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새로운 가설
그때였다. 맨 앞에 서 있던 어인이 갑자기 앞으로 돌아오더니 성건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다른 어인들은 무슨 말을 하는 대신 행동으로 우두머리를 지지했다.
보드를 비롯한 이들이 의아해하는 와중,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번에 여기 온 건 물자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야.”
어인 우두머리가 의혹을 표했다.
“어떤 정보?”
장목화는 다시 정색하고 물었다.
“너희 부족 중 처음으로 호수 중앙 섬에 올랐던 이들 말이야. 그때 신사를 얼마나, 어디에서 기다렸지?”
우두머리 어인은 툭 튀어나온 눈이 더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그는 좀 많이 놀란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왜 묻는 거냐?”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안고, 장목화는 질문을 다시 바꿨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됐지?”
몇 초간 침묵에 빠져 있던 우두머리 어인은 잔뜩 겁먹은 투로 답했다.
“그들은, 그들은 모두 무심병에 걸렸다.”
* * *
섬에서 분노의 호수 가장자리로 돌아간 뒤, 지하 방주의 아이언마운틴 입구에 이르는 동안 구조팀원들은 내내 침묵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 어인과 나누었던 대화만 맴돌고 있었다.
“너희 부족 중 처음으로 호수 중앙 섬에 올랐던 이들 말이야. 그때 신사를 얼마나, 어디에서 기다렸지?”
“그걸 왜 묻는 거냐?”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됐지?”
“그들은, 그들은 모두 무심병에 걸렸다.”
“전부?”
“전부.”
* * *
지하 2층, 접견실에 들어온 후에야 이 말 못 할 묘한 침묵이 깨졌다.
가장 먼저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넌 원래 제일 안 놀라는 사람이잖아.”
성건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지금은 오후잖아요, 또 능력을 썼다가는 힘이 바닥나고 말아요.”
그의 손상된 정신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용여홍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염호의 신전 내에서 15분 이상, 신전 부근 구역에서 30분 이상, 신전이 자리한 섬에서 사흘 이상 머무르면 반드시 무심병에 걸리게 되는 걸까요?”
장목화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것 같아. 회사에서 사람의 목숨을 토대로 그런 경험을 얻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의 원인은 뭘까요?”
백새벽은 반고 바이오가 어떻게 그 주의사항을 파악해 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관심은 오직 섬에 잠든 염호와 무심병 사이의 연계에만 쏠려 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와중 이미 여러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부정하길 반복했던 장목화는 그중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꺼냈다.
“염호는 사실 신세계에 갇혀 있는 거고, 그의 육신은 신세계와 현실의 교차점인 거 아닐까? 이런 교차점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그 내부와 외부의 뭔가가 어느 정도 교류할 수 있는 거야. 신세계의 기운과 물질, 그리고⋯⋯. 바이러스 같은 것들이.”
용여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신세계로부터 기인하는 무심병의 바이러스가 그런 교차점을 통해 애쉬랜드로 전파되면서 주위 인류를 감염시킨다는 건가요? 당시 염호가 잠든 이후 호수 중앙 섬에 있던 마을이 무심병에 금세 함락된 것처럼요?”
“아직은 가설일뿐이야. 확신하려면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고.”
장목화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답했다. 무심병의 근원을 조사해 밝혀내는 것은 그녀가 줄곧 꿈꿔왔던 이상이었다.
짧은 한숨을 토해낸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신세계 내의 무심병 바이러스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 심지어는 꼭 바이러스가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애쉬랜드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인 거야.”
동시에 장목화는 전에 본 책들을 떠올렸다. 책에선 세상과 격리돼 있던 특정 지역에 이른 사람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그들에게는 무해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그 토착민들에게는 대규모 사망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했다.
용여홍은 상상 속 성지가 오염되는 듯한 느낌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신세계는 좋은 곳이라고들 하잖아요. 무심병도 없고, 기아도 없고, 추위도 없고, 괴물도 없고, 변이도 없는⋯⋯.”
“인류도 없을 수 있지.”
옆에서 기력도 없고 정신력도 약한 성건우가 대꾸했다.
그 말에 용여홍의 솜털이 쭈뼛 섰다.
백새벽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세계가 꼭 좋은 곳이라는 법은 없지. 오레이도 그랬잖아. 차라리 이곳에서 죽을지언정 신세계에는 가지 않겠다고.”
장목화는 기억을 한번 더듬어보았다.
“그래, 우리는 회사에서 무심병이 폭발했던 시기와 퍼스트 시티에서 동란이 일어났던 시기가 일치했던 걸 발견하고 이런 추측을 했었잖아.
퍼스트 시티의 동란이 달지기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의 직접적인 개입까지 유도했고, 그들 사이의 충돌로 고차원적인 파동이 일어나 애쉬랜드의 적잖은 지역에 소규모의 무심병 폭발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고. 이제 보니 그 추측은 약간 수정이 필요할 것 같아.”
손을 들고 답을 뺏으려 했던 성건우는 허약한 모습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아, 됐어요. 생각할 힘도 없네요.”
장목화는 그를 살짝 흘기다, 잠시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퍼스트 시티에 동란이 일어났을 때 각 대형 세력 내 정신은 신세계에 진입했지만 육체는 애쉬랜드에 남아있는 강자들이 많건 적건 어느 정도 돌아온 거야. 거기다 달지기들의 주시와 관여까지 더해지면서 그날 오전에 신세계와 애쉬랜드 사이에는 여러 개의 루트가 생겨났고 이로 인해 무심병이 외부로 더 유출된 거지.”
힘의 충돌과 그로 인한 파동보단 이쪽이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용여홍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염호가 잠든 신전과 그 주위에 오래 머물러 있기만 해도 무심병에 걸리는 거라면 수정의식교 시카라 사원은 물론 그 근처의 몇몇 거리, 퍼스트 시티 골든애플 구역과 온 도시에도 인류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곳도 일찍이 무심자에 의해 정복됐을 테니까요.”
용여홍이 보기에 부처의 응신과 잠든 염호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처럼 정신은 신세계에 진입했고, 육체만 애쉬랜드에 남아 어느 정도 활동성을 보이는 강자는 퍼스트 시티에 더 많을 것이었다. 염호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이라면 그들 역시도 똑같이 미칠 수 있어야 했다.
장목화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가끔 퍼스트 시티에 발생하는 무심병 발병은 어떻게 설명할래?”
순간 용여홍은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장목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재수 없는 염호에 비하면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어. 언제 돌아올지, 언제 잠들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 구역에 대한 어느 정도 장악력도 유지하고 있지. 그러니 무심병의 유출과 전파를 최대한 억누를 수 있는 거야.
게다가 난 그들이 의식적으로 힘을 분배해서 누구를 보호할지, 혹은 누구를 보호하지 말지를 결정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회사의 일반 직원들은 매해 한두 번, 혹은 그보다 더 많이 무심병의 위협을 경험하는 데 반해 관리층 사람 중 무심병에 걸린 사람이 그렇게나 적은 건 그 이유 아닐까?
이에 대한 검증은 퍼스트 시티로 돌아간 후에나 가능할 거야. 귀족 집단과 관료, 군대, 일반 시민들의 무심병 발병률을 한번 비교해보자.”
그때, 특정 사건을 떠올린 백새벽이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듯 동조했다.
“어쩐지 집사가 무심병에 걸렸는데도 오레이가 슬퍼하지도, 당황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분노하고 의아해하기만 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였네요. 집사를 보호해 주리라 믿었던 누군가가 그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에 분노와 의혹을 느꼈던 거예요.”
용여홍은 또 하나의 단서가 이 가설에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짝!
성건우는 오른 주먹으로 왼손을 치며 억지로나마 매우 대견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그려냈다.
“그럼 우리는 그때 정말로 수종이를 괜히 의심했던 거네!”
구조팀은 퍼스트 시티 그린올리브 구역에서의 무심병 폭발 사건과 수종이의 관계를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장목화가 소리 내 웃었다.
“이두형 선생님이 오하명과 수종이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잊지 마. 이 세상의 독창인 그들과 신세계 사이의 연계는 절대 잠들어 있는 거물들보다 약하지 않을 거야.”
접견실 안에는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잠시 후, 백새벽이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염호가 정신은 신세계에 진입했고 육체는 애쉬랜드에 남아있는 각성자일 가능성이 크다면 왜 살려달라고 외쳤을까요? 게다가 염호는 다른 신세계 강자와는 다르게 가끔 돌아오지도 못해요.”
장목화는 이에 대해 미리 생각했던 듯 웃으며 말했다.
“스스로를 염라라고 부른 염호는 생전에 신을 자칭했어. 그러니 어떤 달지기도 믿지 않았을 거야. 그 상태로 신세계에 이르렀는데 누가 거둬주고 누가 보호해주겠어. 그러다가 어떤 문제에 봉착한 거지.
내 생각에 염호는 어느 달지기한테 진압돼있는 것 같아. 디마르코가 에이돌른에 의해 방주에 봉인돼 있었던 것처럼⋯⋯.”
장목화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이곳은 일찍이 에이돌른이 수시로 주시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목화는 의도적으로 화제를 바꿔 성건우를 놀렸다.
“너처럼 달지기 상징 모음집을 가지고 신세계에 진입하면 염호보다 더 비참한 신세가 될걸.”
성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들이라면 제 좋은 의도를 이해해줄 거예요.”
“무슨 좋은 의도?”
용여홍은 성건우가 진지한 답을 하진 않을 거라 여기고 가볍게 물었다.
성건우는 곧 손을 펼쳐 보였다.
“생각은 못 했어. 아무래도 아직은 좀 이르잖아.”
늘어지게 하품하는 그를 보고, 장목화도 이젠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에 레드스톤 마켓에서 얻은 수확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아. 꽤 중요한 것들이기도 하고. 이제 신세계와 무심병의 구체적인 연계는 잠시 미뤄두자. 지금 더 이상 단서를 찾을 수도 없으니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는 거야.
건우는 우리랑 같이 장서실로 가서 책을 깔아놓고 좀 자. 우리는 방주 주민들에게 1차 선별을 좀 도와 달라고 할 테니까. 내일 오후 산 요괴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 몬티스가 남겨놓은 기록을 전부 찾아내야 해.”
구조팀은 앞으로 몬티스와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라는 불가의 성지 사이의 관계를 조사할 계획이었다.
* * *
인적 드문 깊은 밤, 구조팀은 장서실에서 한창 맡은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낮잠을 자던 성건우도 한창 열심이었다.
잠시 후, 장목화가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뭐라도 찾았어?”
“아뇨.”
백새벽이 가장 먼저 답하고, 용여홍과 성건우도 뒤이어 고개를 저었다.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최초의 충격과 혼란, 의혹을 느낀 이후 몬티스는 굉장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진 모양이야. 더 이상의 단서를 남기지 않은 것을 보니.”
몇 초간 고민하던 그녀가 질문했다.
“장서실에 불경도 있나?”
제도 선사 성건우는 그 질문에 매우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요, 있었으면 몇 권 찾아 살펴볼 생각이었거든요.”
불경을 살필 생각을 했던 건 성건우들이 아닌 제도 선사뿐이었다.
장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경도 본 적 없고 뭇별 홀을 거치지도 않았단 말이지. 그럼 디마르코, 혹은 몬티스라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능력 중 하나가 숙명통이라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불가의 전문용어잖아. 애쉬랜드인들도 대부분은 그걸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 해. 하물며 그 사람은 레드리버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