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옛 친구 (2)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양범석은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들 승진을 했다니.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낸 모양이군.”
D8급 행동 대대 대장인 그는 D8에서 D9까지 승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양범석은 지금의 직급에 이른 지 5년이 넘었지만, 작년에 그와 마주쳤을 당시의 장목화는 겨우 D6에 불과했었다.
“목숨을 바쳐 얻어낸 겁니다.”
성건우가 용여홍의 기계 팔을 가리켰다.
양범석도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 동료가 한 명 더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여자 동료는⋯⋯.”
“유전자 개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입니다.”
용여홍은 혹여나 양범석의 입에서 뭔가 불길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은 두려움에 얼른 나서서 이야기했다.
원래는 구조팀과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눌 생각이었지만, 양범석은 자못 의기소침해져서 애써 예의만 차렸다.
“우린 이만 회사로 돌아가 쉬어야 할 것 같아. 무탈한 여정 되길 바라네.”
“예, 내일 봅시다!”
성건우는 언제나처럼 매우 예의가 발랐다.
장목화 역시 미소를 머금은 채 대꾸했다.
“내일 보시죠.”
* * *
양범석 대대와 헤어진 후로 황야에 진입한 구조팀은 물이 인접한 곳에 야영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늘은 아직 밝았지만 성건우는 곧바로 육식주와 생명 천사, 병력의 복원본을 가지고 심령의 복도에 들어갔다.
* * *
아이언마운틴 제2 식품회사.
2층 계단 입구 어두운 곳에 웅크려 있던 성건우는 복도 끝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조용히 3층으로 향했다.
성건우는 미리 정한 방안에 따라 3층에 오래 머무르는 대신, 방 주인이 첫 번째 탐색 때는 이르지 못했을 4층으로 향했다.
복사 붙여넣기로 만들어진 듯한 계단으로 올라가니, 양옆에 자리한 방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이 단숨에 적잖게 어두워졌다.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한 상황이었다. 이 트라우마가 시작된 시간도 곧 어둠에 젖을 황혼 무렵이었으니 밤이 깊어지는 것 자체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창밖 하늘엔 달도, 별도 없었다. 그야말로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상식적으로 이런 환경이면 반고 바이오의 소등 시간처럼 뻗은 손조차 보이지 않는 게 옳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출처를 알 수 없는 약간의 빛이 식품회사 안을 비추며 어둠에 잠긴 사물들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방 주인의 잠재의식이 이 광경을 보완할 때 특정 디테일에 작은 문제가 생긴 듯하군요.”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파이프를 꺼내 입가에 대더니 두어 번 냄새를 맡았다.
이후 파이프는 사라지고, 손전등을 쥔 성건우는 복도를 따라 한쪽 끝으로 천천히 향했다.
조금 전에 발견한 건 방 주인이 식품회사를 두 번째로 탐색했을 때의 기억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계속 걸음을 옮기던 때, 갑작스레 뭔가를 느낀 성건우가 손전등 빛으로 옆에 붙은 어느 방을 비췄다.
그 안에 인영이 하나 있었다. 흰색 여성용 셔츠에 짙은 파란색 재킷을 걸친 여자, 원래대로라면 2층에 있어야 할 커리어우먼이었다.
빛기둥 아래 드러난 그녀는 전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언뜻 확인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검은색이고 생김새도 여전히 20대로 보였지만 얼굴 근육이 많이 늘어졌고, 팔자주름도 좀 짙어져 있었다.
성건우가 상대를 붙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막으려는데, 커리어우먼이 잔뜩 충혈된 눈을 돌려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두려움, 공포, 공황, 혼란 등의 반응을 보였던 전과 달리 지금의 그녀는 침착했고, 조용했고, 덤덤했다.
“이래야 맞지!”
탁!
성건우가 왼손으로 소리 나게 손전등 옆쪽을 두드렸다.
이게 바로 그가 상상했던 최종 보스의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맞은편의 커리어우먼이 입을 열고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나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성건우는 심지어 꿈도 꾸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느릿하게 정신을 차린 성건우는 다시금 앞문이 열린 차와 뚝 떨어져 내린 간판을 보았다.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방 주인의 두 번째 탐색도 실패인 건가⋯⋯.”
성건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아까 겪은 일은 분명 방 주인이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를 두 번째로 탐색했을 때 겪은 일일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첫 번째 탐색과 상황이 다른데 또 이렇게까지 선명할 수는 없었다.
잠재의식의 자체적인 보완일 뿐, 방 주인의 실제 경험이 아니었다면 성건우는 전에 그랬듯 몸이 굳고 사고가 멈춰 계속 벽에 머리를 박았을 터였다. 그것만큼 자연스럽고 간편하게 에너지를 절약할 보완은 없었다.
몸 상태를 살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성건우는 곧장 522호를 나가 현실로 돌아가는 대신 다시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숨었다.
이번에 그는 단번에 세 개 층을 관통하는 데 그치지 않고, 4층에도 얼마 머무르지 않았으며 즉시 5층으로 올랐다.
방 주인이 이곳에 세 번째 탐색을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5층 구조는 2층, 3층, 4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창밖에서 스미는 빛은 태양이 완전히 떠나기 직전 마지막 빛을 뿜을 때처럼 좀 더 밝았다.
이에 따라 손전등을 끈 성건우는 자연광에만 기대 복도 양쪽에 붙은 방들을 하나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문패들이 붙은 방들은 각기 다른 회사였다. 성건우는 구세계 콘텐츠를 섭렵한지라 딱히 의아함은 느끼지 않았다. 되레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는 이 건물 전체를 쓴 게 아니었네. 5층 이상은 다른 회사에 임대를 놓은 거야.’
[상생 테크] [화이트오션 석유 아이언마운틴 시티 지부] ⋯⋯
회사들의 이름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성건우가 손전등을 켰다.
노르스름한 빛이 흔들리는 와중, 그는 곁눈에 어린 뭔가를 발견했다.
측전방에 자리한 어느 방 안에 백골 한 구가 있었다.
광택을 번득이는 이 백골에는 남은 살점이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더 기이해 보였다.
또한 백골은 흰색 셔츠에 짙은 파란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이를 보고 육식주를 굴리며 낮게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미인도 결국은 백골로 돌아가니 만물은 허무하고 의식만이 진실한 법.”
제도 선사는 엄숙하게 예를 갖춘 뒤, 느릿하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재킷 안쪽, 흰색 셔츠 위에 걸린 플라스틱 케이스에 사원증이 들어 있었다. 성명, 직책과 사진도 함께였다.
[유옥로 / 판매부장 / 직원번호 : 100482]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쪼그려 앉아 짙은 파란 재킷 주머니를 뒤져보려 했다.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백골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두껍고, 미끈거리고 기이한 문양으로 뒤덮인 한 가닥 촉수였다.
촉수는 다름 아닌 백골 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거의 동시에 성건우는 어둠 속에서 그를 주시하는 시선이 급증하는 것을 감지했다. 시선은 이제 사방팔방에서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벽에 난 시커먼 구멍들을 보았다. 그 구멍 안에서 각양각색의 눈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무릎에 힘을 줘 훌쩍 뛰어오른 성건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난 창문을 향해 돌진했다.
그 사이 곁눈으론 조금 전 그 백골을 살폈다.
백골은 순간 어디서 났는지 모를 사람의 피부로 덧씌워지더니 전의 그 커리어우먼으로 돌아갔다.
달라진 점은 지금 그녀의 옷은 마치 피부 위에 그려진 듯했고, 아래에선 검고 통통한 촉수들이 계속 튀어나와 성건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쿵! 쿵! 쿵!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달리던 성건우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 창문을 깨고 5층에서 바로 뛰어내렸다.
4층에 튀어나온 좁은 창틀에 정확히 착지한 반기계 승려는 차례로 펄쩍펄쩍 뛰면서 빠르게 식품회사 뒤쪽 골목길로 내려섰다.
제대로 서기도 전에 위를 올려보니, 마치 온 건물이 살아난 것만 같았다.
끽- 끽-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는 건물에서는 하나씩 입을 벌리듯 창문이 열리고 있었다.
쾅! 쾅!
하지만 요란한 소리가 번져도 인간의 의식은 찾을 수도 없고, 도구와 각성자 능력을 사용할 목표를 찾을 수도 없었다.
성건우는 황급히 다리를 놀려 계속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렇게 반 바퀴를 돈 후, 그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헉……, 헉……, 헉…….”
진탕 고생하니 반기계 승려인데도 성건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 상황에 냉정하고 이성적인 그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일단 나갑시다. 좀 쉰 다음에 다시 돌아옵시다.”
* * *
녹회색 지프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 세워져 있었다. 창문으로는 끊임없이 날름거리는 불꽃이 비치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경계하고 있던 장목화, 용여홍은 곧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성건우를 발견했다.
장목화는 곧장 그에게 물었다.
“어때?”
그리고 용여홍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별일은 없었던 것 같네.’
성건우는 모닥불 쪽으로 다가와 앉은 뒤, 조금 전 일을 그대로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장목화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방 주인은 그 식품회사를 한두 번 탐색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두 번째 탐색에서는 의식을 잃고 출발점에서 깨어났으며, 세 번째 탐색에서는 그곳의 기이함에 놀라 냅다 도망쳐 버린 모양이었다.
용여홍은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에 미간을 구겼다.
그로부터 몇 초 후, 그가 확신 없는 말투로 물었다.
“식품회사의 이상 현상이 방 주인에게 큰 악의를 품진 않은 것 같죠?”
그러지 않았다면 방 주인이 그곳을 두세 차례 탐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진작에 죽고도 남았을 테니까.
간단한 일이었다. 그의 몸이 굳고 사고가 멈춰 벽에 머리를 박을 때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다시 깨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의식을 잃은 그에게 모종의 힘을 가해 출발점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무심자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던져버렸어도 되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방 주인도 그 점을 알아차렸을 거야. 그러지 않았다면 감히 그 폐허를 여러 차례 탐색하려는 엄두는 못 냈었겠지.”
성건우도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저도 깨어난 뒤 바로 식품회사로 돌아갔던 거예요.”
장목화는 계속해서 분석을 이어나갔다.
“네가 관찰한 걸 보면 방 주인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탐색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있었던 것 같아. 유옥로라는 그 기이한 여자는 조금씩 늙어가다가 결국 죽어서 백골로 변했잖아.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사람이 부활할까요?”
성건우의 생각은 역시 범상치 않았다.
장목화도 살짝 흠칫했다.
“엄청 무섭겠는데. 오늘 첫 번째 탐색에선 바로 혼절했다고 했지? 그거 의식 박탈이랑 좀 비슷하지 않아? 그리고 두 번째 탐색에서 마주친 기이한 일은 육도윤회의 응용 아닐까?”
짝짝짝!
성건우는 박수를 쳤고, 용여홍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연 불가의 5대 성지답네⋯⋯.”
곧이어 성건우가 지프를 가리켰다.
“한숨 자고 다시 시도해 볼게요.”
장목화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 6층, 7층도 한번 가 봐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