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59화 (559/649)

559화. 오매불망

다음 날 오전, 아침을 먹고 구조팀은 다시 지하 방주 장서실로 왔다.

성건우는 몬티스의 ‘성경’과 디마르코 가문의 자서전을 살피는 대신, 울리히를 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안에 신비학 서적도 있나요?”

울리히가 답했다.

“몇 권 있습니다. 몬티스 선생은 신실한 신도였던 터라 신비학은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대, 할아버지대에는 그 분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런 책도 방주 안으로 옮겨왔습니다.”

“거기로 좀 안내해주세요.”

성건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때, 둘의 얘기를 듣던 장목화가 모종의 생각에 잠긴 듯 입을 열었다.

“몬티스가 자기는 악마에게 씐 거라 여기고 신비학 속에서 그 관련된 근원과 해결 방안을 찾으려 했을 거라고 보는 거야?”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오전의 그는 정신도 맑고 상태도 좋아 보였다.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듯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 울리히, 용여홍과 신비학 서적 세 무더기를 옮겨왔다.

울리히가 떠나자 구조팀 네 명은 각자 그 책들 한 부분씩 맡아 살폈다.

책장을 넘기던 용여홍은 뭔가를 보고 멈칫했다. 책 안의 특정 단어와 구절에 누군가 흑청색 펜으로 밑줄을 그어둔 자국이 있었다.

그는 즉시 이 상황을 보고했다. 곧이어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도 속속들이 보던 책에서 같은 흔적을 발견했다.

비교를 거친 끝에 구조팀은 밑줄이 그어진 단어와 구절이 모두 영, 영혼, 영성과 관련된 것을 파악했다.

밑줄 그은 부분은 에테르론, 만물 유생론을 포함한 각기 다른 신비학 이론들과도 연루돼있었다.

검사가 심층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백새벽이 또 어느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책의 여백에는 흑청색 펜을 이용해 매우 묵직한 필체로 적은 단어가 하나 남아있었다.

「대가?」

백새벽은 팀원들을 향해 그 책장을 펼쳐보였다.

가장 먼저 용여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을 드러냈다.

“몬티스는 왜 마지막 장에 ‘대가’를 쓰고 물음표까지 붙인 거지?”

백새벽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대가란 단어를 쓰던 그때 몬티스는 매우 격앙돼 있었어. 필체가 아주 묵직하고 잉크 자국도 진해. 뒷장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대가⋯⋯.”

장목화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각종 가설을 떠올리고, 또 부정했다.

그 사이 성건우가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대가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까지 힘줘 쓴 거지? 무식하긴.”

그 말에 쿵쿵 뛰는 심장을 안고 장목화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몬티스는 그때까지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 아닐까? 감정이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비학 지식을 섭렵한 끝에 자기가 저도 모르는 사이 대가를 지불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 거야.”

‘대가’가 적힌 책은 신비학 중에서도 주로 악마와 관련된 책이었다. 또한 책은 여러 장에 걸쳐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로부터 힘, 재물, 육체, 혹은 아름다움을 산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용여홍이 나섰다.

“근데 뭇별 홀에는 ‘하나의 대가, 세 개의 은혜’라는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면서요. 몬티스가 각성자가 됐다면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요. 그 이치를 깨닫지 못했을 리가요.”

원래는 성건우까지 예로 들어 설득력을 높이려 했다. 성건우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도 대가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해보던 용여홍은 굳이 화를 야기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용여홍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목화가 약간 엄숙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몬티스가 정말로 각성에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몬티스는 각성하고도 뭇별 홀에 들어갈 수 없었던 거 아닐까? 아니면 당시에는 아직 뭇별 홀이라는 게 없었나?”

백새벽과 용여홍의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던 그때, 성건우가 오른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알겠다!”

장목화가 바로 그를 돌아보았다.

“뭘?”

성건우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구세계 파괴는 브라운 운동 같은 각성자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승급 때문에 발생한 거예요. 이로 인해 끊임없이 증가한 엔트로피가 임계점에 이르니, 혼란의 상징과 같은 무심병이 폭발한 거예요.

구세계 파괴 이후, 달지기들은 어느 정도 고통이 가라앉은 다음 뭇별 홀, 기원의 바다, 심령의 복도,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립하면서 각성자들을 관리하고 거기에 질서를 부여한 거죠.”

‘훌륭한 상상력이네. 최근에 어떤 콘텐츠를 본 거냐?’

장목화는 멍한 표정의 용여홍, 백새벽을 힐긋 본 뒤 목을 가다듬었다.

“아직 이러한 현상 배후의 원인을 토론할 필요는 없어. 지금 우리가 확인해야 할 건 이거야.

몬티스가 대가라는 개념을 몰랐던 건 각성했을 당시 아직 뭇별 홀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갔다가 모종의 축복을 받고, 밀입국이라도 한 것처럼 뭇별 홀을 우회해 각성을 완료한 건지.”

어느 쪽인지 판단할 수 없어서, 용여홍은 실증 정신에 입각해 대꾸했다.

“일단 여기 책들을 더 살피면서 몬티스가 더 남긴 말이 있는지 확인해봐요. 더 이상의 단서가 없다면 답은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있을지도 모르죠.”

장목화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일단 관련된 책들을 모두 찾아오자. 종교, 신비학, 초자연적 힘에 대한 연구, 세계의 불가사의, 그와 관련된 영역의 소설 등등⋯⋯.”

이는 절대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정오가 다 될 때까지 구조팀은 작업의 10분의 1도 마치지 못했다.

장목화가 제일 먼저 기지개를 켜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휴, 이렇게 스스로를 학대할 순 없어. 어인을 만났다가 돌아올 때 물자를 좀 가지고 오자. 그 물자로 방주 주민들을 한 20명 정도 고용해서 1차 선별 작업을 도와달라고 하는 거야. 글 같은 거 몰라도 할 수 있는 작업이잖아. 주석이나 낙서 같은 게 남아있는 책만 골라도 되니까.”

용여홍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삼켰다.

그러나 성건우는 대놓고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왜 이제 말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렇게 했으면 적어도 절반은 벌써 끝냈을 텐데요.”

장목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작업의 난도를 과소평가한 거지.”

혹시 다음 책에서 몬티스의 또 다른 주석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장목화의 변명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 벌써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점심은 뭐 먹을까요?”

* * *

오후 2시경, 구조팀은 지하 방주에서 조직한 밀수팀을 따라 분노의 호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레드스톤 마켓에서 멀리 떨어진 이 구석진 지대엔 버려진 부두가 하나 있었다. 방주 관리위원회에서는 손에 넣은 배를 정박시킬 요량으로 사람을 시켜 이 부두를 이미 고쳐놓은 상태였다.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은 보드는 통조림과 약물 등이 든 상자를 작은 배 한 척에 실은 뒤 구조팀의 탑승을 도왔다.

터빈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 속, 갈색 칠을 한 작은 화물선은 물결을 일으키며 분노의 호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구불구불 몇 차례나 방향을 꺾고, 화물선은 호수 중앙의 황량한 섬에 도착했다. 염호가 잠든 그 섬보다 훨씬 작은 이 섬은 햇빛에 비친 호수와 맞닿은 전후좌우의 끝이 한눈에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얼굴에 주근깨가 난 보드가 전방의 기암괴석이 가득한 섬을 가리켰다.

“섬에서 기다리자. 어인들의 반목을 경계해야 하거든. 우리는 호수나 물속에선 절대 그들의 적수가 못 돼. 그들 역시 호수를 떠나 뭍에 오른 상태론 우리랑 거래하려 하지 않아.

그러니 섬과 호수의 수면이 맞닿는 지점에서 거래를 진행해야 해. 너희 애쉬랜드어로 말하자면 절충법인 셈이지.

이 섬은 크진 않은데 배의 공격을 막을 바리케이드를 설치할 수 있어. 어인이 정말로 악의를 품고 달려든다 해도 우리는 방어를 하면서 지원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낼 수 있지. 그렇게 보낸 전보로 반년 전 얻은 드론에 각성자의 도움까지 받으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 거고.”

‘훌륭해. 평범했던 경비들이 이제는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고 있군.’

속으로 칭찬하던 장목화가 화제를 이어 물었다.

“그 각성자들 태도는 어때?”

그녀가 묻는 건 디마르코가 길러낸 각성자들이었다.

보드는 솔직하게 답했다.

“둘은 매우 적극적이야. 지금은 이미 관리위원회에 흡수됐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들 능력은 우리한테 매우 유용하니까. 나머지는 관리 직책을 맡기 싫다고는 했지만 우리는 그들한테 꽤 괜찮은 대우를 해주고 있어.”

‘하긴, 관리위원회에 충분한 힘이 없다면 언젠가는 반기를 든 사람들이 일어날 테니까.’

장목화가 당시 게네바에게 지하 방주의 임시회장을 맡긴 것도 그 각성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지하 방주를 마냥 경계 교회당에만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무료함에 지친 성건우는 복부와 허리에 힘을 주면서 제자리 멀리 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화물선 가장자리에서 몸을 날린 그는 널빤지를 밟지 않고도 곧장 섬 위로 뛰어내렸다.

그 순간 보드를 포함한 이들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괴물인가?

뒤이어 장목화도 망설임 없이 널빤지 위를 가볍게 뛰어 섬에 올랐다.

용여홍과 백새벽까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 * *

그로부터 15분이 지났을 무렵, 어인들이 목제 어선 한 척을 타고 거래 장소에 이르렀다.

그들에게는 사실 분노의 호수 안에서 긁어모은 각종 선박과 조상 대대로 전수한 수리 기술이 있었다.

하지만 연료, 철판, 배터리 등의 자원이 부족한 까닭에 수리할 수 없거나 수리하고 나서도 이용할 수 없는 배가 태반이었다. 그보단 낡은 목선이 그들에게 훨씬 더 적합했다.

미약한 빛을 번득이는 흑회색 얼굴들과 흰자가 대부분인 툭 튀어나온 눈, 그리고 귀 아래부터 목까지 이어진 아가미를 목격한 용여홍은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안면인식 장애가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김새가 너무 비슷해서, 키와 체격으로 구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두머리인 듯 보이는 키가 큰 어인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다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며 호수와의 거리를 좁혔다.

서서히 다른 어인들이 술렁이는 와중, 그 키 큰 어인이 흑회색 비늘에 덮인 손바닥으로 구조팀을 가리켰다. 그가 곧 레드리버어로 물었다.

“저들은 누구지? 지금껏 거래하는 동안 없었던 사람들인데!”

방주 관리위원회에서 조직한 밀수팀은 어인들의 경계심을 완화하고자 최대한 변화를 줄이려 했다. 누군가 못 갈 상황이 되면, 충원하는 대신 한 사람 적은 상태로 이곳에 이른 적도 있었다.

‘와, 이 어인들, 삶이 벅차면 금세 에이돌른을 믿겠는데? 경계심이 이렇게까지 강한 걸 보면.’

장목화는 보드를 돌아보며 그에게 맡기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런데 보드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 성건우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방주 관리위원회 명예 회장이야. 이 밀수 사업의 배후 보스라고 할 수 있지. 걱정하지 마, 정말로 너희를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진즉 했을 거야. 여태까지 기다릴 필요 있었겠어?”

별 설득력 없는 성건우의 말에 보드를 비롯한 이들은 매우 걱정했다. 어인들이 이 말을 믿지 않으리란 생각에 급히 성건우를 자신들 뒤로 숨기려고까지 했다. 그들은 울리히 회장이 준비해둔 말로 어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생각이었다.

물론 밀수팀도 구조팀이 굉장한 실력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성건우를 숨겨주려는 것도 어인들이 반목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갈등을 줄이고 충돌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들에게는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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