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출발점으로
다음 날 오전, 647층 14호.
성건우는 일찍 출근한 장목화에게 어젯밤 일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곧장 분석을 돕기보다 성건우의 생각부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성건우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꼭 컷신에서 살해당한 느낌이랄까요? 전혀 저항할 수가 없었어요.”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한 거 아니냐?’
물론 이건 순전히 속으로만 삼킨 말이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장목화는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방 주인도 당시 그런 일을 겪은 거 아닐까? 안 그럼 너도 그렇게 또렷한 경험을 하진 못했을 거 아냐. 만약에 그 사람이 식품회사에서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면, 대량의 무심자로 인한 트라우마는 안전 구역에 진입했을 때 이미 다 끝났을 거야.”
장목화의 분석을 듣고, 용여홍도 토론에 끼어들었다.
“3층에서 그 여자를 놀라 달아나게 하고 직원들 사진을 본 방 주인도 갑자기 머릿속이 굳어버리고 몸을 통제할 수 없어져서 벽에 머리를 박았을 거라고요?”
성건우도 그 흐름에 따라 추측을 이어갔다.
“그럼 머리를 박고 기절한 다음은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까요?”
장목화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아니겠지.”
어리둥절해져 버린 용여홍을 보고, 장목화가 더 자세히 설명했다.
“건우가 며칠에 걸쳐 그 트라우마를 탐색하는 동안 찾은 완전한 노선은 하나뿐이야. 만약 방 주인도 출발점으로 송환됐다면, 그 후에도 같은 길로 제2 식품회사로 향했겠지?
근데 이건 논리상 엄청나게 모순이 있어. 너라면 그 무서운 일을 겪고도 다시 제2 식품회사로 갔겠어? 당시 그 사람은 각성자도 아니었는데?”
“그렇죠.”
용여홍이 동조했다.
성건우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에 잠긴 성건우는 또 어떤 성건우일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장목화가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방 주인은 기절한 다음 아이언마운틴 시티 폐허의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것 같아. 깨어난 후엔 안전하게 빠져나갈 노선을 발견하고 그 노선을 통해 해당 구역을 빠져나간 거지.
그전에 겪은 일은 트라우마로 남은 거고, 그 후에 발생한 일은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건우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거야.”
꽤 그럴듯하단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던 용여홍이 순간 미간을 구겼다. 그는 그대로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 트라우마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는 거 아냐?”
방 주인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성건우가 여전히 생각에 잠겨 답을 잊은 사이, 장목화가 웃었다.
“아니지, 아니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니까. 방 주인이 당시엔 각성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었어? 그 후 섬을 극복하는 동안 그는 반드시 그 트라우마를 마주해야 했을 거야. 지금의 그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잖아. 그렇다는 건 그가 해당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얘기지.”
용여홍은 장목화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를 보며, 장목화는 다시금 중점을 짚었다.
“그럼 그 사람은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이런 문제는 현장으로 돌아가 당시의 두려움을 직면하기 전까진 그걸 이길 방법이 없어. 그러니까 그 사람은 분명히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로 돌아갔을 거야.
건우가 방 주인이 첫 번째 탐색에서 접촉하지 않았던 곳을 찾아낼 수 있다면 두 번째 경험을 드러낼 수 있도록 그 사람 잠재의식을 압박해 당시 상황을 재현할 수 있을 거야. 기회는 그 안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커.”
용여홍도 장목화의 말에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복잡하네. 근데 확실히 일리는 있어 보여.’
내내 조용하던 성건우도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다음번에 한 번 시도해 보죠.”
장목화가 웃었다.
“어쨌든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란 걸 잊지 마. 다른 가능성도 있어. 트라우마가 유동적일 가능성.
모종의 사물은 더 무서운 것과 연결돼 있어서 탐색자와 접촉한 순간 여러 골칫거리를 초래할지도 몰라. 이건 방 주인이 당시 마주하지도 않았던 문제지. 아니, 마주하기는커녕 감지하지도 못했을 거야.
근데 그래서는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됐는지 설명이 안 돼.”
용여홍은 장목화가 제기한 새로운 가능성은 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다는 건 방 주인의 심령 세계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는 거 아닌가요? 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간섭하고 싶다면 간섭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 사람은 무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인데요?”
그 말대로면 방 주인은 그 무시무시한 무언가의 꼭두각시 같은 꼴이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실제로 그럴 확률은 낮아. 가짜 신부의 상태로 볼 때 방 주인이 정말로 각성자가 되지 않았거나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기 전에 인지하지 못한 뭔가에 영향을 받았다면, 자기 자신을 포용해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진 못했을 거야.
근데 또 우리가 아는 관련 지식은 충분하지 않으니까 어떤 확신을 할 수는 없지. 특수 상황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성건우도 이번에는 바로 동조했다.
“맞아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심령의 복도 안에서 다른 각성자를 마주치지 않는다지만 또 예외가 있는 것처럼요.”
그가 말하는 심령의 복도란 어둑한 노란색 카펫이 깔린 복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일 뿐, 그 양쪽에 딸린 방까지 포함하지는 않았다.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여전히 그 방은 포기하고 다른 방을 대상으로 연습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좀 전에 말한 그 방법대로 해봐.
음, 그리고 그 기이한 여자는 최대한 피하는 게 낫겠어. 갑자기 몸이 굳어서 벽에 머리를 박는 상황을 피해야 하잖아.
그 후에 기회를 봐서 4층, 5층, 6층, 7층도 한 번씩 돌아보는 거야. 방 주인은 식품회사를 처음으로 탐색했을 때 거기까지 가보진 못했을 거야. 그러니 네가 그곳에 진입한다면 그 사람 잠재의식이 기억 속에서 관련된 부분을 취해서 재현해주겠지.
상응하는 기억은 그 사람이 두 번째, 심지어는 세 번째로 탐색했을 때일 테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장목화가 이렇게 단언하는 건 방 주인이 처음으로 제2 식품회사를 탐색했을 때 3층에서 의식을 잃고 기절한 것이 분명해 보여서였다.
“알겠어요.”
성건우가 바로 손을 들어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에 용여홍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 당장 시도해 보려고?”
성건우는 조용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니, 그냥 머리가 아파서 그런 건데.”
어젯밤 그 일을 겪고 난 후의 후유증이었다. 비교적 경미한 편이니 며칠 더 지나면 나아질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장목화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머리가 아프다면 앞으로 며칠은 좀 쉬는 게 낫겠어. 이제 적응 훈련을 위한 인공지능 갑옷을 신청할 거거든? 그다음에 다시 시도해 봐.”
그런 훈련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상으로 나가야 했다.
“왜요?”
용여홍은 원래 왜 백새벽을 안 기다리느냐고 물으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처음 생각한 질문은 뚝 끊겨 버렸다.
장목화가 성건우를 보며 답했다.
“그 트라우마에 분명 이상한 데가 있어. 건우가 계속 탐색을 이어가다간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정말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회사 내에 강자가 많다 한들 바로 반응하기는 어려울 거야. 너희가 사는 곳의 인구 밀도가 꽤 높은 편이기도 하고.
그런 기이한 일이 외부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인 건우는 괜찮을지 몰라도 주위 이웃들은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이건 그야말로 주거 구역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다르지 않아. 그런 상황을 피할 방법이 있다면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지.”
용여홍은 뭘 되물을 겨를도 없이 장목화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그와 그의 가족들도 넓은 의미에선 성건우의 이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얼른 신청하시죠.”
성건우는 곧장 장목화를 채근했다. 성급한 그는 언제나 초조한 편이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잠자코 눈동자만 살짝 굴렸다.
“근데 있잖아, 몸이 굳고 사고가 경직돼서 벽에 머리를 박던 순간, 다시 한번 떠올려 봐. 어딘가 좀 익숙하지 않아?”
성건우는 당연한 걸 뭐하러 묻냐는 듯 답했다.
“숙명통이요. 그때 디마르코가 그랬잖아요.”
장목화가 손을 들어 입꼬리를 눌렀다.
“그렇지. 근데 불가의 5대 성지 중 한 곳에서 숙명통을 마주하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아서⋯⋯.”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일을 시작했다.
장목화가 인트라넷을 통해 인공지능 갑옷 신청을 다 마친 후, 잠시 머뭇거리던 용여홍이 물었다.
“오늘도 먼저 작은 흰둥이부터 보러 갔다가 단련하나요?”
용여홍은 백새벽이 감호 병실에서 일반 병실로 이동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란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던 장목화가 이내 웃으며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좋아, 좋아. 야, 봐라, 좀 봐. 작은 빨강이가 얼마나 세심해? 작은 흰둥이 관찰 기간이 오늘로 끝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고.”
“저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절대 지지 않으려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근데 왜 먼저 얘기 안 했어?”
“그럼 팀장님 체면이 뭐가 돼요? 꼭 팀장님이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잖아요.”
유약하고 겁 많은 성건우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다.
순간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돌아보았다.
장목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런 사람이냐? 내가 얼마나 마음이 넓은데! 가자. 시간 잡아먹지 말고, 안 그럼 새벽이 병실도 벌써 옮겨져 있겠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우뚝 멈춰선 장목화는 갑자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용여홍은 약간 긴장이 되었다.
“왜 그러세요?”
장목화는 호탕하게 웃었다.
“갑자기 뭐가 좀 생각나서. 이따 돌아와서 해결하면 돼.”
그녀는 그제야 정확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성건우는 뭔가 깨달은 듯 턱을 매만지며 웃었다.
* * *
지하 빌딩 12층, 어느 연구소.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은 창문 앞에 일자로 서서 백새벽에게 인사했다.
한바탕 요란한 인사가 끝난 후에야 담당 연구자가 입을 열었다.
“환자 체내의 각종 반응은 이미 안정됐습니다. 이제는 한동안 자체적인 회복을 해야 합니다. 이론상 유전자 붕괴의 위험은 더 이상 없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떤 상황에서든 예외는 있는 법이라⋯⋯.”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사실에서만큼은 예외가 없죠.”
성실한 성건우가 곧장 답했다.
뒤이어 그는 그 자신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영생인이 그 예외지!”
“그래 봤자 몇 년이잖아? 수백 수천 년 후에 영생인의 의식 역시 감퇴 될지 어쩔지 누가 알겠어?”
연구자는 조용히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그냥 성건우를 없는 사람 치부한 채 장목화와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아무튼 환자는 앞으로도 많은 보조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야 병실을 떠날 수 있다는 건 수술 후에도 말씀드렸었죠?”
용여홍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네, 그때 대략 한 달 정도 걸릴 거라고 말씀하셨죠?”
연구자가 답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백새벽씨가 선택한 개조엔 자체 회복 능력 증강도 포함돼 있었고, 지난 며칠 간 효과도 굉장히 또렷했습니다. 저희가 제공할 각종 재활 수단까지 더해진다면 2주, 심지어는 그보다 더 빨리 정상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어떻게 정상인입니까?”
성건우가 바로 딴지를 걸었다.
순간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답하긴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