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화. 차이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백새벽은 용여홍과 함께 다시 녹색으로 물드는 옆쪽 풀밭을 가로질러 4동 뒤쪽에 이르렀다.
용여홍은 302호 위치를 확인한 뒤 먼저 나섰다.
“내가 갈게.”
백새벽도 그를 저지하는 대신 당부만 했다.
“조심해.”
“그래.”
용여홍은 용감하게 4동 외벽 앞으로 다가갔다.
원래는 수도관과 가스관 등의 시설을 이용해 기어 올라갈 생각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런 파이프들도 유적 사냥꾼들이 모조리 뜯어간 상태였다.
파이프는 대부분 금속이니 그럴 만도 했다.
용여홍은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뻗었다. 그가 장착한 T1형 기계 팔에는 빨판 기능도 있었다.
해당 위치에 자리한 메탈블랙 색상의 금속 부품을 돌려 누르자 기계손의 다섯 손가락 중간 마디와 손가락 뿌리 부분에서 특수 빨판이 나타났다.
용여홍은 그 빨판을 벽에 붙이고 왼손으로 외벽 틈과 볼록 튀어나온 구조물들을 움켜쥐면서 마치 도마뱀처럼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곧 용여홍은 302호 발코니 밖에 도착했다.
철강공장 건물들은 구세계 당시에도 어느 정도 연식이 있었던 만큼 발코니는 전부 폐쇄식이었고, 안전 난간도 설치돼 있었다.
물론 금속으로 만들어진 난간은 콘크리트와 연결된 부분만 약간 남아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유적 사냥꾼들이 뜯어갔을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들은 수확 철 메뚜기떼보다도 더했다.
용여홍은 깨진 유리창을 통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갈색 마루가 깔린 거실에는 먼지와 얼룩, 쓰레기만 남아있었다. 가치가 있을 법해 보이는 물건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뜯어내기 어려운 데다 땔감 외의 다른 용도는 없었다면 마루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늘 조심성이 많은 용여홍은 일 처리 속도는 느려도 굉장히 세심했다.
아무 문제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도 몇 번이나 다시 반복해서 확인하던 그는 그제야 무전기에 대고 보고했다.
“팀장님, 거실엔 아무것도 없어요.”
장목화는 습관적으로 되물으며 거실에 널린 쓰레기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인지까지 파악한 후에야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옆으로 가서 침실 상황도 한번 확인해봐.”
그녀도 용여홍의 T1형 기계 팔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옆으로 이동한 용여홍은 안방에 딸린 창문으로 천천히 기어갔다.
신중한 그는 좁지만 발을 받칠 수는 있는 곳에 서서, 상태가 엉망인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비바람과 햇볕에 시달린 안방 창문은 매우 더러웠다. 이 두꺼운 잿빛 베일이 덮인 유리론 안쪽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에 이곳을 찾아왔을 유적 사냥꾼들이 유리창 곳곳에 구멍을 내놓아서 다행이었다.
자세를 살짝 고친 용여홍은 그중 나름 큰 편인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고 방 안 상황을 살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더블베드였다.
침대 위엔 붉은색에 용과 봉황의 상서로운 모습을 담은 도안이 수놓아진 이불 세트가 놓여 있었다. 물론 일부는 하얗게 바랜 상태였다.
‘사냥꾼들이 저 이불을 안 가져갔다고?’
용여홍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애쉬랜드 황야에서 이불은 경화의 일종으로 쓰일 정도였다. 메뚜기떼라면 그런 걸 가만히 놓아둘 리 없었다.
의혹에 미간을 살짝 구긴 용여홍은 자세를 다시 조정해 침대 머리맡을 확인했다. 그 순간 그는 몸을 휘청했다. 하마터면 균형도 잃을 뻔했다.
그곳에 하얗고 깨끗한 두개골 두 개가 있었다.
각각 베개 하나씩을 차지한 두개골들은 목뼈와 연결됐을 몸통은 저 붉은 이불 아래에 가려져 있었다. 사실 몸통까지 있을지는 알 수도 없었다.
정말로 있다면 302호 안방 침대엔 유해 두 구가 잠들어 있다는 소리였다.
애써 정신을 차린 용여홍은 얼른 장목화에게 지금 상황을 보고했다.
* * *
무전기를 쥔 장목화는 성건우를 돌아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안방에 시트와 이불이 남아있고, 침대에 유골 두 구가 있대.”
순간 성건우가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네? 전에 왔던 유적 사냥꾼들은 다 시각장애인이었을까요?”
장목화가 인상을 썼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성건우는 곧장 말을 바꿨다.
“설마 다들 깨진 거울 신도였을까요?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이라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없어서?”
동시에 그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힌 후 허공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장목화는 결국 성건우와 토론이란 걸 포기해버렸다.
“302호는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것 같아. 계속 밖에서만 있는 것도 방법은 아니야. 병력 복원본 줘 봐. 안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보게. 넌 여기 남아서 나 계속 보고 있다가 뜻밖의 상황에 대비하도록 해.”
성건우도 굳이 가겠다고 나서지 않고 곱게 접은 병력 복원본을 넘겼다.
장목화가 막 걸음을 뗀 그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흠칫한 장목화는 당장이라도 돌아설 채비를 하다 금세 성건우란 걸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성건우가 전방을 비스듬히 가리켰다.
“이쪽이에요, 이쪽.”
“⋯⋯.”
장목화는 그제야 자신이 301호 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입가로 느릿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성건우가 다른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제가 들어가는 게 낫겠어요. 팀장님이 안방을 찾으려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네요.”
장목화도 이성적으로 그의 말을 인정했다. 얼른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네 뒤를 봐줄게.”
성건우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전술 배낭을 풀더니 육식주를 왼 손목에 찼다. 그리고 장목화에게는 생명 천사 목걸이를 내어주었다.
장목화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도구는 소지자의 실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퇴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내 그녀는 은제 펜던트를 받아들자마자 왼팔이 묵직해지면서 그쪽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대가에는 암묵적으로 인지의 결함도 포함돼 있구나. 생체 공학 의수인데도 마비가 되다니.”
장목화는 조용히 중얼거리다 생명 천사 목걸이를 허공으로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이번에는 오른손이 마비되었다.
장목화에겐 이쪽이 훨씬 유리했다.
* * *
육식주를 착용한 채 병력 복원본을 쥔 성건우는 302호로 향했다.
집에 이르기 전 예의 바르게 노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문은 다 뜯겨나가서 두드릴 수 있는 건 원래 문이 있던 허공뿐이었지만.
거실은 조금 전 용여홍이 한 설명 그대로였다.
대략적인 검사를 마친 후엔, 성건우는 안방으로 다가갔다.
안방 역시 문짝은 없었고, 문틀만 안쓰럽게 남아있었다.
성건우는 육식주를 착용한 왼손을 가슴 앞에 세우곤 낮게 중얼거렸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염불을 왼 후에야 굽힌 몸을 바로 세우고 문틀 쪽으로 접근했다.
안을 들여다본 순간,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도 흠칫 놀랐다.
안방엔 온전치 못한 침대가 하나 있었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비닐로만 싸여 있을 뿐이었다.
붉은 이불이나 시트, 용과 봉황 자수, 두개골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건우는 바로 무전기에 대고 확인한 상황을 팀원들에게 알렸다.
창밖에 붙어있던 용여홍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눈엔 지금도 붉은색 이불이 보였다.
용여홍은 정신을 차리려 기계 팔로 자신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그랬다간 벽에서 그대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의 신체 소질이나 반응 속도, 조정 능력을 감안하면 3층에서 추락해도 큰일은 없겠지만 언제나 만약은 대비하고 경계해야 했다.
용여홍은 10여 초간 다시 안방 상황을 자세히 더 꼼꼼하게 살폈다.
아무리 봐도 달라진 건 없었다.
“팀장님, 이쪽에는 확실히 있어요.”
입구에서 용여홍의 보고를 듣고,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원래 계획으론 그녀는 절대 302호로 들어가면 안 됐다. 장목화, 성건우 모두 집으로 들어가면 다음의 대책이란 게 없었다. 용여홍, 백새벽에게 상황을 알릴 새도 없이 곤경에 빠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결국 까치발을 든 채 302호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강력한 균형 능력을 바탕으로 비뚤어진 자세에서도 안방 입구 앞에 서 있는 성건우를 볼 수 있었다.
장목화는 이제 깨진 거울 영역에 속한 환각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상 현상 같은 건 무엇도 감지할 수 없었다.
물론 스스로 환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비슷한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다른 각성자나 일반인에 비해선 그런 방면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쉬웠다.
잠깐 망설이던 장목화는 전의 자세 그대로 성건우 등에 대고 말했다.
“들어가 봐.”
이미 그럴 생각이었는지 성건우는 손목에 찬 육식주를 한 알, 한 알 굴리며 안방 안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코를 벌름거리던 그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이불이나 두개골은 여전히 안 보이는데,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하네요. 먼지 냄새도 진하지 않고 창가 근처에 비나 해에 퇴색된 흔적도 없어요.”
깨진 지 한참 된 유리창은 햇볕과 빗물로 인해 탁하고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창가 근처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장목화는 몇 초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침대로 가서 비닐을 만져봐. 접촉만 해보는 거야. 작은 빨강이는 무슨 변화가 생기는지 잘 보고.”
어느 성건우일지 모를 성건우는 그 명령에 매우 기뻐하며 만신창이가 된 침대로 빠르게 다가갔다.
“후-.”
병력 복원본을 쥔 오른손에 입김도 한번 불었다.
준비 의식을 마친 그는 매서운 기세로 허리와 등을 굽힌 후, 손바닥을 뻗어 침대 위 구멍이 숭숭 뚫린 비닐을 건드렸다.
지금 창밖에 붙어있는 용여홍이 보기엔 성건우가 용과 봉황이 수놓아진 붉은 이불을 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외의 다른 문제는 전혀 없었다.
용여홍은 얼른 이 상황을 팀원들에게 알렸다.
‘창밖에서 본 광경이랑 방 안에서 본 광경은 크게 다른데,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은 있다는 거지⋯⋯.’
장목화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사이, 성급하고 대담한 성건우는 갑자기 다른 성건우들의 제압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새로운 행동에 나섰다.
병력 복원본을 쥔 오른손으로 침대 위 비닐을 홱 열어젖힌 것이었다.
이를 목격한 용여홍의 눈은 밖으로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성건우가 승급한 지 이미 반년이 다 된 만큼, 구조팀 동료들도 현재 그에게 열 개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여홍도 지금 성건우를 통제하는 게 성급하고 대담한 성건우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렇대도 너무 지나치게 성급하고 대담한 거 아냐? 나중에라도 혹시 우리 팀이 정말로 위기를 맞게 되면 저 성급함이 가장 큰 원인이 될 거야.’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 이 와중에도 용여홍은 절대 안방 내부의 상황을 면밀하게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여전히 성건우가 열어젖힌 것 역시 용과 봉황의 도안이 수놓아진 붉은색 이불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이불 안엔 예상대로 유골 두 구가 자리해 있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두 유골 중, 하나는 녹색 다운재킷을, 하나는 검은색 남성용 면오(棉袄)를 입고 있었다.
둘 다 하의는 상당히 두꺼워 보이는 짙은 색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발에는 양말도, 신도 신겨있지 않았다.
옷만 대강 휙 둘러보면 세월의 흐름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핏자국이나 썩은 흔적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용여홍은 다시금 온 정신을 집중해 계속 유골들을 살피는데, 순간 높은 하늘에 뜬 구름이 이동하며 한 유골 위에서 뭔가가 번득였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녹색 다운재킷을 입은 유골의 가슴팍에 옥 펜던트가 하나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옥은 호수를 방불케 하는 옅은 녹색 빛으로 투명했고, 그 모양은 통통한 부처의 모습으로 조각돼 있었다.
부처!
눈을 휘둥그레 뜬 용여홍은 곧장 무전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