였는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바다에 빠져 한 차례, 한 차례 윤회를 거듭하다가 각성한 순간에야 전생을 천천히 떠올린 거지요.”

장목화는 성건우의 말이 모두 엉터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네가 말한 그런 상황을 배제할 순 없는데, 그럴 가능성은 낮아. 지금까지 그럴 가능성을 보여준 건 숙명통 밖에 없잖아. 숙명통에 자기 기억을 일깨우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리 영역에 숙명통과 비슷하지만 디테일은 다른 능력이 또 있는 게 아닌 이상에는⋯⋯.”

장목화는 이 말을 계속 잇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지금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야. 첫째, 남은 책을 모조리 뒤져보기. 이건 내일 오전으로 미뤄도 되고. 둘째, 아이언마운틴 시티로 들어가 그곳에 또 어떤 단서가 남아있는지 살펴보기.

내일 시간이 나면 경계 교회당 주교랑 현지 사냥꾼 길드로 찾아가서 혹시 아이언마운틴 시티에서 얻은 정보가 더 있는지 알아보자. 이런 방면은 준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좋으니까. 좋아, 이제 자자. 우리도 좀 충전해야지.”

* * *

다음 날 오전, 개량한 자동차 두 대가 레드스톤 마켓에 들어섰다.

“왜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이지?”

차창 밖으로 고개가 쏙 튀어나왔다. 백새벽의 전 동료 초유근이었다.

초유근은 주위의 무너지고 버려진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꼭 약하지 않은 실력을 갖춘 암거래 중심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폐허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생기를 풍기는 건 봄을 맞아 새롭게 피어나고 있는 식물들뿐이었다.

“경계 교파의 특징이야.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의 신앙은 이미 그들 생활에까지 녹아들었나 보네.”

꽃무늬 셔츠를 입은 청년 소양규 옆, 한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노인 역시 애쉬랜드인으로, 머리는 두피가 보일 정도로 성겼지만 주름이 많진 않았다.

무엇보다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그는 매우 자상해 보였다.

“대주교님, 주교님 말씀은⋯⋯.”

초유근은 겸손하되 마냥 낮지만은 않은 자세로 물었다.

그 또한 에이돌른을 믿었지만, 경계 교파와 공포 교단을 그리 잘 알진 못했다. 최근 남쪽으로 와서 전도하며 친근함과 믿음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뜬금없는 교구 회의에 참석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말을 맺기도 전, 뭔가를 느낀 건지 초유근이 고개를 홱 틀며 나름 온전한 편인 고층 빌딩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누군가가 있네.”

그는 꼭 산책을 나왔다가 친절한 이웃 주민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움보다 기쁨이 더 커 보였다.

대주교라 불린 노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초유근의 말에 긍정했다.

“제가 가서 인사를 하고 길을 물어보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차 문을 열고 내린 초유근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스모키 화장을 한 여자 모지현은 초유근이 그쪽에 누군가가 있다고 말하자마자 이미 차를 길가에 세운 상태였다.

초유근은 고층 빌딩 쪽으로 다가가 대문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며 오른손을 휘휘 흔들었다.

“헤이! 건물 안에 있는 친구, 우리는⋯⋯.”

바로 그때였다. 그를 향해 시커먼 수류탄 하나가 날아왔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초유근은 풍부한 경험에 기대 옆으로 냅다 몸을 날린 후, 계단으로부터 떨어진 엄폐물 뒤에 웅크렸다.

콰릉!

요란한 폭발음 속, 초유근은 몸을 바싹 붙이고 있는 이 계단 벽체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초유근은 빌딩 안에 있던 상대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자신의 감지 범위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우린 아무 악의도 없어! 이봐, 우린 그냥 친구가 되려고 온 거야!”

초유근은 몇 번이고 더 크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초유근은 다시 돌아와 개량한 차 옆에 섰다.

“대주교님, 왜 저 사람을 막지 않으셨습니까? 저 사람은 아직 대주교님의 감지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요.”

대주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건 예의가 아니지. 우린 일할 때 우리의 친근함부터 내보여야 해. 믿음이란 감정은 호환적인 거거든. 달지기께선 서로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어.”

그와 초유근의 대화에서는 특별히 강한 상하 관계가 느껴지진 않았다.

초유근은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와 의심은 신세계가 아니죠. 그럼 계속 앞으로 이동하며 다른 주민을 찾아 길을 물어야겠군요. 우리의 진심으로 과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려야죠.”

친절한 손에 가입한 이래, 그도 이미 호의를 악의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익숙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애쉬랜드에서는 그들처럼 마냥 친절한 태도로 모든 상황을 대하는 것이 비정상이었다.

대주교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차 문을 열고 보조석에 앉은 초유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차라리 아예 호수를 우회해 레드스톤 마켓에서 개간한 논밭을 찾는 게 어때? 지금은 파종하고 경작할 시기니까 그곳이라면 반드시 사람이 있을 거야. 숨기도 어려울 거고.”

모지현과 소양규도 그 제안에 동의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개량 자동차 두 대는 레드스톤 마켓 서북쪽에 자리한 호수 근처 구역을 우회한 뒤, 개간된 대량의 논밭을 발견했다.

논밭에는 바쁘게 일하는 중인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초유근 일행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곳에 모여들었다. 더러는 간이 바리케이드 뒤에 숨었고, 더러는 밖에 서서 억지로 상황의 변화를 관찰하며 교류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를 본 초유근은 너무 감동해서 하마터면 눈가를 훔쳐낼 뻔했다.

‘그래, 이거야말로 정상적인 경계심이지! 조금 전 폐허 도시에서 본 사람은 그야말로 정신병 수준으로 극단적이었다고! 음,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저렇게 전부 다 가면을 쓸 필요까지 있냐는 거지만.’

초유근은 얼른 손을 뻗어 휘휘 흔들며 자신의 의도를 밝혔다.

“길 좀 묻을게!”

전의 경험을 교훈 삼은 그는, 말이 상당히 짧고 빨랐다. 거기다 애쉬랜드어와 레드리버어를 둘 다 사용하기도 했다.

모여있는 농부 중 남색 연극용 가면을 쓴 남자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왔다. 남자는 레드리버어를 썼다.

“어디로 가는데?”

“경계 교회당!”

초유근이 큰 소리로 답했다.

남자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낯선 사람이 경계 교회당을 찾는 게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동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폐허에 진입할 즈음 바로 교회당이 보여. 어쩌다 길을 잘못 들었다 싶으면 주위 논밭을 찾아. 경작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될 거야.”

초유근은 두 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입가에 댔다.

“고마워! 근데 지금 레드스톤 마켓 내의 세력은 몇 개나 돼?”

“애쉬랜더, 레드리버인, 그리고 우리 지하 방주 사람들로 나뉘어 있는데, 다들 에이돌른을 믿고 교회당 명령을 따라.”

초유근은 뿌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내 몸을 홱 튼 그는 지하 방주 사람들을 등진 채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칭찬을 했다.

“개인은 약해도 집단은 강하지.”

이것은 친절한 손의 예였다. 이들은 상대에 대한 믿음을 표하기 위해 그에게 등까지 기꺼이 내어주었다.

그 후로 초유근은 지하 방주는 또 무엇인지까지 물은 뒤에야 작별을 고하고 차로 돌아왔다.

뒷좌석에 앉은 대주교는 밖을 보던 시선을 거둔 뒤 감정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하 방주 안의 그는 만만한 자가 아니야.”

꽃무늬 셔츠를 입은 청년 소양규가 웃으며 물었다.

“대주교님만큼 대단합니까?”

대주교는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다만 그의 상태는 썩 좋지 않군.”

운전하던 모지현은 지하 방주 주인이 그리 강할 줄 몰랐다는 듯 물었다.

“그 사람도 경계 교파의 사람일까요? 공포 주교?”

대주교가 간단히 답했다.

“아니, 그는 달지기의 평범한 신도일 뿐이야.”

이 말을 듣고, 초유근이 고개를 틀었다.

“대주교님, 지하 방주에 대해 아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대주교가 온화하게 웃었다.

“젊었을 당시 신의 손으로부터 방주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달려와 그곳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거든.”

초유근이 놀란 듯 대꾸했다.

“그럼 경계 교회당이 어디인지도 아셨을 텐데⋯⋯.”

‘그럼 일부러 사람을 찾아 길을 물을 필요도 없었잖습니까!’

대주교가 웃었다.

“벌써 사오십 년도 더 지난 일이야. 이렇게나 나이가 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 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겠나?”

* * *

경계 교회당 쪽으로 한참을 달린 끝에, 초유근 일행은 교외의 황량한 땅을 일궈 만든 밭과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인 사람들을 상당수 발견했다.

이를 보고 대주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초유근에게 분부했다.

“저들에게 지하 방주의 상황을 좀 더 상세히 물어봐. 휴, 그 오랜 친구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군.”

곧장 응한 초유근은 차가 멈추자마자 문을 열고 내린 뒤 근처에서 악마 가면을 쓴 한 소녀를 찾았다.

상대가 경계 교파의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해, 초유근은 의도적으로 충분한 거리를 유지한 뒤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하 방주 사람이니?”

“네.”

소녀가 평범한 음량으로 답해서, 초유근도 겨우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

뒤이어 그는 애쉬랜드어로 답한 소녀에게 모국어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현재 방주 주인은 누구니?”

소녀는 의아하다는 듯 그의 질문을 곱씹었다.

“주인? 주인은 없어요. 지금은 관리위원회가 관리를 맡고 있어요.”

순간 초유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뻔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갔고, 이에 놀란 소녀는 뒤로 허겁지겁 물러났다. 주위의 농부들까지 황급히 곳곳에서 총을 챙겨 든 뒤 이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초유근은 자신의 이미지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두 손을 쳐들었다.

“방주의 원래 주인은? 자식 없이 죽어버렸나?”

“그 자리에서 밀려난 뒤 다섯 회장의 손에 죽었어요.”

소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던 초유근은 계속해서 질문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고서 차로 돌아왔다.

초유근은 바로 동료들에게 조금 전 파악한 상황을 전달했다.

“방주의 주인이 살해당했다니⋯⋯.”

대주교도 놀란 듯했다.

방주 주인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잘 모르는 소양규만 코웃음을 쳤다.

“경계 교회당에서는 다섯 사람이 자신의 신도를 처리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나 보죠?”

이미 감정을 추스른 대주교가 입을 열었다.

“음, 보아하니 복잡한 상황이었던 것 같군. 경계 교회당에 가서 자세히 물어보자고.”

* * *

계속 달린 끝에, 초유근 일행은 곧 경계 교회당에 도착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은 눈동자들의 주시를 받으며 붉은색과 금색으로 칠해진 홀 안으로 들어섰다.

“색이 좀⋯⋯.”

에이돌른의 신도인 소양규는 같은 교파의 심미안에 대해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때였다. 초유근의 시야에 낯익은 인물들이 잡혔다.

막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네 사람은 아래로 내려갔다.

“백새벽 일행 아냐?”

그쪽을 한동안 응시하던 초유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그들이 다시 홀로 돌아오면 그때나 제대로 인사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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