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54화 (553/649)

554화. 초유근

여자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백새벽을 두어 번 살핀 뒤, 장목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가 몇 초간 멍한 표정을 드러냈다.

“너도 그런 것 같은데.”

백새벽이 초유근에게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구조팀을 소개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초유근도 백새벽의 반응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계속해서 웃음을 머금은 채 친절하게 굴었다.

“이쪽은 소양규, 이쪽은 모지현이야. 근데 여기는 무슨 일? 검은 늪 황야랑 퍼스트 시티 주위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백새벽은 매우 간결하게 답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그 뒤로 초유근이 입을 열기 전, 장목화가 백새벽을 도와 덧붙였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할 때는 둘 중 하나지.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밀려나거나, 갈 곳에 대해 잘 알고 괜찮은 연줄이 있으며 준비도 잘 되어 있거나. 그쪽이 보기에는 어느 쪽일 것 같은데?”

스모키 화장을 한 모지현이 막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서자 초유근이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모습을 보아하니 후자일 것 같군.”

그러자 성실한 성건우가 무력하게 반박했다.

“그래? 내 상태가 그렇게 좋아 보여?”

“⋯⋯.”

순간 초유근은 말문이 막혔다.

그때, 꽃무늬 셔츠를 입고 금목걸이를 찬 예술가 분위기의 소양규가 손으로 비수 한 자루를 놀리며 이야기했다.

“가끔 내 상태는 너보다 더 나빠. 근데 그거론 무엇도 증명할 수 없지.”

성건우는 상대의 말에 담긴 가시 같은 건 전혀 개의치 않고 대꾸했다.

“너도 밤새는 걸 좋아해?”

소양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당연하지. 밤은 뜨겁고 따뜻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얼마나 믿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야. 물론 냉정하고, 공허하고, 각종 영감이 피어오르는 때이기도 하고.”

용여홍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묘사하는 건 또 처음이네. 욕망 성인 교파나 초월 영성 교단보다 더 과하잖아?’

이내 백새벽이 나섰다. 성건우가 대화를 점점 더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알아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것이다.

“그러는 너희는 퍼스트 시티 동쪽으로 간다며. 다른 사람들은?”

분노의 호수는 퍼스트 시티 남쪽에 있는 데다 아이언마운틴으로 한참 멀리 분리돼 있기까지 했다.

또 백새벽이 말하는 다른 사람들이란, 초유근과 함께 퍼스트 시티 동쪽 세력으로 떠나 기회를 찾으려 했던 유적 사냥꾼들이었다.

초유근은 여전히 웃음 가득한 얼굴로 전보다 더 명랑하게 말했다.

“몇몇은 거기 눌러앉아 오렌지 컴퍼니 직원이 됐고, 더러는 오염되지 않은 밭을 얻어 한 무리랑 무장 농장을 세웠지. 난 분노의 호수 구역에서 할 일이 있어서 왔고. 우린 이번에 레드스톤 마켓으로 가. 회의에 참석하러.”

백새벽이 뭐라고 묻지도 않았고, 딱히 물어볼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초유근은 혼자 자문자답하듯 알아서 다 얘기했다.

용여홍은 의아해졌다. 회의라니? 대형 세력 외에 다른 곳에서 회의를 개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형 세력 영향권 아래서만 질서가 유지되는 이 애쉬랜드에 누가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참석해야 하는 회의를 열겠는가?

팀장 장목화는 이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회의라고?”

초유근이 웃었다.

“교구 회의야.”

용여홍은 더욱더 혼란에 빠졌다.

한편 장목화는 구세계 학술적인 책들에서 그와 비슷한 단어를 본 적이 있어서, 어느 교파 내부에서 교리적인 분쟁 해결이나 중요한 사업을 위해 진행하는 회의라고 추측했다. 그런 회의는 공의회나 교무 총회라고도 불렸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경계 교파 사람 같지는 않은데.’

그러나 레드스톤 마켓은 분명 경계 교파 영역이었다.

백새벽은 교구 회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냥 전에 함께 지내던 지인으로서 짧은 주의만 줬다.

“레드스톤 마켓으로 갈 거면 이쪽은 틀린 방향이야.”

초유근이 웃었다.

“알아, 알아. 일단 다른 곳에서 누굴 좀 만나야 하거든. 너희는? 여기 뭐하러 온 건데?”

장목화는 백새벽이 곤란하지 않게 먼저 나섰다.

“아이언마운틴 시티를 한번 돌아보려고.”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간다고? 위드 시티에서 동남쪽으로 쭉 가면 되는데, 왜 굳이 분노의 호수 구역까지 우회한 거야?”

초유근은 의아하다는 듯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그가 볼 땐 설령 백새벽이 그곳에 가보지 않았다 한들 길까지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아이언마운틴 시티는 혼란의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폐허 중 하나였다. 근 20년 동안엔 이미 다 적막해지기는 했어도, 유적 사냥꾼들이라면 그곳과 관련한 상황에 대해서는 나름 빠삭하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백새벽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레드스톤 마켓에 가서 우리 동료 하나랑 합류할 계획이거든.”

“아, 그 동료는 상당히 강한가 봐?”

초유근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백새벽의 말을 들어보면, 구조팀의 동료는 혼자 그곳까지 올 거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홀로 애쉬랜드의 먼 길을 이동할 엄두를 낸다는 건 이미 다른 길이 없어 자포자기한 사람이거나 본인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뿐이었다.

“맞아.”

성건우는 동료 게네바의 실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

초유근 일행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사회성이 좋은 초유근이 그나마 다행히 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너희도 레드스톤 마켓에 가야 한다면 나중에 거기서 한 번 모일까? 그래, 너는 지금쯤 베테랑 사냥꾼이 됐겠지?”

백새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더 있어야 해.”

구조팀이 사냥꾼 길드 임무를 수행하는 일에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퍼스트 시티에서도 흰 늑대 임무를 완수한 후부터는 유적 사냥꾼 일에 딱히 열의를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백새벽도 아직 중급 사냥꾼이었다.

초유근도 예의를 갖춰 그 이유를 캐묻는다거나 하진 않았고, 몇 마디 한담만 더 늘어놓다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우리는 이만 가볼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나중에 봐.”

백새벽도 깔끔하게 손을 흔들었다.

앞뒤로 서서 멀어지는 초유근 일행의 차를 눈으로 배웅하다가, 갑자기 장목화가 백새벽을 돌아보며 낮게 웃었다.

“작은 흰둥이, 혹시 저 사람이 전에 너 쫓아다니지 않았어?”

‘……?’

순간 용여홍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곧이어 백새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유적 사냥꾼이 팀을 이뤄서 임무를 완수했을 때, 그 안에 여자가 혼자라면 구애하는 남자들이 적지 않아요.”

장목화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작은 흰둥이처럼 예쁜 미인한텐 특히나 더했겠지.”

“근데 원하는 건 잠자리 몇 번뿐이에요. 정말 위험이 닥치거나 마음을 움직일만한 수확이 생기면 대부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애했던 여자를 몰라라 하거나 뒤에서 칼을 꽂아요.

마찬가지로 남자 유적 사냥꾼도 동침한 여자가 자기를 물자보다 더 귀하게 여겨줄 거란 건, 자기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란 건 기대조차 없어요. 그런 시험을 계속 함께 거듭해 이겨낸 사람들만이 동반자가 되는 거고요.”

웃음을 터뜨린 장목화는 전에 봤던 어떤 남자를 흉내 내듯 손을 뻗어 백새벽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럼 우리는 동반자인 거네!”

백새벽은 살짝 몸을 빼면서도 적극적으로 장목화를 벗어나려 하진 않았다.

짝짝짝!

성건우는 다시금 박수를 보냈고, 용여홍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음 날, 구조팀은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아이언마운틴에 도착했다.

이곳에 지하 방주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

지하 방주 관리위원회 명예회장인 구조팀은 당연히 지하부터 살펴야 했다.

구조팀이 떠날 당시와 달리, 아이언마운틴 지하 방주 입구는 더 이상 숨겨져 있지 않았다. 트럭 두 대쯤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드넓은 길이 산 아래에서부터 동굴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 사람들과 산 요괴들은 이미 전부 그곳을 알기에 더는 비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주위 환경을 개선해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차로 빨리 이동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구조팀 역시 지프를 타고 그 입구까지 당도했다.

그곳에는 기관단총을 쥔 올리브색 제복을 입은 경비 네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현재 방주 관리위원회 소속이었다.

“정지!”

매우 낯익은 지프를 봤음에도, 다들 본분을 다해 차를 정지시켰다.

그 뒤쪽 동굴 깊은 곳에서는 대포 몇 대와 다연장 로켓 발사기가 설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포구를 조정하면서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게네바가 설계한 프로그램이었다.

방주 관리위원회 전 임시회장이자 현 명예회장인 게네바는 당시 지하 방주의 방어 체계를 혼자 개조한 바 있었다.

곧이어 장목화가 차 문을 열며 웃었다.

“우리를 몰라보는 거야?”

각기 다른 가면을 쓴 네 경비는 장목화의 키와 아직 차에 탑승한 구조팀 인원을 확인한 뒤 비로소 방문자의 신분을 깨달았다.

하지만 에이돌른의 신도이자 경계 교파 교도인 사람들이 그리 쉽게 경계를 풀 리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조심하며 거리 유지란 믿음을 유지했다.

이때 장목화는 누군가 조용히, 몰래 다가와 매우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을 콕 찌르는 걸 느꼈다.

누구인지 딱히 추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바로 성건우를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 성건우가 맞았다. 그것도 어느새 입이 뾰족한 원숭이 가면을 찾아 쓴 성건우가 있었다.

“가면부터 써요. 경계하는 마음은 영구히 존재하리라!”

조용히 속삭이는 원숭이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장목화도 이곳 풍습을 따라 우아한 중 가면을 꺼내 썼다. 물론 그를 따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네.’

용여홍도 안도와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돼지 가면을 착용했다.

동시에 그는 곁눈으로 백새벽이 전술 배낭에서 험악한 남자 가면을 꺼내 쓰는 것도 확인했다.

구조팀이 위장을 마치자 동굴 입구에 서 있던 경비들은 발을 맞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경계심을 대폭 낮춘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회장님들, 안녕하십니까!”

이제야 구조팀의 모습이 기억과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면서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시키지 않은 건, 회장들에게 인사할 때는 그런 예를 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작은 기도할 때 갖추는 예였다.

‘드디어⋯⋯.’

가면을 고쳐 쓴 장목화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이런 비정상적인 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건 건우 같은 애들 뿐이야.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겠군.’

그녀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건 지하 방주의 경비들에게 디마르코 시절에 길러진 습관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상응하는 규칙을 엄수하는 이들은 경계 교회당 병력이나 레드스톤 마켓 입구의 마을 경비대원, 치안소 구성원처럼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도 어디 숨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경계는 신의 힌트!”

성건우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경계 교파의 예를 취하며 호응했다.

그 사이 마음을 다스린 장목화가 물었다.

“주차는 어디 해야 하지?”

경비 하나가 좌측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돌아가면 주차장이 있습니다.”

그 후 그가 뭔가를 떠올린 듯 얼른 덧붙였다.

“서 회장님께 보고드립니다. 공원묘지 보수는 이미 끝났습니다. 주차장 뒤편에 있습니다.”

구조팀이 지난번 레드스톤 마켓에 왔을 당시 방주의 관리위원회 위원들은 농한기를 맞은 인력을 모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하인들의 공원묘지를 짓고 있었다.

장목화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해. 주차장을 따로 지을 정도면 세워야 할 차가 많았었나 봐?”

조금 전 보고한, 익살맞은 가면을 쓴 경비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현재 지하 생활이 익숙한 소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폐허로 이주해 각자의 논밭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방주 안에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이곳이 더 안전하고 방어도 쉽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지하 방주는 모든 구성원을 위한 예비용 창고이자 최후 피난소, 심리적 의지처였다. 관리위원회의 중요 부서 몇 개도 이곳에 설치되었다. 그래서 그 구성원은 수시로 이곳에 출입했고, 대부분은 차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디마르코 시절의 잔재이기도 하나, 관리위원회가 호송, 황야에서의 사냥, 폐허 도시 내부 통행 등의 필요성을 고려해 결정한 사안이었다. 예비용 무기 저장과 구입한 구세계산 폐차 등의 수리, 복원을 위해서는 이곳의 역할이 특히 더 중요했다.

‘꽤 그럴듯하네.’

장목화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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