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42화 (542/649)

542화. 변고

거의 자정 무렵 깨어난 성건우는 심령의 복도에 한 번 더 진입했다.

저장-불러오기 신의 신도로서 이미 여러 번 경험을 해본 성건우는 손쉽게 이전까지의 여정을 되풀이한 뒤,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 5층에 올랐다.

그 후 그는 장목화가 말했던 대로 지체하지 않고 6층으로 돌진했다.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시야가 갑자기 확 밝아졌다.

창밖 보름달이 코앞에 떠오른 듯 이 층을 대낮처럼 비추고 있었다.

멍한 표정의 제도 선사는 동쪽에서 해가 떠오른 줄 알고 하마터면 대비주(大悲呪)를 읊을 뻔했다.

열 명의 성건우 중 지능이 가장 높은 편인 성건우가 바로 결론을 내렸다.

“방 주인이 네 번째로 여길 탐색할 땐 대낮이었나 봐. 그의 트라우마를 유지해주는 잠재의식은 시종일관 황혼일 때를 단번에 한낮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걸 아는 거야. 그래서 일반 수준을 넘는 밝은 달로 대체한 거지.”

곧이어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복도를 따라 한쪽 끝으로 향했다.

이동 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좌우를 살피며 주위를 관찰했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단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성건우는 이곳 빛이 점점 밝아지는 걸 보았다.

창문 근처는 금빛 베일이 드리워진 듯 찬란한 빛으로 밝혀져 있고, 창밖의 보름달은 불에 타는 듯한 주홍빛을 띠고 있었다.

이 변화와 함께 원래 이곳을 잠식했던 억압적인 분위기는 흩어지고, 이제는 상쾌한 느낌이 났다.

성건우들은 이것이 좋은 변화이리라 직감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발아래 깔린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양쪽 벽에 발린 페인트도 조각조각 떨어져 내렸다.

벽의 칠이 떨어지며 드러난 안쪽은 콘크리트도, 벽돌도 아니었다. 벽을 이루고 있는 건 실체가 없는 듯한 어둠이었다.

이를 보자마자 눈동자를 살짝 굴리며 전의 동작을 빠르게 반복한 성건우는 협소한 창틀에 의지해 6층에서 1층까지 한 층씩 내려왔다.

이후 뒷골목에 착지한 그는 반 바퀴를 돌아 출발점으로 내달렸다.

철컥- 철컥-

금속 마찰음 속에 반기계 승려 제도 선사는 흔들리는 대지를, 타오르는 하늘을 느꼈다. 주위에 자리한 건물들은 하나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안에 숨어있던 무심자들은 허상으로 퇴화했다.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 출발점으로 돌아온 성건우는 곧바로 522호 방에서 빠져나갔다.

“헉! 헉……. 놀라라. 하마터면 클리어할 뻔했네.”

복도로 나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성건우의 얼굴에 아직 다 못 놀았다는 듯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갔다.

* * *

현실 세계.

몸을 일으켜 세운 성건우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벌써?”

용여홍이 의혹을 표했다.

성건우가 잠든 지 겨우 15분이 지났다. 그가 전에 한 설명을 보면 15분이면 기껏해야 외부 여정을 마치고 막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도착했을 만한 시간이었다.

장목화도 곧장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건우는 식품회사 6층에서 겪었던 일과 그 이후에 생겼던 변화까지 한번 설명한 뒤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 달리기가 빠르니 망정이었죠!”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근데 왜 난 좋은 일이란 생각이 들지? 전체적인 변화의 추세가 꼭 어둠을 몰아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쩌면 클리어한 건지도 몰라요.”

성건우는 마치 게임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라도 한 것처럼 대꾸했다.

장목화, 용여홍도 게임을 한 적은 없지만 뜻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곧이어 장목화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추측에 나섰다.

“방 주인은 네 번째로 식품회사를 탐색했을 때 마침내 6층, 7층에 올라갔는데 도중에 그 여자나 백골을 발견하진 못했고, 동시에 그곳을 감싸고 있던 기이한 분위기도 사라진 걸까?

식품회사 내부의 기이한 현상이 자기한테 아무 악의도 갖지 않았다는 점과 전에 있던 갖가지 상황을 결합한 끝에, 마침내 상응하는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그 두려움으로 이루어진 섬을 극복한 걸까?”

장목화의 추측을 기반으로, 용여홍은 한발 더 나아갔다.

“외부자가 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면 해당 광경이 완전히 무너지는 식으로 표현되는 건가?”

“아마도.”

성건우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럼 넌 왜 도망친 건데?”

용여홍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성공의 문턱 앞에 이르러 성건우는 바로 돌아서 도망쳐 나왔다. 원래는 갖은 고생을 해가며 트라우마를 극복할 단서와 방법을 찾지 않았던가?

이내 어느 성건우일지 모를 성건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넌 몰라. 사이드 퀘스트를 다 완료하지 않고 어떻게 메인 퀘스트만 완료할 수 있겠어? 지금 극복해버리면 식품회사라는 그 장소를 낭비해버리게 되잖아. 그 안에 가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봐봐, 사라진 사진과 그에 상응하는 직원 소개는 누구 것일까? 왜 누군가가 뜯었던 거지? 그 여자 목소리는 왜 눈을 감고 들으면 남자 목소리로 착각할 정도로 걸걸했을까?

그 여자는 처음으로 방 주인을 봤을 땐 겁에 질려 허둥지둥 도망쳤었어. 근데 몇 년 후에 방 주인을 다시 봤을 땐, 침착하게 나가란 한마디 말로 방 주인을 쫓았어. 그 이유는 뭘까?

또 그 여자는 왜 죽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살 하나 남지 않았을까? 방 주인이 네 번째로 탐색하러 왔을 때 그 유해도 보이지 않았던 건 왜지?

주위 무심자들은 감히 그 구역에 진입도 못 하는 데 식품회사 안에는 어째서 몇몇 예외가 존재했던 걸까?”

성건우가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줄줄이 늘어놓은 의문에 용여홍의 머릿속도 뒤엉켰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근 십만 개의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짚이는 게 있는데, 불가의 5대 성지라는 점에서 비롯한 추측이야.”

성건우가 아니, 성건우들이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뭔데요?”

장목화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어쩌면 구세계가 파괴됐을 당시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있던 어떤 직원이 자극받아 갑자기 각성한 건지도 몰라. 그것도 보리 영역으로.

아마도 남자일 것 같은데, 그 남자가 장악한 능력은 숙명통, 의식 박탈, 육도윤회일 거야.

구세계 파괴 당시 재난 속에 디마르코처럼 육신을 잃은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숙명통에 의지해 억지로 여자 동료 유옥로의 육신을 점거한 거지.

이러면 유옥로라는 여자가 왜 남자 목소리를 가졌는지 설명이 돼. 어둠 속 기이한 눈빛의 존재도.”

이것들은 전부 현재 그들이 가진 자료에 기반한 추측이었다.

용여홍도 들으면 들을수록 되게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짝짝짝!

성건우 역시 박수로 화답했다.

어김없는 박수 소리에 장목화가 성건우를 한번 흘겨본 후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 사람은 몇 년간 다른 사람이랑 접촉하지도 않았고, 본인 능력을 또렷이 파악도 못했어. 그래서 방 주인이 처음으로 그곳에 진입했을 때는 겁을 먹고 도망친 거야.

외부 상황을 알지도 못했고 자기 실제 신분이 드러날까 무서웠던 거지. 그래서 직원 소개란에 붙어있던 자기 사진이랑 관련 설명도 떼어버렸고.

그리고 방 주인이 세 번째로 탐색하러 왔을 때, 틈을 타 숙명통으로 상대를 몰래 기습한 거야.

물론 그때까지는 사람을 실제로 죽여본 적이 없었을 테니 감히 목숨까지 빼앗을 엄두는 안 났을 거야. 숙명통으로 상대를 기습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 안전한 밖으로 옮겨놓은 건 그 때문이고.

하지만 방 주인이 두 번째 탐색을 왔을 땐 그 남자도 이젠 자기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어. 그래서 더는 겁먹지 않았지. 남자는 아주 손쉽게 상대 의식을 박탈하고 방 주인을 내보냈어.

근데 안타깝게도 남자는 정신과 신체가 서로 부합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신체가 빠르게 늙어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거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주위에 더 이상 대체재로 선택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유옥로의 육신을 따라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방 주인이 세 번째로 식품회사에 찾아왔을 때 그 남자 의식은 이미 흩어져 사라졌어. 정신이나 약간의 기운만 남아서 귀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소동을 일으킨 거야.”

장목화의 추측은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아울렀다. 용여홍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설명이라 생각했다.

이번에 성건우는 손뼉을 치는 대신 진지하게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장목화는 그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바로 자문자답하듯 말했다.

“잠깐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어. 불가의 성지인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특수한 뭔가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남자 직원을 보리 영역 각성자로 각성하게 한 걸까?

아니면 그 남자가 남긴 기운이 그곳을 바꾸었기 때문에, 훗날 그곳을 탐색한 수정의식교 승려가 그곳을 하나의 성지로 여기게 된 걸까?

혹시 그 남자가 바로 보리의 화신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그 남자는 일찍이 이 세상에 강림한 보리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던 걸까?”

용여홍은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겁이 났다.

하지만 성건우는 기대된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기회가 생기거든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한번 가봐야겠어요.”

장목화가 답했다.

“응,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역시 그곳에 가봐야 찾을 수 있겠지.”

“그래서 저도 마지막 순간에 그 트라우마를 클리어하지 않고 조금 더 탐색해보려고 남겨둔 거예요.”

장목화는 다시 성건우의 말엔 대꾸도 하지 않고 핵심을 질문했다.

“첫째, 방 주인이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하고,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면 너도 계속 탐색한다 한들 얻을 수 있는 게 없어. 둘째, 혹시 갑작스러운 숙명통과 의식 박탈에 저항할 방법이 있어?”

성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를 기습한 게 누군지 감지조차 못했어요. 당시 방 주인처럼요.”

이는 범위형 능력으로도 상대를 커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장목화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계속 탐색하기는 엄청 어려울걸.”

그때, 성건우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저한테 나름의 묘책이 있어요.”

순간 장목화는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얘 또 무슨 화를 자초하려는 건 아니겠지?’

“뭔데?”

성건우는 팀원들에게 계획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장목화와 용여홍은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너무 기상천외한, 범인은 생각도 못 할 계획이었다.

* * *

한 차례 더 휴식한 성건우는 다시 심령의 복도로 돌아가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이르렀다.

바로 2층으로 올라간 그는 복도 끝에 다다라서는 어둠에 숨어 발걸음 소리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커리어우먼 유옥로가 3층에서 내려오더니 성건우 측전방에 자리한 방으로 들어갔다.

부스럭부스럭-

소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성건우는 손전등 스위치를 켠 뒤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뒤이어 그는 한 손으로는 육식주를 굴리고, 한 손으로는 또 다른 5대 성지 중 한 곳인 장하시 연합 철강공장에서 찾은 병력 복원본을 들었다.

노란색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반기계 승려 제도 선사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나무아뇩다라 삼먁삼보리, 성명 방민서, 성별 여, 연령 52세, 기혼, 주소 가족 구역 2구역 4동 302호⋯⋯.”

그는 마치 설파하는 듯한 자세로 병력의 내용을 불경처럼 줄줄 읊었다.

두 성지가 이런 방식으로 충돌했을 때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지 확인하는 것, 이게 바로 성건우의 기상천외한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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