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목적 (1)
잠시 좀 머뭇거리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네, 다음 거래일은 언제인가요?”
울리히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루 전에는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사람을 보내 그들과 약속을 잡아야 하니까요.”
‘아주 마음에 드는 분일세. 내 말을 듣자마자 의도를 딱 알아듣고 그에 대한 답을 하다니. 과연 구세계의 돈 많고 지위 있는 사람들이 좋은 집사를 찾았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장목화는 곁눈으로 용여홍과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았다. 용여홍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에, 성건우는 왠지 좀 정신이 팔린 듯한 표정이었다.
고민하던 장목화가 물었다.
“내일 오후는 어인, 모레 오후는 산 요괴를 만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문제없지요.”
울리히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 후로 다른 얘기까지 끝낸 뒤, 방주 관리위원회 세 위원은 떠났다.
* * *
세 사람을 보내고, 장목화가 일어나 아무 거리낌 없이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여기서 묵자. 겐이 오기 전에 어인, 산 요괴랑 만나보는 거야.”
드디어 용여홍도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팀장님, 산 요괴와 만나려는 이유는 알겠어요. 그들한테 아이언마운틴 시티 정보를 얻으려는 거잖아요. 근데 어인은 왜 만나시려는 거예요?”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전부터 하려던 일이었어. 그때는 우리 실력이 너무 약했고, 혹시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참았던 거지. 다들 어인 신사 기억하지?”
“네, 기억해요.”
백새벽이 가장 먼저 답했다.
반면 성건우는 오늘 너무 오래 깨어있어서 그런지 다시 심해진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목화는 계속해서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처음으로 염호의 신전을 발견한 건 어인 신사가 아니라 어인 부족의 청년들이었어. 섬에 올라 마을에 진입한 뒤 신전을 발견했고, 이상한 느낌에 감히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사람을 보내 어인 신사한테 그 사실을 알렸지.
그들이 과연 마을 안에서 어인 신사를 기다렸을지, 기다린 시간이 30분 이상일지 궁금하더라고.”
이 이야기에 용여홍은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처음으로 호수 섬을 탐색하러 갈 때 회사가 알려준 세 번째 주의사항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전 내에서는 15분 이상, 신전 부근 구역에서는 30분 이상, 신전이 자리한 섬에서는 사흘 이상 머무르지 말 것.
그 어인들은 신전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흘 이상 섬에 머물지도 않았지만 신전 부근, 그러니까 그 마을에서 어인 신사를 기다렸을 가능성이 컸다.
용여홍이 떠보듯 물었다.
“팀장님, 그 어인들이 당시, 혹은 그 이후에 무슨 이상을 보였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건가요?”
짝짝짝!
성건우가 겨우 손을 들어 손뼉을 쳤다.
장목화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근데 우리 일단 뭐 좀 먹은 다음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자. 오늘 밤에는 안 나갈 거야.”
그런데 성건우가 갑자기 낮게 깐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안 나가요? 경계 교회당 사람들이 뭐라고 싸우는지 안 듣는다고?”
장목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은 그럴 필요 없어.”
새롭고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성건우는 계속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교리에 대한 다른 해석은 일상생활 속 각기 다른 ‘풍습’으로 반영돼요.”
의도적으로 풍습이라는 말을 강조한 성건우를 보며, 장목화도 살짝 망설였다.
곁에서 백새벽도 조금 거들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에요.”
결국 장목화가 한숨을 토해냈다.
“좋아. 경계 교회당으로 가서 송 경고자를 만나자. 여기까지 와놓고 인사도 안 하면 실례잖아.”
* * *
접견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도중, 허약한 성건우는 장목화 옆에서 쉬지 않고 나불대며 걷고 있었다.
그는 극심한 현기증도 줄곧 흥분된 감정으로 억누르는 중이었다.
“팀장님은 10월생이잖아요. 10월의 달지기는 에이돌른인 데다가 팀장님은 그 달지기의 주시를 받기까지 했어요. 이건 팀장님과 그 달지기 사이에 연이 있다는 뜻이에요. 마땅히 그 달지기에게 귀의할 때가⋯⋯.”
“그만, 그만!”
장목화가 결국 몸서리치며 제도 선사의 설교를 저지했다.
성건우는 인물 설정에 더 부합한 모습을 보이려고 최근 관련된 구세계 콘텐츠를 적잖게 시청했었다.
덕분에……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더 많아졌다.
‘경계 교회당 밑에서 에이돌른의 주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정말로 좋은 일일까? 디마르코처럼 방주에 짓눌린 채 평생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새로운 세계에도 안 들어가고 싶은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인상을 쓰며 화제를 전환했다.
“넌 9월생인데 만다라 신도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잖아.”
성건우는 아무 말 없이 등에 메고 있던 전술 배낭을 풀었다.
용여홍은 친구의 생각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육식주를 끼려고. 그럼 만다라 신도 이미지에 완전히 부합하잖아.”
말하는 동안, 그는 손을 들어 입술을 살짝 쓸기까지 했다.
이는 초월 영성 교단의 예였다. 성건우가 그의 형제, 블랙셔츠파 세컨드 보스 테렌스에게 배운 것이었다.
“예의를 지켜야지! 이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 모르잖아.”
그래도 장목화는 성건우가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댔다.
“그렇죠.”
성건우도 바로 깊이 동감하며 전술 배낭 지퍼를 잠갔다.
이때 백새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감찰자에 속한 5월생, 작은 빨강이는 깨진 거울에 속한 11월생이죠.”
그러자 용여홍도 곧장 백새벽의 말을 따라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달지기와 달 사이 관계가 그리 강하지는 않나 봐요. 저만 봐도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없다는 정신이 없잖아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장목화는 조용히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 * *
경계 교회당 지하 1층에 이른 구조팀은 다시 가면을 착용한 뒤 나름 익숙한 길을 따라 나아갔다.
이곳 홀은 장목화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어둡고 넓은 홀은 대부분 붉은색으로 칠해져, 굉장히 위험하니 계속 경계해야 한다는 경고를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 붉은색 사이사이엔 강렬한 신성함이 드는 황금색도 섞여 있었다.
홀 깊은 안쪽 벽에는 반쯤 닫힌 흰색 문, 문 뒤의 어둠, 그리고 여자의 인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상징이 보였다.
누구든 이곳에 들어오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저 신비로운 대문 너머 알 수 없는 존재의 주시를 피하고 싶어졌다.
현재 거대한 상징 양쪽엔 두 무리가 서로 거리를 둔 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투는 때로는 격렬했고, 때로는 침착했다.
그쪽을 힐긋 살펴본 용여홍은 성휘 좌측의 7, 8명 정도는 경계 교회당 소속일 거라 생각했다. 상대를 알아본 건 아니고, 그들이 착용한 상징적인 가면이나 후드 때문이었다.
성휘 우측의 5, 6명 정도는 뒤로 약간 물러나 있었다. 홀에 드리운 저녁의 어둠에 숨으려는 듯했다. 가면을 착용하지 않은 그들은 겁많은 메추라기 무리처럼 수시로 몸을 바들바들 떨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언쟁에 지나치게 집중한 건지, 하늘이 어둑해진 데다 성휘 앞에 밝혀진 초가 몇 개뿐이라서인지, 다들 구조팀의 존재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까치발을 들고 몰래몰래, 살금살금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렸을 적 숨바꼭질할 때처럼 진지하기도 엄청 진지했다.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은 따로 기척을 숨기지 않고 그 뒤를 따랐지만, 여전히 성휘 앞의 두 무리는 구조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장목화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경계심! 그렇게 좋아하던 경계심은 다 어디다 갖다 팔아먹은 거야?’
그때, 성건우는 벌써 성휘 부근에 몰래 자리를 잡은 뒤였다. 원숭이 가면을 쓴 그는 흡사 같은 무리처럼 경계 교파 사람들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용여홍은 입꼬리를 살짝 뒤틀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쪽팔릴 일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거리가 좁혀지며 구조팀도 이젠 성휘 앞의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 중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경계 교회당에 속한 한 평범한 성직자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 세계는 너무 위험해. 언제고 각종 재난이 닥칠 수 있으니,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하고 그런 태도로 생활해야 해. 그래야 구세계의 파멸 속에서 온전히 버텨내고 새로운 세계의 대문이 열릴 때를 맞이할 수 있지. 이것이 바로 달지기께서 우리에게 경고하고자 하시는 거야.”
이미 놀란 듯 바들바들 떨던 중년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그 말엔 틀림이 없어. 하지만 자네들 중점이 잘못됐어. 중점은 공포야! 공포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원시적인 감정이지. 여태껏 인류를 살아있게 한 것도 그거고.
신령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만한 모든 걸 두려워해야 자연히 경계심이 생겨나고 상응하는 대비도 할 수 있어. 그러니 경계심은 우리가 교리를 엄격히 준수하면 자연히 나타나는 결과일 뿐, 본질은 아니란 말이야!”
성긴 천으로 만들어진 후드를 쓰고 있던 또 다른 경계 교회당 성직자가 성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공포의 목적은 경계야. 스스로를 공포 속에 침잠시키고 병적인 상태로 추구하는 건 아니지! 자네들은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어!”
성어를 쓰는 것을 보니 그는 애쉬랜드인인 듯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용여홍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됐다.
‘……그래서 당신들은 가면을 쓴 채 이리저리 숨어다니고, 누군가에게 총으로 위협당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거였군요.’
장목화는 그들의 언쟁을 귀담아들으며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양측의 토론과 이론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여러 책을 통해 봤던, 구세계에서 1천 년 이상 이어진 교파들의 교리 논쟁과는 차원이 달랐다. 경전을 바탕으로 한 그런 논쟁은 철학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물론 그래도 장목화는 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애쉬랜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그렇지. 어떻게 조건을 결론으로 삼을 수 있나?”
“아니지! 이건 조건과 결론의 관계가 아니고 근원과 그 결과의 관계야!”
계속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는 순간 의아한 얼굴이 됐다. 조금 전 대화에서 사용된 특정 단어가 귀에 매우 익어서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성건우는 목을 빼 들고 큰 소리로 동조하다가, 재빨리 바닥에 웅크려 빛 가장자리를 따라 반대편으로 몰래 기어갔다.
진영을 바꾼 그는 다시 자리에 앉은 뒤 입이 뾰족한 원숭이 가면을 벗어버리고 뻔뻔하게도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잘 논다. 누가 쟤를 환자로 보겠어.’
장목화도 이젠 익숙한 듯 고개만 살짝 틀었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갑자기 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릉-!
올해 분노의 호수 구역에 내리친 첫 번째 춘뢰였다.
이 굉음이 가라앉을 무렵, 공포를 부르짖던 무리는 이미 꽁무니가 빠지도록 홀에서 나가 자신의 방으로 숨어든 상태였다.
경계 교회당 사람들도 곳곳으로 숨어 외부자에게 모습을 철저히 감췄다.
단 10여 초 만에 홀엔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 그리고 성휘 근처에 외롭게 앉은 성건우만 덩그러니 남았다.
잠시 후,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가서 송 경고자를 만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