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38화 (538/649)

538화. 사진 한 장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인영이 복도 끝의 계단으로 내려와선 성건우의 측전방에 자리한 방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 방에선 복도로 난 창문을 통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을 죽이고 그 소리가 끊길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던 성건우는 잠잠해진 후에야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목적지가 지척에 가까워졌을 무렵, 성건우는 몸을 훌쩍 날리면서 손전등을 켰다. 손전등을 쥔 그 왼손엔 육식주도 차고 있었다.

노르스름한 빛기둥 아래, 인영이 드러났다.

접대용 소파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상대는 성건우가 지난번에 마주친 그 커리어우먼이었다.

전과 변함없는 차림을 한 그녀는 언뜻 봐서는 20대 초반인 것 같았지만 자세히 살핀다면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가부좌를 틀고, 눈도 반쯤은 감은 채 양손을 무릎에 얹어놓은 그녀는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 주위로 남루한 차림을 한 네다섯이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고, 쥐 몇 마리와 한 무더기 바퀴벌레들도 그 옆에 얌전히 자리해 있었다. 그들 역시 이 상서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성건우의 손전등이 켜지자, 여자도 눈을 떴다.

“앗!”

탄성을 지른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 창문으로 돌진한 뒤, 밖으로 훌쩍 뛰어나가 위로 기어올랐다.

원숭이처럼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혼탁하지 않았지만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다.

동시에 그녀 주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사람들도 곧장 튀어 오르고, 옆으로 몸을 날리며 훌륭한 신체 소질과 민첩한 반응을 보였다.

성건우의 손전등 빛은 그들을 고스란히 비추었다.

일그러진 표정과 혼탁한 눈동자, 반쯤 벌어진 입, 그 드러난 입 사이로 보이는 이 사이에 낀 살점들…….

무심자!

얌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그들은 전부 무심자였다.

이후 쥐와 바퀴벌레들까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성건우는 즉각 사지 동작 불능을 발휘했다.

쿵! 쿵! 쿵!

무심자들은 전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곳에 무심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밖에 있는 무심자들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는 걸까요?”

반기계 승려 성건우가 창가 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놀랍게도 자신이 2층이 아닌 3층에 있음을 발견했다.

턱을 쓰다듬던 그가 동료들에게 물었다.

“방 주인은 내가 지난번에 들어왔을 때처럼 2층에서 여자와 마주쳐 놀라 달아나게 했고, 그 후 3층에서 다시 마주치면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됐나?

난 이번에는 숨어있느라 그 여자를 놀라 달아나지 않게 했고, 이후 발생할 일은 방 주인의 경험과 다르니까, 방 주인의 잠재의식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본 광경으로 그 틈을 메운 걸까?”

“아마도.”

유약하고 겁 많은 성건우가 동조했다.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문 근처 벽에 자리한 직원 소개란에 붙은 사진들을 발견했다.

손전등을 그쪽으로 돌려 자세히 살피다 보니, 성건우는 곧 조금 전 그 여자의 사진도 보게 됐다. 사진 속 여자는 젊고 아름다웠다.

“유옥로, 판매부장, 아이언마운틴 시티 시민⋯⋯.”

성건우는 빠르게 소개를 읽었지만 따로 관심 둘 부분은 없어 보였다.

시선을 옮기려는데, 반기계 승려 성건우가 짧게 소리를 냈다.

“어?”

직원 소개란 구석에 사진 한 장이 빠져 있었다.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붉은 눈을 직원 소개란 구석으로 돌렸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접착의 흔적이 있었다. 흔적은 총 다섯 개였다.

그 다섯 개 흔적을 연결하면 대략 옆에 있는 사진만 한 사각형이 그려졌다.

즉, 직원 소개란 구석에 치우쳐진 이 자리에, 원래는 사진 한 장이 붙어있었으나 누군가가 떼어냈다는 뜻이었다.

물론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풀의 접착력이 약해져 알아서 떨어져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건우는 손전등을 들고 방바닥을 비추며 한동안 그곳을 열심히 살폈다. 하지만 떨어진 사진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흔적의 특징을 결합해 봤을 때 직원 소개란 구석에 붙어있던 사진은 아무래도 누군가가 일부러 떼어낸 것 같았다.

“왜 가져가야 했을까요? 어둠 속의 주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성건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심자가 한 짓 같지는 않았다.

음식, 옷, 무기 말곤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무심자 특징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지능이 낮은 그들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성건우가 턱을 매만지며 스스로에게 반박했다.

“아니, 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늪 1호 유적에서 갑자기 등불이 밝혀진 후에 있었던 일 기억해?

그 노부인은 분명 무심자로 변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본인 앨범을 뒤적이고, 방을 치우고, 쓰레기도 정리했잖아.

여긴 불가의 5대 성지중에 하나니까, 그와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건 아주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어.”

아무 단서도 없는 상황에선 유효한 결론을 내놓을 수 없었다.

성건우들은 이 일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쏟지 않고, 사지가 마비된 무심자들에게로 손전등을 돌렸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벽에 붙은 직원 사진과 대비를 해봤지만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이는 그 커리어우먼 여성에게 뭔가 특별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문제와 사라진 사진은 점점 더 미궁에 빠졌다.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비심을 발휘해 무심자들을 죽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손전등과 소음기를 장착한 아이스모스를 쥐고 다시 복도로 향했다.

복도로 나와 막 주위 상황을 관찰하고 방향을 정하려 한 그때였다. 성건우는 몸이 돌연 차가워지면서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빙원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

바람에 얼어버린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사고까지도 멈춰버렸다.

꼼짝도 못 하고 전방을 응시하고 있던 성건우는 제멋대로 반 바퀴를 돌아 벽을 향해 섰다. 그러곤 온 힘을 다해 이마로 벽을 들이받았다.

쿵!

지각을 잃은 성건우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느릿하게 깨어난 성건우는 이 트라우마의 입구에, 그러니까 그가 간판으로 무심자를 짓눌러 죽인 그곳에 돌아와 있는 걸 발견했다.

“버그?”

성건우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습격은 저항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습격을 당했을 때의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첫째,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에 따라 모든 정신이 이 트라우마 안에 잠식되고 현실에서는 식물인간이 되거나 그대로 목숨을 잃는다.

둘째,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부상은 입고, 가까스로 회복하더라도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안게 된다. 그 이후 가진 도구와 각성자 능력으로만 522호에서 억지로 도망쳐 나간다.

물론 이는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전개였다. 성건우에게 10개의 인격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실현 가능한 결과가 하나 더 있었다.

열 명 중 한 성건우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고, 나머지 아홉 성건우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그 후 몇 명이 희생하고 나머지만 522호 밖 복도로 돌아간다면, 현실 속의 성건우에겐 벗어나기 어려운 트라우마와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수준의 후유증이 생길 터였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그 중 어느 것도 아닌 듯했다. 정신을 잃었던 성건우는 어느새 평안하게 522호 입구로 돌아와 있었다.

이마가 좀 빨갛게 부어오르고 머리가 아직도 약간 아프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 외의 특별한 부분은 없었다.

성건우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상하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다시 큰 흰둥이 팀장님이랑 상의해보자.”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에게 조금 전의 상황은 마치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 * *

495층, C구역 11호.

인적이 드문 깊은 밤, 용여홍이 눈을 번쩍 떴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한참 누워 있다 보니 목이 또 말랐다.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법랑 컵을 들고 미리 받아둔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은 목구멍을 타고 위를 찰랑찰랑 채웠다.

찬물이 온몸을 도는 동안,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원래 반고 바이오의 밤은 유난히 추워서 받아둔 물은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집마다 보온컵들을 두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만약 보온컵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보온병을 컵 대용으로 쓰는 것도 방법이었다.

하지만 용여홍은 아직 혈기 왕성한 나이인 만큼 차가운 물을 마시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밤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컵에 든 물을 다 마셔버린 용여홍은 법랑 컵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식탁 위, 녹색 플라스틱 케이스에 싸인 보온병의 물을 담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는 아버지 용대용과 눈이 마주쳤다.

용대용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물었다.

“아직 안 잤냐?”

용여홍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네, 생각 좀 하느라요.”

“어떤 생각?”

용대용이 물었다.

입술을 뗀 용여홍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답했다.

“아빠, 만약 가치는 있는데 어느 정도 위험이 따르는 일이면 아빠는 그 일을 하실 건가요, 아니면 포기하고 안정된 삶을 사실 건가요?”

용대용이 본능적으로 답했다.

“난 네 엄마 말을 듣겠지.”

“⋯⋯.”

용여홍은 부러운 건지, 할 말을 잃은 건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아들의 모습을 보고, 용대용은 한동안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가족의 삶도 나름 안정적이야. 근데 난 네 할아버지가 나한테 해주신 말씀이 잊히질 않는구나.

네 할아버지께선 어린 시절 이 지하 빌딩에 누워 있는데도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하셨어. 언제 어디서 무심자가 튀어나올지 몰랐으니까. 또래 친구분 중에서도 살아남은 분이 절반밖에 안 됐다는 거야.

그리고 네가 안전부에 들어간 이후, 네 엄마는 일부러 너처럼 일선 부대에 속한 가족이 있는 여자들을 찾아가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일선 부대에서 사망한 사람은 회사에서 무심병을 얻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대.

네 엄마가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은 없었을 거다. 네가 긴장할까 봐, 우리가 걱정할 걸 생각하면 너도 많이 무서웠을 테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네가 매번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매일매일 즐겁게 보내기를 바라는 것뿐이야.

하…….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정말로 너와 일선 부대에서 힘쓰고 있는 다른 직원들 희생 덕분이지.”

복잡한 감정에 얽혀든 용여홍은 그저 속으로만 하고픈 말을 삼켰다.

‘아빠, 이쪽도 어렵고 저쪽도 위험하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저는 어느 쪽을 고르라고요…….’

용대용이 다시 아들을 힐긋 바라보았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가족들은 다 너를 지지할 거다. 음,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라면 포기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위험이라고 생각된다면 한번 시도해 봐. 나중에 조금도 후회하지 않게.”

잠시 침묵하던 용여홍이 말했다.

“네, 생각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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