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44화 (544/649)

544화. 증강

녹회색 지프 옆.

성건우가 쥐고 있던 육식주를 내보이며 잔뜩 기대한 눈으로 물었다.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용여홍은 성건우의 바지춤을 살펴보려다 애써 염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당연히 육식주의 부작용을 알고, 정상적인 남자가 육식주를 쥐고 타인과 대화하긴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달라진 데는 없는 것 같은데. 그냥 겉으로 보기엔 그래.”

늘 대범한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전보다 더 반짝거리는 건가?”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많이 문질러서 윤이 나는 거예요. 정답은 원래 일단 목표의 오감을 빼앗아야 의식을 박탈할 수 있는데, 이젠 의식도 바로 박탈할 수 있어요.”

“대단하네!”

용여홍이 감탄했다. 생명 천사 목걸이의 심장 마비에도 뒤지지 않는 능력이었다. 무엇보다 육식주의 능력 범위는 생명 천사 목걸이보다 훨씬 넓었다. 생명 천사 목걸이는 40미터였지만, 육식주는 무려 80미터였다.

성건우는 의기양양하게 육식주를 흔들어 보였다.

“이제 능력 범위는 120미터에요.”

“50퍼센트나 늘었네?”

장목화는 상당히 부러운 눈빛을 했다. 현재 그녀가 가진 도구는 없었다. 물론 육식주와 생명 천사 목걸이는 구조팀의 공공재산이었다. 제8 연구원의 특파원 카오를 처리할 당시 장목화, 성건우의 역할은 똑같이 중요했었다.

그러니 장목화에게도 당연히 사용권은 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두 가지 도구 모두 성건우 손에서 더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었다.

장목화는 앞으로 얻게 될 다른 도구나 성건우가 심령의 복도를 탐색하면서 찾을지 모를 깨진 거울 영역에 적합한 물건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성건우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이래선 세 번밖에 못 쓸 것 같아요.”

전에 성건우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조팀은 육식주에 남아 있는 에너지의 양을 대충 파악한 바 있었다.

당시만 해도 육식주에는 시각 박탈과 의식 박탈을 한 세트로 발휘할 경우 대여섯 번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성건우는 의식 박탈을 바로 사용하면 육식주는 세 번도 채 못 쓰고 평범한 물건으로 돌아가리라 얘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 중요한 순간에 목숨을 구해줄 테니까.”

장목화는 좀 아쉽긴 해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크다고 여겼다.

조금 머뭇거리던 용여홍이 물었다.

“원래 방식대로 쓰면 몇 번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순간 성건우가 찬란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아홉 번.”

그에게 조금 전 낙담의 기색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다른 인격으로 변한 것이다. 성실한 성건우는 금세 나서서 자랑을 시작했다.

“제 능력도 증강됐어요! 거리엔 변화가 없지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스무 명에서 쉰 명으로 늘었어요.”

장목화는 흠칫 놀랐다.

“⋯⋯보리 영역 특징에 잘 어울리네.”

디마르코가 생각나는 능력이었다. 지하 방주의 주인에게는 숙명통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식을 나누어 여러 목표에 빙의시킬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그러니 불가의 성지가 포함된 트라우마를 극복한 성건우라면 영향력 범위 내 목표 숫자도 충분히 늘어날 법했다. 동시에 장목화는 성건우가 이번에 얻은 수확이 일반적인 상황보다 훨씬 더 크다고 보았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522호 방 주인은 당시 저도 모르게 약간 영향을 받았을 거야. 그 영향은 여태 유지되고 있을 테고.”

그 말에 용여홍이 의혹을 표했다.

“그럼 그 사람은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지 못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장목화가 다시 한숨을 길게 뱉었다.

“나도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숙명통의 특징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야. 어느 정도에 이른 숙명통으론 자신의 기운을 타인에게 빙의시키고 트라우마 속에 숨겨놓은 채, 승급을 포함한 목표의 다른 부분에는 영향을 안 미칠 수 있어. 중요한 순간에 이르렀을 때야 활성화되는 거지.”

디마르코, 그리고 성건우가 이번에 겪은 경험과 수확을 떠올린 용여홍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용여홍은 뭔가 한 가지 일이 떠올라 심장이 바짝 졸아들었다.

“방 주인의 트라우마에 남아 있던 기운이 건우의 심령 세계에 몰래 잠입하지는 않았을까요?”

“보아하니 육식주의 동종 기운에 흡수된 것 같아.”

장목화가 별 확신 없는 말투로 답했다.

그러나 성건우는 이미 심령 세계에 다른 기운들이 스며들어 있는 만큼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돌아가서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만약 있다면 수종이랑 나랑 같이 게임 하자고 해야지.”

“⋯⋯.”

장목화도, 용여홍도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장목화가 화제를 전환했다.

“나중에는 철강공장에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아. 방민서라는 환자, 구세계 파괴 이후의 행방을 찾아볼 수 있을지 확인해보자.”

당시 구세계의 파괴를 견뎌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민서가 그때 벌써 죽어버렸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아직은 조사의 희망과 방향이 남은 셈이었다.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도요. 사라진 사진이랑 관련 소개를 찾아봐야 해요.”

지금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가 답했다.

장목화는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그래, 작은 흰둥이가 어느 정도 회복을 마치면 폐허 철강공장을 목표로 야외 훈련 일정을 한 번 더 짜보자.

다음에 새해가 되면 레드스톤 마켓 쪽으로 가서 아이언마운틴 시티로 가는 거야. 그 후에 퍼스트 시티로 가서 불모지 13호 유적 내 호움 난임 센터 탐색 준비를 하는 거지.

이 일들을 마치고 난 뒤에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버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북방의 그 폐허 도시로 가서 전 구조팀의 행방을 찾아볼지 말지 고민해보자. 하하, 올해는 어쨌든 집에서 새해를 맞을 기회를 줄게.”

* * *

항상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백새벽이 회복을 마쳤을 무렵, 유전자 개조를 신청한 용여홍이 거의 바로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보수적이고 신중한 용여홍은 몇 가지 유혹적인 선택지를 포기하고 전체적인 위험도가 가장 낮은 방안을 택했다.

자가 회복 능력 증강, 면역력 강화, 그리고 반응 속도 가속이었다.

이를 보고, 성건우는 아주 짧은 평을 내렸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유전자 개조를 하는 거야?”

그러나 이 보수적인 선택지와 용여홍의 직급에도 불구하고 유전자 개조에 무려 3만 점을 들여야 했다.

위험도가 낮은 만큼 수술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래도 용여홍은 병상에 2주 이상은 누워 있어야 했다.

용여홍이 회복을 마치고 재활 훈련을 통해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었을 때는 이미 신력 48년 1월이었다.

곧 있으면 춘절(春節)이었다.

장목화는 야외 훈련 계획을 포기하고, 폐허 철강공장 탐색에 관한 목표도 다음 임무로 미뤄두었다.

춘절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중에서도 구세계 콘텐츠에 영향을 받은 연말 리뷰 프로그램은 매우 호평을 받았다.

성건우는 어찌나 만족했는지 손바닥이 얼얼해질 정도로 박수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오락부에서 용여홍의 컴퓨터만 빌려 갔지, 성건우 자신의 지도는 받지 않았다는 것, 그게 참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장목화는 가족이 없는 동료 성건우, 백새벽을 배려해 춘절 전날 점심때 구조팀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춘절 당일에도 일부러 짬을 내 팀원들과 가장 시끌벅적한 몇몇 층의 활동 센터를 돌아다녔다.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을 정도였다.

춘절이 지나고, 그 이후의 틈을 이용해 용여홍, 백새벽은 모두 각성 실험에 참여했다. 결과는 둘 다 실패였지만, 다행히 별다른 후유증은 없었다.

* * *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일단 이번 주 애쉬랜드 정세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퍼스트 시티의 신임 집정관 겸 총사령관 가이우스가 두 장군의 직위를 해제하면서 몇 대 군단을 한 층 더 통합했습니다.

화이트 기사단과 구세군은 식량과 유전자 개량 원액의 교환 협의를 달성했다고 합니다.

앳된 목소리가 495층 B구역 196호 방을 채우는 사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 침대에 기대듯 누운 성건우는 매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그는 심령의 복도 탐색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말끔히 씻은 성건우는 공용 화장실로 가 작은 일도 해결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는 전술 배낭을 집어 들더니 필요한 물품을 모조리 그 안에 쑤셔 넣었다.

철컥-

배낭을 메고 문을 잠근 성건우는 열쇠를 챙겨 C구역으로 향했다.

* * *

349층, C구역 12호.

장목화는 늦지 않기 위해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전신 거울 앞에 선 그녀가 나가기 전 모습을 한번 단장했다.

그때, 거울 뒤로 어머니 설수민의 얼굴이 보였다.

완전히 흙빛이 된 얼굴이었다.

“엄마! 깜짝 놀랐잖아요.”

장목화는 이미 엄마의 기척을 눈치챘지만, 아무것도 모른 척 투덜댔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각성 실험을 받았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생각 안 해봤어?”

굳어버린 설수민의 얼굴을 보고, 장목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위험한 일도 아니었는데요, 뭐.”

이미 몇 차례나 반복된 이야기였다. 설수민도 더 이상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힘없이 물었다.

“이번에는 언제 돌아와?”

잠시 머뭇거리던 장목화가 답했다.

“빠르면 7월 전에요. 늦으면 연말에나 돌아올 거고요.”

무심자의 낙원이 된 북방의 도시로 가게 될지, 그 여부에 달려있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장목화가 문을 가리켰다.

“갈게요.”

전술 배낭을 챙긴 그녀는 대문을 나서 어딘가로 방향을 틀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쪽이 아니잖아!”

그러자 설수민이 황급히 딸을 불러세웠다.

장목화가 성급하게 군 걸 반성하던 그때, 벌써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설수민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옷매무새도 정리할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인 어머니는 사실 아무 문제도 없는 딸의 옷을 정리해주었다.

장목화 역시 입술을 꼭 깨문 채 엄마를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 * *

622층, B구역 59호.

백새벽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과 침대를 한 번 더 돌아본 뒤, 한쪽 어깨에 전술 매낭을 메고 방을 나섰다.

쾅!

문은 거침없이 닫혔다.

* * *

495층, C구역 11호.

용여홍이 문 앞에 선 부모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갈게요.”

고홍자는 입을 벙긋거리던 끝에 겨우 말문을 뗐다.

“밖에선 뭐든 조심해야 해. 공연히 먼저 나서고 그러지 마. 너한테도 이제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거 안다. 몰래 유전자 개조 수술을 받았을 정도니 할 말 없지. 우리 말을 꼭 들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원망과 걱정이 엉킨 어머니의 눈을 보며, 용여홍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네, 꼭 그럴게요. 제 능력에 닿지 않을 때가 되면 곧장 전출을 신청할 거예요. 이제는 그럴 자격도 있거든요.”

혹시 부모님이 무슨 말이라도 더 할까 봐, 부모님의 그 눈빛에 마음이 약해질까 봐 용여홍은 재차 손을 흔들며 빠르게 돌아섰다.

* * *

잠시 후, 용여홍은 성건우를 만났다.

성건우는 그를 힐긋 바라보더니 돌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꼴찌가 되면 안 되지!”

쿵쿵쿵!

성건우는 곧 용여홍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친놈.’

용여홍은 속으로만 중얼거린 후, 엘리베이터에서 성건우를 따라잡았다.

647층에 도착하자, 반대편에선 백새벽이 걸어오고 있었다.

“좋은 아침!”

성건우가 제일 먼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꼴찌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은 벌써 다 잊은 모양이었다.

“좋은 아침.”

용여홍이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백새벽도 미소를 그렸다.

“좋은 아침.”

세 사람이 함께 14호에 들어갔을 때 장목화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팀원들이 모두 도착하자, 팀장은 목을 가다듬은 뒤 씩 웃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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