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화. 환장
일찍이 돌아선 성건우는 냅다 선실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다 뒤에서 자신을 급히 쫓아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 순간, 원래의 표정을 되찾고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도망치기 어려운 환경에서, 또 비교적 묵직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갑자기 우스운 표정을 지어 보일 사람은 없어. 그런데 저들은 내가 그런 표정을 하니 반응을 했어. 이 트라우마는 확실히 이상해.”
다른 성건우가 바로 반박했다.
“꼭 그러리란 법은 없지. 만약 그때도 정신질환자가 있었다면?”
언쟁이 이어지는 와중, 걸음을 늦춘 성건우는 복도 한쪽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 시각, 한창 그 방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던 남녀는 화들짝 놀라 멍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계속하세요.”
서둘러 방을 나온 성건우는 문까지 잘 닫아주었다.
정말 엄청난 실례였다.
이후로도 성건우를 쫓는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콰르릉!
높디높은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묵직하고도 길게 울려 퍼졌다.
뒤이어 성건우의 몸은 갑자기 휘청거렸고 눈앞의 세상은 점차 흐릿해지다가 투명해졌다.
* * *
눈을 번쩍 뜬 성건우는 언제 깨어났는지 모를 장목화를 발견했다.
백새벽과 용여홍도 근처에 모여들어 있었다.
“이상하네, 왜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는데 바로 쫓겨난 거지?”
성건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반적으로 트라우마를 떠나려 한다면 출발점으로 돌아와 심령의 복도로 나와야 했다. 정신적인 타격이 두렵지 않다면 외부인의 자극을 통해 억지로 깨어나는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심령 방 안의 각성자가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갇히지 않은 상태여야 했다.
장목화는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힐긋 바라볼 뿐, 뭘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용여홍은 건물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서 폭발음이 났어. 아까 전 그 팀이 머물고 있던 곳에서.”
용여홍이 이 말을 함과 동시에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가리킨 곳에서 또 한 차례의 폭발음이 울렸다.
내리는 빗소리를 뚫고, 요란한 총소리도 이어졌다.
“교전이 발생했나 봐.”
성건우는 그새 관심이 동했는지 매우 의욕적으로 추측에 나섰다.
“누군가 습격한 걸까, 아니면 그들이 다른 사람을 습격한 걸까?”
“누가 알겠어?”
장목화도 예언자가 아니니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뒤이어 그녀는 장난스럽게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왜, 가서 정의라도 세워주시게?”
“자기들끼리의 내분일지도 모르잖아요?”
성실한 성건우는 언제나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숨을 푹 내쉬던 그가 짙은 감정을 실어 설명했다.
“만약 어느 한쪽이 무고하게 습격당한 상황이면 기꺼이 나서서 도울 거예요. 제가 갖은 고생 끝에 심령의 복도에 이른 이유가 뭐겠어요? 근데 지금은 저쪽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니, 공연히 나서서 실수하는 것보다 방관하는 게 낫죠. 애쉬랜드에선 매일 이런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나니까요.”
“하……, 넌 원래 이렇게 말수가 많지 않잖아.”
한숨과 함께 대꾸한 건 구조팀 동료가 아닌 다른 성건우였다.
성실한 성건우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는 넌 언제나 이쪽저쪽 의견은 모두 다 얘기하잖아. 그래야 항상 네 말이 맞으니까, 안 그래?”
성건우들의 언쟁이 이어지려 하자 장목화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만!”
심지어는 머리가 다 지끈지끈했다. 원래 세 팀원을 이끌던 팀장 장목화는 성건우가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이후론 무려 행동 대대 하나를 이끄는 듯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열 명의 성건우가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벡 명이 떠드는 것만큼 시끄러웠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 장목화가 팀원들에게 분부했다.
“다들 짐 싸고 대비해. 여기까지 여파가 미치면 바로 반응할 수 있게.”
“예, 팀장님!”
큰 소리로 대답한 것 역시 성건우였다.
용여홍, 백새벽은 즉각 지프 트렁크를 열고 상자를 하나씩 꺼냈다.
그중 하나에는 카멜레온 타입의 최신형 인공지능 갑옷이 들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비교적 신형인 M-45형 군용 외골격 장치가 들어 있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에는 용여홍이 장착한 T1형 기계 팔과 중첩되는 기능이 많아서, 용여홍은 인공지능 갑옷을 택했다.
팀의 실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 구조팀은 이번 임무에 나서기 전, 예전에 얻은 카멜레온 타입의 인공지능 갑옷을 최신형 모델로 바꾸고 검은 늪 철갑뱀 타입 인공지능 갑옷도 한 대 새로 신청한 바 있었다.
즉, 지금 구조팀 네 명은 인간이긴 해도 총 군용 외골격 장치 세 대와 인공지능 갑옷 두 대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애쉬랜드에서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수준이었다.
만약 구조팀이 휴식을 취할 동안, 지프 개조와 트렁크 확대를 신청하지 않았다면 신청한 물건을 차에 다 싣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인공지능 갑옷이 상대적으로 공간을 덜 차지해서 두 개를 한 상자에 넣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구조팀이 가진 장비에 힘입어, 성건우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과연 지능 로봇이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날까?’
백새벽과 용여홍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주위 순찰을 시작하자 장목화와 성건우도 준비에 나섰다. 한 사람은 검은 늪 철갑뱀 타입 인공지능 갑옷을, 한 사람은 AC-45형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했다.
현재 장목화의 최대 능력 범위는 15미터였다. 그래서 그녀는 전신을 덮을 수 있고 방탄 능력도 가장 좋은 데다 밤에는 어둠에 녹아든 듯 잘 보이지도 않는 검은 늪 철갑뱁 타입 인공지능 갑옷을 더 좋아했다.
그 갑옷을 입고 의식까지 숨긴다면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적의 근처에 이르러 능력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태생적으로 깨진 거울 영역의 환각 관련 능력 범위는 장생 영역의 능력 범위보다 훨씬 넓었다.
성건우는 곧 군용 외골격 장치를 다 착용했다. 이제 그는 1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사지 동작 불능과 문학청년-억지쟁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유탄, 레이저 장치, 전자파 무기로 화력도 제압할 수 있었다.
마지막 버틀까지 잘 채운 그는 고개를 들어 장목화, 용여홍을 바라봤다.
문득 그는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꼴이 너무 우스운데요?”
보통 인공지능 갑옷 이름은 외형보다는 기능에 맞춰서 지어졌다.
그래서 지금 장목화한테 뱀의 머리가 달려 있다거나 용여홍이 큰 카멜레온처럼 보인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반고 바이오의 디자이너들은 그 외형도 이름에 맞는 특징을 갖추길 바랐다. 그에 따라 인공지능 갑옷 스타일도 각기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과장된 건 도마뱀 타입 인공지능 갑옷이었다.
그걸 착용하면 정말로 두 발로 선 도마뱀처럼 보였다.
카멜레온과 검은 늪 철갑뱀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카멜레온 갑옷의 얼굴 가리개엔 눈 부분이 유독 튀어나왔고, 철갑뱀 갑옷엔 짧지 않은 꼬리가 하나 달려있었다. 물론 말로는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너무 많이 웃네?”
장목화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성건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물론 화를 내진 못했다. 전에 성건우가 인공지능 갑옷을 시착했을 때 장목화 본인도 그를 마구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네 사람은 그렇게 지프의 사방을 지키며 총성과 폭발음이 완전히 잠잠해질 때까지 건물 밖의 비 오는 풍경을 내다보았다.
* * *
한참이 지나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용여홍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이겼는진 모르겠지만 더 이상 교전할 생각은 없나 봐요.”
성실한 성건우가 대꾸했다.
“나중에 온 무리는 우리 존재를 모를 확률이 높아. 더 이상의 교전을 벌이려 해도 방법이 없는 거지.”
말문이 막힌 용여홍은 뒤통수를 긁적이려다 바로 가만히 있었다.
T1형 기계 팔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카멜레온 타입 인공지능 갑옷의 오른손은 특별히 개조된 상태였다.
용여홍은 그곳에 난 한 줄기 틈으로만 밖으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이를 본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물었다.
“좀 전에 아무 피해도 없이 바로 쫓겨났다는 건 어떻게 된 일이야?”
성건우는 즉각 공략을 포기하고 912호를 선택해 들어갔다가 유람선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장목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참고할 공략이 있는데 굳이 낯선 방에 들어가서 모험을 하려 하다니!
‘맞아, 맞아!’
용여홍도 크게 동조했고, 옆에서 백새벽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성건우는 동료들의 걱정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당연하죠! 만약 계속 공략만 따라가면 별도의 수확을 얻기는, 구세계 파괴 원인과 무심병의 기원, 심령의 복도의 본질을 알아내기 어렵잖아요.
왜, 전에도 그랬잖아요. 만약 우리가 원래 규칙을 따르는 대신 작은 빨강이한테 안방 창문에 매달려 안의 상황을 확인하게 하지 않았다면 302호의 이상 현상을 파악할 수 있었겠어요?”
“⋯⋯.”
멍해진 장목화는 하마터면 성건우 논리에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이성을 되찾았다.
“공략집에 포함된 방이라고 별도의 수확을 얻지 말라는 법은 없어. 101호나 205호처럼 말이야.”
이 대목에서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작은 빨강이한테 자체적인 특수성이 있는 게 아니면, 육식주가 그 방에 들어가자마자 영향을 발휘한 게 아니라면, 누구라도 302호 안방 창문 밖에서 유골과 붉은 이불을 발견할 수 있었을 거야. 이걸 토대로 보면 특정한 장소에서 특별한 무엇을 통해 본다면 신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백새벽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신세계 대문이요. 302호 안방 창문이 그런 거였을 거에요.”
장목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음……. 오늘 밤에는 더 이상 시도하지 말고 뜻밖의 상황에 대비하는 데만 집중하자. 내일 시간이 나면 다시 찾아보고.”
성급한 성건우도 팀장의 말에는 잘 따랐다.
“알겠어요.”
* * *
비가 멎고 바람이 잔잔해지는 가운데 밤은 무사히 지나갔다.
구조팀이 이 폐허 도시를 떠날 무렵엔 구름을 뚫고 햇볕까지 내리쬐었다.
어젯밤의 그 팀도 일찍이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구조팀의 지프는 분노의 호수 쪽으로 몇 시간을 달린 끝에 황량하고 드넓은 평원에 이르렀다.
이곳 근처의 비교적 덜 오염된 강에서 물을 보충하려던 구조팀은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물을 긷고 밥을 짓는 군대를 발견했다.
SUV와 산악자동차 위주의 자동차 총 여섯 대, 인원도 거의 스무 명이었다.
“어젯밤 그 사람들인가?”
장목화가 몸을 틀어 뒷좌석의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수는 대충 맞는 것 같네요.”
지금의 성건우는 진지하고 이성적인 성건우였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그럼 우리는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
이런 상황에서는 최소한 300미터 이상의 거리를 유지해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영향을 받게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구조팀이 강가에 자리를 잡자, 짙은 색의 산악자동차 한 대가 돌연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100미터 정도로 줄어든 그때, 산악자동차 안의 한 사람이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며 목청을 높였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장목화는 생각 끝에 성건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성건우는 곧장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확성기를 꺼내 대답했다.
“비용을 받아야겠는데!”
산악자동차 안의 사람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응했다.
“좋아!”
이후 산악자동차가 점점 가까워지는 동안 용여홍과 백새벽은 트렁크 옆으로 물러나 경계 태세를 갖췄다.
10미터 정도를 남기고 멈춘 짙은 색 자동차에선 양옆으로 enm 명이 내렸다.
둘 다 애쉬랜드 남성으로, 평범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한 사람은 서른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였으며, 얼굴은 각진데다 눈썹은 짙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어려 보이는 다른 한 명은 눈썹이 곧고 콧대가 굉장히 높았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매우 꼿꼿했고, 보폭도 거의 일치돼 있었다.
“이름이?”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가 여유로운 태도로 물었다.
장목화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용건만 간단히 했다.
“묻고 싶다는 게 뭐야?”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레드스톤 마켓까지 얼마나 걸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