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악마가 눈을 떴다!
사락- 사락-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요한 이곳엔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울렸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성경’ 중 지옥과 악마에 관련된 부분을 살피던 장목화는 특정 페이지 아랫부분 여백에 누군가 짙은 파란색 잉크로 써둔 글 한 구절을 발견했다. 레드리버어 문자로 쓰인 글이었다.
「난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악마가 눈을 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평범하게 쓴 글인데도 순간 장목화는 등골은 오싹해졌다. 급히 뒷부분을 넘겨봐도 그 외의 다른 주석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성경을 통틀어도 별도로 남겨진 내용은 이것뿐인 듯했다.
장목화는 바로 백새벽과 용여홍을 불렀다.
“이것 좀 봐. 구세계 파괴 이후, 지하 방주에서 각성한 몬티스가 처음으로 남긴 말일까? 당시 자기가 어떤 능력을 얻었는지 파악하고, 악마가 된 듯한 느낌에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런 글을 남긴 걸까?”
막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려던 용여홍은 문득 한창 보고 있던 자서전 한 부분에 눈길이 갔다.
「가문의 건축 사업 개척을 위해 큰아들 몬티스는 이웃 나라 아이언마운틴 시티로 파견되어 구도시 개조 입찰에 참여했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용여홍이 외쳤다.
“팀장님! 몬티스는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갔었어요! 구세계 파괴전에요!”
그 둘 사이에는 정말로 일정한 연관이 있었다.
서장실 안에 울려 퍼지는 용여홍의 목소리는 꼭 우렁찬 천둥이 된 듯 장목화와 백새벽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지하 방주의 1대 주인이자 디마르코의 본체로 의심되는 몬티스가 정말로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갔었다!
장목화의 예상을 벗어난 부분이 있다면 그 일이 발생했던 시점이 혼란의 시대가 아니라 구세계 파괴 이전이라는 사실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용여홍의 곁으로 다가온 장목화는 그가 들고 있던 자서전을 받아들었다.
해당 부분을 몇 차례나 반복해서 살핀 후에야 장목화는 기쁨과 충격이 혼재된 얼굴로 용여홍과 백새벽을 쳐다보았다.
“몬티스가 언제 돌아왔는지, 아이언마운틴 시티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한번 찾아보자.”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세 사람은 자서전 몇 권을 바쁘게 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문장 부호 하나까지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세 사람은 마침내 자서전 속에서 몬티스와 관련한 모든 내용을 취했다.
자서전이 작성됐을 당시의 그는 가주가 아니라 상속 순위가 비교적 높은 큰아들이었다. 그래서 그가 한 각종 활동이 여러 장을 채우진 않았다. 다른 사건이 기록될 때 가끔만 언급될 뿐이었다.
이웃 나라 아이언마운틴 시티로 가서 구도시 개조 입찰에 참여한 몬티스가 그 입찰을 따냈는지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도 장목화는 몬티스가 그 후로 1년이 지났을 무렵에야 가문의 다른 사업에 참여했던 기록을 토대로, 그가 경쟁 입찰을 따내고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을 거라고 판단했다.
“몬티스는 이후 랜드마크 건설을 위해 이 도시로 파견됐다가 구세계의 파괴를 맞았어. 그럼 그 사람이 아이언마운틴 시티를 떠난 게 구세계 파괴 몇 년 전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 회사는 구세계 당시부터 일정한 이상을 보였던 건가?”
레드스톤 마켓이 자리한 폐허에 대응하는 이 도시는 구세계 당시 경제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곳이었다. 자서전에 따르면 인건비가 매우 높고 효율은 무척 낮아서 각종 대형 프로젝트의 공정이 무척 느리게 진행됐다고 했으니 이곳의 랜드마크 건설에 몇 년을 들인 것도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지하 방주는 그 사람이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가기 몇 년 전에 지어졌으니 제2 식품 회사의 이상과는 확실히 무관하네요.”
백새벽은 그 둘을 연관 지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차례 토론을 마친 뒤 장목화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입을 가리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늦었네, 이만 돌아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마저 찾아보자.”
이곳의 많은 책을 단번에 다 살피기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으니 일단 돌아가 좀 쉬고 회복한 다음 내일 아침에 다시 작업을 이어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백새벽, 용여홍 역시도 바로 동의했다. 이들은 몬티스, 혹은 다른 사람이 남겼을지 모를 ‘성경’ 속 구절을 보고 한동안은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어서 많이 피로한 상태였다.
몇 발짝 옆으로 가서 허리를 굽힌 장목화는 왼팔의 힘만으로 장신의 성건우를 들어 올려 부축했다. 성건우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장목화를 도우려던 용여홍은 순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주춤주춤하며 괜스레 주위만 한번 살폈다.
* * *
구조팀은 지하 2층으로 돌아왔다. 울리히는 이미 사람을 시켜 방 두 개를 깔끔히 정리해 둔 상태였다.
방 두 개를 요청한 건 장목화였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끼리 서로를 잘 보살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헤어지기 전 장목화가 습관적으로 당부했다.
“너희도 돌아가서 쉬어. 밤 동안은 최대한 깨지 말도록 하고. 정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을 깨워. 절대 혼자 움직이지 말고.”
손님용 방의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네, 알겠어요.”
백새벽이 답했다.
용여홍은 한 박자 늦게서야 대답했다.
“네, 팀장님.”
지금 용여홍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구조팀이 결성된 이래 줄곧 써온 방 분배 방식에 팀원들도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더 이상은 부끄러워할 것도, 난감해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용여홍은 그러지 못했다.
마음이 달라진 탓이었다.
또 부상을 회복한 이후 백새벽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건 처음이었다.
퍼스트 시티에서 반고 바이오로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반고 바이오에서 레드스톤 마켓으로 올 때까지 구조팀은 가끔 거점을 찾아 물자를 보충했을 뿐 여관을 찾은 적도, 방을 빌린 적도 없었다. 심지어는 텐트조차 치지 않고 둘이서 한 조를 이뤄 돌아가면서 지프 안에서만 쪽잠을 청했을 뿐이었다.
주위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공간에서 잘 때와 격리된 공간에서 단둘이 잘 때의 느낌은 분명 달랐다.
사실 용여홍은 팀원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엔 장목화가 방을 새롭게 배정할 거라고, 더는 남녀를 한 방에 배정하는 불편한 방식을 고수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이제는 신입인 데다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람과 베테랑을 한 방에 배정한다는 명목도 없었고, 지금의 용여홍에게는 그래도 힘겹게나마 성건우를 감당할 능력도 있었다.
그런데 장목화는 그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었다. 아까 용여홍이 성건우를 부축하는 장목화를 도우려다 만 것도, 괜히 나서서 장목화가 방 배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걸 떠올릴까 봐 부러 모른 척한 것이었다.
방에 들어선 용여홍이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어느 침대에서 잘래?”
“뭐, 어디든 괜찮아.”
백새벽이 메고 있던 전술 배낭을 풀어 오른쪽 침대 위에 집어 던졌다.
“어어.”
답과 다른 행동에 용여홍은 바로 왼쪽 침대로 다가가 가장자리에 앉았다.
백새벽은 벌써 외투를 벗고 있었다.
이전 같으면 하도 많이 봐서 아무렇지도 않았을 광경이었다. 게다가 백새벽은 외투 안에 카무플라주 패턴이 들어간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맨살 하나 드러난 부분도 없었다.
하지만 용여홍은 그래도 뭔가 어색해서 최대한 조용히 목을 가다듬으며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씻으러 안 가?”
백새벽이 세면도구를 챙기며 물었다.
“어어.”
용여홍은 즉각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계 팔에선 통조림 따개나 강철 빗 등이 수시로 튀어나왔다가 거둬들여졌다.
깨끗이 씻고 침대에 누운 용여홍은 캄캄한 어둠 속 천장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 * *
어느새 까무룩 잠든 용여홍이 언뜻 눈을 떴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또렷한 요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밖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고요한 방에 들려오는 백새벽의 숨소리도 깊이 잠든 듯해서, 용여홍은 그냥 반대로 돌아누워 요의를 참으려 애썼다. 괜히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고 싶진 않았다.
용여홍은 옆으로 누웠다가, 엎드렸다가, 또 반대편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하면서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틀었다.
그때, 백새벽 쪽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깼어? 나 화장실에 좀 다녀오고 싶은데.”
“좋아.”
용여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두 사람은 무기를 챙겨 방에서 나와 옆쪽으로 향했다.
* * *
“너 먼저 가.”
용여홍은 매우 신사답게 화장실 문을 가리켰다.
백새벽도 사양하지 않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용여홍은 복도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 음산한 바람을 느꼈다.
주변엔 벽등 몇 개에서 나오는 어스름한 빛뿐이었다.
순간 용여홍은 디마르코와의 대전이 떠올랐다. 형언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 그는 마치 귀신에 씌기라도 한 듯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디마르코의 잔여 기운이 유령 같은 형태로 아직 지하 방주에 남아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움은 깊어졌다. 누군가 몰래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눈을 살짝 굴리던 용여홍은 느릿하게 돌아서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그의 시야에 두 눈동자가 맺혔다.
원숭이 가면 속에서 번득이는 눈이었다.
용여홍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고 말했다.
“왜 이렇게 조용히 와!”
성건우는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다른 사람이 자는 데 방해될까 봐.”
“⋯⋯.”
용여홍은 그냥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건우와의 승강이는 괜한 힘만 빼는 꼴이었다. 그러다 용여홍이 다시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어쩌다 깼어?”
“너무 오래 잔 거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성건우가 당당하게 답했다.
용여홍이 미간을 구겼다.
“근데 왜 혼자야? 팀장님은?”
“이 정도 거리면 방에서도 충분히 감지하잖아. 굳이 깨울 것까지야. 근데 아까 장서실에선?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응.”
용여홍이 막 답을 하려는데, 백새벽이 마침 화장실에서 나왔다.
“들어가.”
“잠깐, 잠깐. 일단 뭘 발견했는지부터 말해봐.”
성건우는 원숭이 가면까지 벗고 호기심 어린 얼굴을 드러내었다.
오랫동안 요의를 참았던 용여홍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곤 입술을 깨물었다. 최대한 빠르게 장서실에서의 일을 공유해주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백새벽이 용여홍과 성건우 사이로 다가왔다.
“아니야, 내가 말해줄게.”
“응!”
용여홍은 기쁘게 호의를 받아들였다.
다시 용여홍이 손을 씻고 나왔을 때 백새벽은 이미 대략적인 상황을 성건우에게 다 알려준 상태였다.
성건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몬티스는 그때 자신이 악마한테 씐 거로 생각한 건가? 그게 각성인 줄은 몰랐었나?”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개념을 접하지는 못했을 거야.”
용여홍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성건우는 이번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