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48화 (548/649)

548화. 징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지프는 철강공장 밖의 도로로 돌아왔다.

내내 조용히 있던 장목화는 한참 뒤에야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좀 전에 건우가 설명한 상태를 들으니까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어.”

“뭔데요?”

운전 중이던 백새벽이 호기심을 표했다. 전의 임무와는 달리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전보다 더 많은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장목화가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신세계.”

순간 지프 안이 고요해졌다.

용여홍도 뜻을 이해했지만, 확인 차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팀장님은 신세계가 사실 애쉬랜드와 어느 정도 연관된 채 중첩돼 있고, 대부분은 그걸 못 보고 있을 뿐이라는 건가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쩌면 심령의 복도를 어느 정도 탐색한 사람만이 그걸 감지할 수 있는지 몰라. 그러니까 상응하는 방 안에 신세계의 문이 나타나는 거지.”

백새벽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현실 속 신세계로 통하는 문은요? 그것도 존재하잖아요?”

장목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어. 적어도 이두형 선생님은,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믿고 있지.”

애쉬랜드의 거의 모든 사람은 어느 유적 깊은 곳에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이 무심병과 기아, 변이, 괴물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모든 유적 사냥꾼 역시 폐허에 진입할 때마다 그와 비슷한 기대를 품었다. 그들이 폐허를 뒤지는 건 비단 자원 수집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내 성건우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혹시 그곳이 하나의 접점이었던 걸까요?”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반박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철강공장 출구도 지척에 가까워졌다.

이를 보고 장목화는 대화를 그쯤에서 마무리 지었다.

“건우, 너 옥 부처를 넣어둬. 이따 자세히 연구해보자. 음, 포일이랑 비닐, 종이, 고무 부대를 이용해서 4중으로 단단히 감싸.”

성건우는 그대로 옥 부처를 처리했다.

또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이제 레드스톤 마켓으로 가자. 가는 동안 겐한테 전보를 보래겨오. 망가진 핸드폰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는 도구를 사서 거기서 합류하자고.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진입하기 전에 그 핸드폰에서 유용한 정보나 단서를 얻으면 좋겠다. 그러면 후속 행동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네, 알겠어요.”

용여홍, 백새벽은 아무 이의도 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피커를 꺼낸 성건우는 어떤 노래를 틀지 고심에 잠겼다.

* * *

구조팀이 철강공장을 떠난 지 사흘 후, 한 괴이한 무리가 도착했다.

인원은 예닐곱, 모두 기운 흔적이 가득한 잿빛 옷차림에, 머리는 하나같이 매우 짧게 깎은 상태였다. 겨우 1밀리미터만 남은 수준이라 멀리서 보면 흡사 대머리처럼 보였다.

그들은 일곱 걸음을 걸을 때마다 꿇어앉고 철강공장 용광로를 향해 경건하게 절을 했다. 이상하리만치 신실한 표정들이었다.

그렇게 철강공장에 진입한 그들은 공장 구역을 한 바퀴 돌면서도 꿇어앉아 절을 올리기를 반복했다.

얼마 후, 그들은 가족 2구역에 들어와 4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무리를 이끄는 자는 레드코스트인으로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얼굴에 주름이 많진 않아도 또렷했고 짧게 깎은 머리카락도 희었다.

이 레드코스트인은 기복 없이 잔잔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본래 레드코스트인은 레드리버 유역으로 이주한 애쉬랜드인의 한 분파였다. 피부는 갈색빛에,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구불거렸다.

무너진 4동 건물을 바라보던 그들은 순간 그 자리에 멍하게 멈춰섰다. 한동안 꼼짝할 기미도 보이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무리를 이끌던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징조가 나타났다. 큰 재난이 곧 당도하리라⋯⋯.”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투리 억양이 어린 애쉬랜드어였다.

* * *

저녁 무렵, 퍼붓듯 쏟아지는 비가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하늘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백새벽은 바삐 움직이는 와이퍼를 바라보다 제안했다.

“근처에 크지 않은 폐허 도시가 하나 있던 것으로 기억해요. 오늘은 거기서 묵도록 하죠.”

“좋아.”

장목화는 그녀의 결정에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다.

뒤이어 고개를 숙인 장목화는 지도 두 개를 계속해서 연구했다.

각각 레드스톤 마켓, 아이언마운틴 시티 지도였다.

장목화는 최대한 반복적으로 기억에 새겨 작전 중에 길을 잃을 확률을 최대한 낮출 생각이었다.

한참을 더 나아가던 지프 전방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밤하늘 아래, 웅크린 검은 그림자들이었다.

백새벽이 한창 비를 피하기 적합한 건물을 찾고 있던 그때, 뒷좌석의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쪽에 사람이 있어. 거의 20명 정도.”

성건우의 얘기를 듣고,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제안했다.

“다른 곳으로 돌아갈까?”

이 폐허는 크지 않지만 그건 아이언마운틴 시티나 늪 1호 폐허, 불모지 13호 유적 등에 비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실제로는 구세계 당시 3, 40만은 수용했을 법한 규모였다.

이렇게 큰 곳이라면 두 팀은 각기 다른 곳에 머물며 서로에게 어떤 방해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심지어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물론 용여홍은 구조팀의 실력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지금 같은 실력에 충돌이 발생할 걸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의미 없는 전투가 싫을 뿐이었다.

애쉬랜드에 살아가는 모두의 삶이 너무도 힘겨웠다. 굳이 한데 모여 부딪히며 서로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안길 필요는 없었다.

만약 구세계였다면 이렇게 두 일행이 우연히 만났을 경우 성건우가 바라는 것처럼 함께 친목을 도모하는 만찬회를 열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날 애쉬랜드의 질서는 각 대형 세력의 주요 거점에만 조금씩 존재할 뿐, 그 외의 지역에서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약소함은 곧 원죄가 되었다.

탐욕을 부리는 자 또한 부지기수였다.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며칠 동안 쫄쫄 굶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운전 중이던 백새벽이 옆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조금 기다려보는 것도 방법이야. 저 사람들이랑 거리가 좀 가까워지면 그때 다른 건물로 돌아가는 거지.”

‘음, 대체 왜?’

용여홍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그녀의 의중을 생각했다.

그리고 곧 구체적인 이유를 떠올렸다.

지금 바로 방향을 틀거나 우회하는 건 꽤 온당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 가지 문제가 드러날 수 있었다.

거의 20명 정도 된다는 상대측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없다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만약 있다면 그 역시 난입자가 직선거리로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것을 알아차릴 것이었다.

그럼 그는 자신들 쪽으로 접근 중인 일행 중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있다는 걸, 감지 범위는 150미터 정도란 걸 손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즉, 양측이 접촉하지도 않은 상황에 상대는 구조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실력과 성건우가 가진 능력의 최대 범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백새벽의 말에 따른다면 구조팀은 어느 정도 실력은 있어도 그렇게 과할 정도로 강한 팀은 아니라는 걸 연출할 수 있었다.

상대측도 구조팀에 각성자가 있긴 해도 아직 기원의 바다 급에 불과해서 양측의 거리가 3, 40미터로 좁혀진 후에야 자신들의 존재를 감지한 것이라 여길 것이었다.

그러면 성건우가 가진 능력의 최대 범위도 숨길 수 있고, 구조팀의 실력 역시 한참 낮게 측정되었다.

그런 판단을 내린 뒤 상대편이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는 자명했다.

짝! 짝! 짝!

성건우는 백새벽의 방안에 손뼉을 치며 고상하게 말했다.

“아하, 돼지로 분장해 호랑이를 잡아먹으려고?”

지금 지프는 교차로를 따라 건물 몇 채를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성건우가 감지한 상대와의 직선거리엔 큰 변화가 없었다.

용여홍은 성건우를 살짝 흘기며 속으로만 짧게 탓했다.

‘왜 작은 흰둥이한테 그런 표현을 쓰는 거야? 더 좋은 표현도 많잖아?’

그때, 장목화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작은 흰둥이 너, 전에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당당히 실력을 드러내 상대를 위협하고 불필요한 충돌을 피했었잖아.

저쪽이 우리를 평범한 각성자가 포함된 나름 강한 팀으로 평가한다면, 저쪽에 정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있다면, 저들에게는 우리가 오히려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오히려 더 위험하고 도움도 안 될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는데, 굳이 그 방법을 써야 할까?”

운전하던 백새벽이 말했다.

“근데 그럼 건우가 가진 능력 최대 범위가 드러나게 되잖아요. 그건 각성자한테 가장 중요한 비밀 중 하난데.”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니까 우린 7, 90미터 정도에서 방향을 틀면 돼. 그 정도 범위는 기원의 바다의 한계는 뛰어넘으면서도 심령의 복도 최저 수준이야.

저들은 우리 중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있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려도 건우의 정확한 능력 범위까지 파악하진 못해. 구체적인 능력 범위는 저들 스스로 상상해야겠지. 미지야말로 가장 위협적이잖아.”

잠시 고민해보던 백새벽은 곧 생각을 바꿨다.

“네, 알겠어요.”

이야기를 듣던 용여홍도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그러는 편이 제일 낫겠어. 아무 충돌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구조팀의 각성자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저쪽에 신세계 급 강자가 있지 않은 이상, 결코 승리를 장담하진 못할 거야.

그만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려 할 거고, 신세계 급 강자도 이미 애쉬랜드를 벗어났거나 긴 잠에 빠져 있을 테니 절대로 그렇게 쉽게 만날 수⋯⋯.’

“그만! 머리 굴리는 것 멈춰,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성건우가 갑자기 겁먹은 얼굴로 외쳤다.

용여홍은 그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

그러자 어떤 성건우일지 모를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닌데. 뇌는 자꾸 안 쓰면 녹이 슬거든.”

“…….”

용여홍은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 사람의 합의대로 백새벽은 목표 지점에서 90미터 떨어진 곳에 진입한 뒤 곧장 핸들을 꺾었다.

폐허 도시의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지만, 다행히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사이 한 가지 문제를 고민하던 성건우가 물었다.

“저들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없는,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사냥꾼 팀이나 강도단이라면요?”

용여홍이 뚱하게 답했다.

“⋯⋯그럼 우린 우릴 보지도 않는 사람한테 윙크한 거지, 뭐.”

뒤이어 보조석의 장목화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속담에도 그런 말 있잖아. 신중함에는 지나침이 없고, 차라리 실수하고 말지, 빠트리는 것보단 낫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팀은 조금 전 존재를 감지했던 상대와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비를 피할 건물을 찾았다. 꽤 견고하고 온전한 건물이었다.

다 같이 전기 포트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해결한 뒤엔 성건우, 장목화는 각각 뒷좌석과 보조석에 기대 동시에 잠들었다.

그리고 각자의 심령 세계 안에서 작지 않은 수확을 얻었다.

* * *

일찍이 몇 가지 능력의 응용을 파악한 장목화는 뭇별 홀을 지나 기원의 바다에 진입해 첫 번째 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섬에 오를 때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한참 뒤 자연히 기원의 바다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시작된 지는 거의 두 달이 다 돼가고 있지만 장목화는 아직도 이 두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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