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화. 이변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어찌 된 일인가 하니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며,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식품회사 2층 복도에 덕이 높은 고승의 말씀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로 맑고도 장엄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귀 기울여 본다면 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환자의 진술 및 행동 능력은 정상, 정신 상태도 정상. 현 병력, 최근 7일 동안 매일 아들의 인영이 적어도 한 번씩 보임. 환자의 아들은⋯⋯.”
성건우는 불경을 읊는 듯한 투로 병력 복원본 내용을 줄줄 읊고 있었다. 거기다 ‘금강경’ 단락에 어울리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뜸을 들이거나 단어를 더해가며, 환자 상황을 특수한 어휘로 표현해 장엄한 느낌을 내기도 했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면 그 일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던가?
제도 선사는 그만큼 본인 일에 충실하고 열심이었다.
어색해 보이면 어쩌나 하는 것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충분히 진실한 연기만 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장목화, 용여홍은 이런 기상천외한 시도에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성건우가 있는 이곳은 어느 각성자의 트라우마 속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지, 실제 현실 속의 불가 성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모든 건 방 주인이 보고 들은 것이었고, 그 범위를 뛰어넘은 부분은 그의 잠재의식이 멋대로 보완한 것이었으므로 실제와는 분명 달랐다.
그러니 방 주인이 당시 기이한 사건을 겪고 그에 대한 어느 정도 정확한 자아인지를 가진 게 아닌 이상, 다른 불가 성지인 장하시 연합 철강공장에서 발견한 병력으로는 딱히 특별한 변화를 초래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쉬지 않고 염불을 읊는 반기계 승려 제도 선사의 모습은 점점 장엄해졌다. 동시에 그는 어둠 속에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이 조금씩 또렷해지는 걸, 갈수록 더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시선들은 옆쪽 방, 위쪽 천장, 계단 입구의 어두운 곳, 벽에 묻은 얼룩들까지, 각기 방향도 다양했다. 하지만 성건우는 이 상황에 당황은커녕 기뻐했다. 변화가 곧 그의 시도가 성공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물론 이는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반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변화가 잠재된 단서를 끌어내 더 많은 걸 수확할 수 있다면야 그보다 좋을 순 없었다.
하지만 여태 아무 악의도 없던 이곳이 갑자기 변이로 인해 염불을 읊는 승려를 죽이려 든다면, 성건우는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에서 식물인간이 되거나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일단 구조팀의 계획은 꿈꾸는 성건우의 안색이 돌변할 기미라도 보이면 장목화가 바로 전기 충격을 주기로 되어 있었다. 억지로나마 일부 의식이라도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제도 선사는 연민과 평안을 안고서 병력 뒷면의 내용도 줄줄 읊었다.
바로 그때였다.
유옥로가 들어간 방에서 인영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혼탁하고 흰 자가 잔뜩 충혈된 이들, 무심자였다.
무심자들은 성건우를 공격하지 않고 그의 곁으로 다가와 깨달음을 얻으려는 요괴처럼 그를 빙 둘러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제도 선사가 마무리 염불을 외는 와중, 흰 셔츠에 짙은 파란 재킷을 걸친 유옥로도 복도로 나왔다.
유옥로는 반기계 승려를 보며 그 자리에 멍하니 섰다.
그와 동시에 성건우는 그녀의 눈이 전과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유옥로의 눈동자는 이상하리만치 혼탁했고 흰자위는 잔뜩 선 핏발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도 무심자로 변한 것이었다.
성건우가 막 이런 생각을 했을 무렵, 귓가에 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아앙!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 건물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철근 콘크리트들이 떨어지며 주위의 다른 건물들도 비할 데 없이 시커먼 심연으로 추락했다.
무너져 내린 건 이 건물만이 아니었다. 온 세상이었다.
트라우마가 붕괴하는 이 상황에, 성건우는 청록색 빛들이 식품회사 내부 곳곳에서 날아와 손에 쥔 육식주로 파고드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이변이 사그라들었을 때 성건우는 522호 입구에 서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엔 어스름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패류 생물이 다닥다닥 붙은 여객선이 떠가고, 또 뒤엔 복도와 연결된 문이 자리해 있었다.
* * *
현실 세계, 모닥불가.
장목화, 용여홍은 내내 녹회색 지프 옆에서 그 안의 성건우를 주시했다.
그러던 그때, 코끝에 신선한 냄새가 닿았다.
마침내 가을, 겨울이 떠나고 봄이 건네는 인사였다.
다시 첫발을 뗀 계절에 막 자라나는 풀냄새로 추정되었다.
풀향기에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두 사람은 거의 다 잎이 떨어진 나무에서 연두색 잎이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발견했다. 점점 길어지던 잎은 급기야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자라버렸다.
옆쪽 길에서도 잡초들이 바짝 마른 진흙을 뚫고 나와 이슬을 맺었다.
용여홍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순간, 모든 광경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곳은 여전히 늦가을을 맞은 구산 변두리였다.
장목화는 얼른 차 안의 성건우를 살폈다.
다행히 그도 어느새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짝짝짝!
또 난데없는 박수 세례가 이어졌지만, 장목화, 용여홍은 크게 안도했다.
장목화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박수야?”
성건우는 당당하게 답했다.
“저를 위한 갈채요!”
용여홍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 장목화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성공했어?”
고개를 끄덕이던 성건우는 지프에서 내리며 몹시 부자연스럽게 말했다.
“예, 불법을 경애하는 몇몇 시주님들은 이미 보리에 귀의했습⋯⋯.”
“아이, 진짜. 사람 말로 해.”
장목화가 바로 인상을 쓰며 성건우의 말을 끊었다.
성건우도 진지하게 앉아, 그간의 일들을 고했다. 설법 형식으로 병력을 읊자, 무심자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본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는 걸 있는 그대로, 빠짐없이 다 말해주었다.
물론 무심자로 변한 커리어우먼과 트라우마로 이루어진 온 세상의 붕괴도 잊지 않고 말했다.
“그 여자가 무심자로 변했다고?”
용여홍은 화들짝 놀란 듯 되물었다.
‘설마 그 병력 상 내용이 정말 불교 교리에 포함돼 있어 유옥로한테 붙어있던 귀신을 쫓아내기라도 한 건가? 그게 유옥로에게 무심병을 불러일으킨 거고?’
고민하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랬던 거였는지도 몰라.”
성건우도 곧장 동조했다.
“맞아요. 유옥로는 구세계 파괴 당시 무심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커요. 근데 그 사람이 숙명통으로 그 사람의 육신을 점거한 탓에 일반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죠.”
‘그래, 그게 더 확실히 합리적이고 일리 있네.’
용여홍도 수긍했다.
그러나 장목화는 한 가지 의심되는 부분을 지적했다.
“만약 무심자를 대상으로도 숙명통을 발휘할 수 있다면, 또 장기적으로 그 육신을 점거할 수 있다면 유옥로에 붙었던 사람이 유옥로의 육신이 쇠퇴하면서 같이 죽었을 리는 없잖아. 그 폐허 도시에 무심자는 넘쳐나니까.”
성건우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정말로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용여홍도 토론에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그럼 몇 년 후 식품회사가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한 이유는 뭘까?”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방 주인만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을 수 있어. 무심자에게도 빙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 사람이 그걸 발판 삼아 아이언마운틴 시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고.”
“둘 다 그럴듯하네. 만약 후자라면 어디로 갔을까?”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물었다.
이는 벌써 생각해본 문제인 듯 성건우가 바로 답했다.
“신세계요. 현실 속 신세계의 대문이 있는 곳이요.”
그곳은 이두형이 찾으려 한다는 곳이기도 했다.
“병력을 읊는 방법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니. 그 트라우마 안에 뭔가 숨겨져 있었나 봐. 두 성지 사이에도 충분한 연관이 있었던 거고.”
잠시 침묵하던 장목화는 더 이상 이어나갈 이야기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실질적인 단서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화제를 전환했다.
“병력의 주인 방민서의 아들, 식물인간이 돼 새로운 치료를 받으려고 북방 모처로 보내진 아들이 식품회사 직원 소개란에 비어있던 그 사람일까?”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잠시 고민하던 용여홍이 말했다.
“시간상으로 안 맞아요. 방민서 아들은 구세계 파괴 몇 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됐잖아요. 식품회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신입 직원을 뽑지 않고 그 사람 사진과 소개를 남겨놓고 있었을까요? 보아하니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인 것 같던데.”
그의 말은 설령 방민서의 아들이 식품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한들, 직원 소개란의 사라진 사진과 소개는 그의 것이 아니리라는 뜻이었다. 몇 년이 지났으니만큼 새로운 직원의 사진과 소개가 그 자리를 대체했을 터였다.
“그렇네.”
장목화가 용여홍의 분석에 동조했다.
성건우 역시 반박하지 않고 본인 생각을 덧붙였다.
“방민서가 매일 한 번씩 보기는 했지만 접근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었던 아들, 북방 멀리 떠난 그 아들이 식품회사에 그 어두운 곳에서 느껴지던 눈빛의 주인과 약간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쩌면 그 안에 중요한 연계가 숨겨져 있는지도 몰라.”
그때, 갑자기 또 성건우가 토론을 포기하고 자랑을 시작했다.
“제 육식주에 변화가 생겼어요. 더 강해졌어요!”
지금 성건우는 무슨 성건우일지 알 수가 없었다.
* * *
깊은 밤, 모처의 어느 방.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문득 깨어나 창가로 다가가더니 멀리서 철썩이고 있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 젊었을 때의 일을 꿈꿨다. 너무 또렷해서 누군가 자신의 심령 방에 들어가 트라우마를 건드린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그가 느끼기에 조금 전 꿈과 누군가 자신의 심령 세계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을 때 꾸는 꿈 사이에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순간, 그 꿈을 회상하던 노인의 몸이 굳어버렸다.
아까 전 꿈은 지나치게 또렷하고 똑같아서 꼭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원래는 그리 또렷하지도 않고 개의치도 않았던 기억 속 한 부분이 지금은 머릿속에 구세계 영화가 펼쳐진 것처럼 너무도 선명했다.
네 번째로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로 돌아가 마침내 트라우마를 이겨냈을 때, 노인은 그곳을 떠나며 어렴풋한 인기척을 느꼈었다.
그렇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모든 게 정상이었고, 그곳에 존재했던 이상 현상도 일찍이 흩어져 사라진 후였다.
이 순간, 노인은 드디어 그 기척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가 식품회사를 떠날 당시 그 빌딩 깊은 곳에서 한숨이 흘러나왔었다.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묘한 한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