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상당한 타격
몇 분간 주위를 살피던 그때, 성건우가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을 쳤다.
탁!
그리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난 522호 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잖아. 심지어 그 이름도⋯⋯.”
지금 그의 육신을 통제하는 건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성건우였다.
곧 유약하고 겁 많은 성건우가 코웃음을 쳤다.
“가끔은 진짜 널 우리 일원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 522호 방 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이 뭔지 몰라도 일단 생존자를 찾거나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을 찾을 수는 있잖아. 522호 방 주인은 아마 그중에 포함돼 있을 거야.”
탁!
성건우는 재차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그에게 부끄러운 기색이라는 건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맞아!”
그때였다. 갑자기 기이한 행동을 하던 승객 몇몇이 성건우가 낸 소리를 따라 돌아섰다. 그들 중 더러는 포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더러는 광기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 한 판 붙어봐?”
농담하기를 좋아하는 성건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새롭고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난 미칠 듯이 질주해보고 싶어.”
이내 그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직은 공격하지 말자. 522호 방의 첫 번째 트라우마 기억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무턱대고 능력을 썼다가는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어.”
심령 세계 안에서는 총을 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물질 간섭 능력을 사용하는 짓이었다. 그게 아니면 총알은 제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몇몇 승객들은 벌써 이쪽으로 달려들면서 주먹을 움켜쥐거나 권총을 뽑아 들었다.
“뛰어!”
큰소리로 외치며 돌아선 성건우가 선실로 달려 들어갔다.
단박에 계단 입구까지 달려간 성건우가 위로 몇 층 올라가 보려는데, 계단 복도 맞은편에서도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남녀가 뒤섞였고, 다들 일그러진 표정에, 비수나 총검, 기관단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빠르게 층계참을 뛰어넘어 성건우에게로 돌진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성건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래로 달려가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같은 시각, 앞서 달리던 몇몇 남녀는 갑자기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육신은 강력한 관성을 이기지 못했다.
쿵!
쾅!
한 명, 한 명 도미노처럼 연달아 쓰러진 그들은 마치 성건우에 의해서 쓸려나간 것처럼 보였다.
양발 동작 불능의 결과였다.
성건우는 그들 사이를 미끄러져 지나친 뒤 손을 짚고 펄쩍 뛰어올랐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 그는 그 자리에 바보처럼 멎어버렸다.
뒤이어 스피커를 구현한 성건우가 음악을 틀었다.
- 마운틴 탑, 함께 해⋯⋯.
박자감 넘치는 음악 속, 성건우가 몸을 뒤틀며 춤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동작들은 매우 굼뜨고 비정상적이었고, 표정도 멍한 데다 일그러져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 모르게 마구 떨며 경련하던 성건우의 모습은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 * *
눈을 번쩍 뜬 순간, 성건우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전광과 걱정 어린 장목화의 얼굴을 보았다. 왼손을 든 걸 보니, 그녀가 강제로 깨워준 듯했다.
성건우는 바로 몸을 일으켜 앉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차창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웩! 웩…….”
그는 점심으로 먹었던 것들을 모두 토해냈다.
장목화는 성건우가 안정을 찾길 기다렸다가 몹시 걱정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성건우가 차분하고 냉철하게 답했다.
“정신에 상당한 타격을 입어서 머리가 빙빙 도네요. 팀장님이 때맞춰 깨워주셔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그 안에 갇힐 뻔했어요.”
말을 마친 그는 또 한 번 밀려드는 구역감에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담즙까지 솟구쳐올랐다.
장목화는 처음부터 성건우를 오래 재우려 하지 않았다. 찰나의 낮잠으로 그 트라우마를 다시 살펴보게만 할 생각이었다. 팀원 학대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뜻밖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 있었다.
15분이 지나면 성건우가 트라우마 안에서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해도 억지로 깨울 생각이었다. 전의 경험과 그 트라우마의 특수성에 따르면 외부 자극으로 곧장 912호에서 빠져나와도 정신적으로 큰 피해는 없었다.
또 성건우가 무슨 뜻밖의 상황으로 혼자선 절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고 한들 15분이란 짧은 시간 만에 트라우마에 완전히 잠식되고 현실에서 식물인간이 될 리도 없었다.
그러니 강제적으로 성건우를 깨워주기만 하면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 타격으로 심각한 결과 같은 건 빠르게 막을 수 있었다.
이에 15분이 되자마자 장목화는 뒷좌석에 함께 앉은 용여홍에게 기계 팔로 성건우를 세게 흔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흔드는 것만으로는 아무 효과가 없어서, 장목화는 과감하게 직접 나서서 전기 충격을 안겼다.
장목화는 다시 뒤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엔 그리 튼튼하고 쌩쌩했던 성건우는 모든 것을 게우고 난 뒤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이번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유람선 위였어요.”
느릿하게 중얼거리듯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한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 유람선을 뒤덮은 혼란한 상태에서 능력을 쓰면 그 역시 감염되는 모양이에요. 그럼 의식에 장애가 생기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 환자가 되고요.”
그리고 성건우가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
“내 살이 탄 냄새는 퍽 먹음직스럽네요.”
말을 마친 그는 재차 고개를 밖으로 빼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입꼬리를 뒤틀던 장목화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설마 그 트라우마 안에서는 내내 능력을 쓸 수 없는 거야?”
그때, 운전 중이던 백새벽이 끼어들었다.
“다른 사람이 정상일 때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용여홍도 추측에 나섰다.
“낮에는 정상이고, 밤에는 비정상이 되나?”
다시 성건우가 무기력하게 대꾸했다.
“모르겠어요, 다음에 다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가장 훌륭한 돌파구는 역시 522호의 주인을 찾아내는 거고요.”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방이 강제로 내보내 주는 방이라 정신적인 타격이 그리 심각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휴……. 근데 내 섬에서는 아무 희망도 안 보여. 남하고 비교하려면 끝도 없는 거겠지만.”
“방법이 전혀 없나요?”
백새벽이 물었다.
“음, 그렇진 않아. 최근에는 새로운 방향의 시도를 해보고 있기도 하고. 전에는 심리 암시 등의 방법으로 미리 상응하는 상태를 만들어 놓고 혼수상태를 마주했었거든? 깨어있을 때도 전에 두 차례 기절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리라고.
그렇게 마음속 그림자를 직면하라고 나 스스로 압박했었는데 소용없더라고. 내가 아는 트라우마를 이기는 방법이랑 실제 방법은 다른 것 같아. 내가 생각하기에는 난 더 이상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서 이제는 내 능력을 사용해 보려고. 건우한테 얻은 아이디어야. 건우는 기원의 바다에 있을 때 자기 능력과 대가를 아낌없이 이용하고 용기를 더해서 두려움을 이겨냈잖아.”
“결과는요?”
용여홍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두 번 시도해본 거야. 어느 정도 효과는 있는데, 성공까지는 아직 요원해.
주로 난 자극 장애라는 능력을 이용해서 혼수상태를 일으키는 자극에 반응을 둔화시키려 하고 있거든? 덕분에 이제는 섬에 오른 뒤 10초 넘게 버틸 수 있게 됐어.
앞으로는 전에 했던 심리적인 준비를 그 10여 초 안에 농축시켜서 혼수상태에 빠진 후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순간 성건우가 정신을 번쩍 차린 듯 소리쳤다.
“생각이 났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죠!”
장목화는 그를 슬쩍 흘겨보았다.
“왜, 네가 회복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걸리겠죠.”
성건우가 자신 없는 말투로 답했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좀 잘게.”
말을 마친 그녀는 하품하려는 듯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 * *
장목화의 기원의 바다.
미약한 빛이 번득이는 수면 위로 뜬 장목화는 본인의 앞길을 막은 섬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수면에 잠긴 듯한 산봉우리 같은 섬 중, 밖에 드러난 부분은 돌이 울퉁불퉁 튀어나왔으며, 사이에 자리한 동굴 입구는 깊은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까지의 장목화는 섬에 오르기만 하면 혼수상태에 빠지는 터라 그 동굴 안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섬을 응시하던 그녀는 현실에서 두 차례 기절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은 각성 실험을 했을 당시 이미 그에 대한 두려움을 반 이상 극복했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그러곤 한 가지 물건을 구현했다.
녹회색 옷을 입은 인형이었다. 다만 이 인형은 보통의 인형과 달리 얼굴에 이목구비 하나 없이 거울만 박혀 있었다.
그 거울에, 장목화의 얼굴이 비쳤다.
인형을 빤히 응시하던 장목화의 눈동자는 점점 반짝이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총총 뜬 별처럼, 달빛에 비친 깨진 거울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다음 순간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극 장애 능력을 발휘해 혼수상태에 빠지도록 하는 자극 반응을 둔화시켰다.
현재로선 이 능력이 유지되는 시간은 1분 정도지만, 섬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10여 초 안에 기절해버리는 그녀에겐 크나큰 발전이었다.
직접 거울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자극 장애와 물품 인식 불능 능력을 발휘하는 데 실패한 이후, 장목화는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장목화는 자신이 깨진 거울 영역에 속해 있다는 점을 고려해 거울을 다시 사용해 보기로 했다.
진아교의 신상과 교리에서 영감을 얻은 장목화는 자신과 매우 비슷한 인형을 만들어 그 얼굴을 거울로 채웠다. 덕분에 그 인형을 구현해 얼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진아를 비추는 듯한 묘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 느낌에 의지한 끝에, 장목화는 겨우 스스로에게 자극 장애와 물품 인식 불능 능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뭇별 홀로부터 기원의 바다로 이어지는 문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나중에 심령의 복도까지 진입하게 된다면 그 이후론 거울도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장목화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섬을 향해 헤엄쳤다.
잠시 후 왼손을 뻗으며 소리 없이 물 밖으로 나와 섬 위로 훌쩍 뛰어오른 그녀는 빠르게 흑청색 바위 앞에 앉았다.
그 후 자신의 휴대용 컴퓨터를 구현했다.
바로 각성 실험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구현된 컴퓨터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렸을 적 꿈을 아직 기억하니…….
익숙한 선율과 가사를 들으며 흑청색 바위에 기댄 장목화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곧 다가올 기절의 순간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시야는 캄캄해졌고 머리는 적막해졌다.
저도 모르게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