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37화 (537/649)

537화. 데이터

결국 또 장목화가 나서서 성건우를 저지했다.

“잠깐, 잠깐. 2분만 기다려. 새로운 메일 왔는지 좀 확인할게.”

책상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에너지가 워낙 부족한 상황이라 반고 바이오 직원들은 일찍부터 자리를 비울 때 전자제품을 끄는 습관을 갖추고 있었다.

메일을 확인한 장목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산구역에서 무심병이 발생했다네. 400층에서 환자가 나왔대.”

이번에 폭발한 무심병의 연장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용여홍은 전에 백새벽이 한 질문을 떠올렸다.

“팀장님, 회사의 무심병 발병률이 올해 들어서 높아졌나요?”

장목화는 기억을 한번 더듬어보았다.

“아닐걸⋯⋯. 한번 검색해볼게. 확인해보자.”

곧 그녀가 검색 결과를 알려주었다.

“작년보다 높긴 한데, 최근 20년의 데이터를 놓고 봤을 때 가장 높은 정도는 아니야.”

이야기하는 사이, 일부 데이터를 추출한 장목화는 옆에 놓인 휴대용 컴퓨터를 들었다. 여태 사용했던 건 구조팀장에게 주어지는 데스크톱이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고, 용여홍이 의혹을 표했다.

“팀장님, 왜요?”

장목화가 답했다.

“아, 예전에 겐한테 달라고 한 프로그램이 있어. 데이터 분석할 때 쓰는 거. 발병률 문제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까 유독 발병률이 높은 특정 층이나 특정 집단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방금 막 떠올린 생각이었다.

반고 바이오에서는 이런 데이터 분석까지 제공하지는 않았다.

성건우와 용여홍이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장목화는 데이터를 프로그램에 입력하고 시작 버튼을 클릭했다.

곧 각양각색의 데이터 비교 결과가 직관적인 형식으로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한번 슥, 훑던 장목화가 순간 미간을 구겼다.

용여홍이 흠칫 놀랐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무슨 문제 있어요?”

같은 질문이라도 성건우는 퍽 격앙된 모습이었다.

장목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유난히 눈에 띄는 집단이 있네. 신력 이래 비 관리층 직원의 매년 발병률은 0.0003퍼센트에서 0.0005퍼센트 사이를 오갔어. 그중 가장 운이 좋았던 층이라고 해도 지난 몇 해엔 무심자 두 명이 나타났지.

근데 관리층 상황은 전혀 달라. 지난 47년간 관리층에서 무심병이 발병한 경우는 단 한 건이야. 그것도 딱 한 층에서만. 감염된 환자도 둘뿐이야. 나머지는 거의 0에 수렴해. 아무리 집단 규모가 달라도 너무 비정상적이야.”

“그런⋯⋯.”

용여홍은 머릿속이 텅 빈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장목화의 말이 이어졌다.

“한 가지 이상한 게 더 있어. 남성의 발병률이 여성보다 거의 배로 높아. 성비가 그렇게까지 차이 나지는 않는데도 말이야.”

성건우가 턱을 매만졌다.

“누군가가 관리층을 비호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여성의 발병률이 확연히 낮은 건 왜 그런 거지?”

용여홍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장목화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출산율을 보장하려고?”

일순간 용여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체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라 번식을 우선순위에 둔 걸까요?”

장목화가 한숨을 토해냈다.

“그냥 추측일 뿐이야.”

더 이상의 단서가 없는 관계로 토론도 거기서 끝이 났다.

이후 짐을 챙긴 세 사람은 12층 연구소로 백새벽을 만나러 갔다.

* * *

이틀 뒤, 성건우의 신청에 대한 답이 왔다.

도착한 메일을 확인하고, 그가 큰 소리로 장목화에게 말했다.

“육식주와 그 병력의 복원본은 오늘 받아 갈 수 있대요. 근데 녹음기는 안 된대요. 매우 강한 심령 통제 효과가 있다네요. 꼭 들어야 한다면 그 효과를 제거한 순정판까지는 제공해줄 수 있대요.”

고민하던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천연 교파 교리랑 이념이 뭔지 한 번 들어보자.”

옆에 있던 용여홍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해야 할 위험이 없다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 * *

오후.

장목화 책상에 오래된 디자인의 얼룩덜룩한 은백색 녹음펜이 놓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성건우,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지금 들어볼까?”

이미 육식주를 전술 배낭에 넣은 성건우가 몇 초 고민하다가 말했다.

“잠시만요. 일단 문을 닫고 불을 끄죠.”

“이게 무슨 귀신 이야기라도 되는 줄 알아?”

장목화는 당연히 그 쓸데없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용여홍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동조했다.

모두의 반대에 부딪히자, 성건우가 다시 열심히 설명에 나섰다.

“그래도 뭔가 의식이 있어야죠.”

“아이, 뭐 다 가족 같은 사람들끼리 무슨 의식이야?”

장목화가 대충 대꾸한 뒤, 배터리를 교환해 녹음펜 버튼을 눌렀다.

지직- 지직-

전류 흐르는 소리와 함께 특별한 것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끊임없이 후천적 영향을 받으며 점차 자기 본래의 면모를 잊어버린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의 스펀지와 같아 유해한 사물을 많이 흡수하면 점차 무거워지고, 허약해져서 끝내 이 잿빛 세상에 영원히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무심병의 기원이다.

이 모든 것에서 헤어나고 싶다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싶다면 인류는 반드시 최초의, 최강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린 자신의 태생적인 취향과 경향을 찾아야 한다. 위장은 벗고 자연으로 회귀해야 한다.

달지기 감찰자는 늘 우리가 충분히 잘하고 있는지 감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를 위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대문을 열어줄지를 결정하신다.

감찰자 앞에서는 위장이 없다. 최초의 마음이 답을 알려줄 것이다. 인간은 벌거벗은 상태로 왔으니 응당 벌거벗고 살다 벌거벗은 채로 떠나야 한다.

조용히 경청하던 장목화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종교 조직 이념도 나름 그럴듯해. 근데 별도로 부가된 다른 힘이 없다면, 이렇게 대부분의 인지에 어긋나는 말만으로는 단번에 누군가가 받아들이거나 계속 전파될 수 없어.”

“맞아요.”

용여홍도 매우 어려운 처지에 처했거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혼란한 상태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이런 말에 설득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그런 주위의 많은 사람이 이미 천연교파에 가입해 그에게 이런 교리를 끊임없이 주입한 결과일 터였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도 있잖은가.

한편 성건우는 아무 말도 없이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들은 말에 숨겨진 문제를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너 무슨 생각해?”

장목화가 물었다.

성건우는 비로소 침묵에서 깨어났다.

“음, 이 교파는 빙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요. 거기 날씨를 생각해보면…… 옷만 안 입어도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가겠는걸요? 교리 전파를 위해서는 각기 다른 지역에 알맞게 본토화를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네요.”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책 좀 더 봐야겠네, 빙원에 가게 되면 옷 벗고 한 바퀴 뛰어봐. 그럼 다른 만족감이 있을걸? 구세계의 적잖은 사람들도 겨울에도 호수에서 수영했다잖아. 선만 잘 지키면 신체 단련에도 도움 되고 금기를 돌파하고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정신적 만족감까지 더해져. 종교적으로 이용되기 아주 좋지.”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기회가 생기면 작은 빨강이한테 한번 해보라고 할게요.”

“왜 나야? 네가 하면 되잖아?”

용여홍이 곧장 반박했다.

성건우는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나야 몸이 워낙 건강하니까 효과가 불분명하잖아. 적합한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넌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175센티미터밖에 안 되고,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고, 성적도 겨우 중간 정도고⋯⋯.”

용여홍은 성건우의 말에 대꾸한 자신을 원망했다.

* * *

495층, B구역 196호.

정각 뉴스를 다 들은 성건우는 한 손에 육식주와 병력 복원본을, 다른 한 손에는 생명 천사 목걸이를 쥐고 심령의 복도에 진입했다.

그는 131호 문을 나서자마자 두 도구의 기운을 이 안으로 들였다. 그것들 모두 원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병력 복원본은 평범한 물건이라 기억에 의지해 구현했다.

뒤이어 노란색 승복과 붉은색 가사를 걸치고 얼굴을 메탈블랙 색상으로 바꾼 성건우의 눈에서 붉은색 빛이 번득였다.

이번에 생명 천사 목걸이가 마비시킨 부분은 왼쪽 다리였다. 성건우는 예전 그 방법대로 왼 다리를 엉덩이 뒤로 옮긴 뒤, 원래 자리에 새로운 다리를 하나 더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신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육식주의 대가를 피하긴 쉽지 않았다. 제도라는 법명의 성건우가 아무리 애를 써도 눈에서 번득이는 붉은빛은 화염처럼 갈수록 불타올랐다.

“여자! 여자!”

성건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되게 이상해 보인다. 어딘가 좀 익숙한데.”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숨김없이 대꾸했다.

“반기계 승려로서 참고할 만한 대상은 정법 선사밖에 없습니다. 정념 대사의 대가는 욕망 증강이 아니었고요.”

“보고 배울 사람이 없어서 그런 변태를 따라 해?”

떠오른 말은 뱉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실한 성건우가 질책했다.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육식주를 굴리며 대꾸했다.

“우리 부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어쨌든 여기 여자는 없지 않습니까.”

성실한 성건우가 고개를 숙여 바지춤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태론 염불을 외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이거야 간단하지요.”

다음 순간 그는 그 부위를 기계화해 탄환을 쏠 수 있는 전자포로 바꿨다. 천을 뚫고 길게 빠져나온 시커먼 포구는 금속광택을 번득였다.

반기계 승려 성건우가 약간 우쭐하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전 우세한 화력을 갖춰야 한다는 학설의 옹호자였습니다. 우리 부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우세한 화력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어요.”

성실한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정통 승려가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제도 선사는 정말로 보리를 믿는 승려가 아니었다. 성건우의 인격 중에 진심으로 특정 달지기를 믿는 자는 없었다.

반기계 승려 성건우의 본질은 기계에 대한 낭만과 동정심, 평정심이 융합한 결과였다. 육식주의 부정적인 대가가 동정심과 평정심을 쇠퇴시키고 기계에 대한 낭만만 부각한 것이었다.

늘어난 포구는 반기계 승려 성건우에게 거의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는 엉덩이 뒤에 붙은 다리를 질질 끌며 착실하게 522호로 들어갔다.

전의 경험으로,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에 순조롭게 도착했을 때까지 성건우는 정신력을 극소량만 소모했다.

이미 탐색을 마친 1층을 건너뛰고, 전자포를 단 채 즉각 2층으로 향했다. 이동 중엔 예의 그 묘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만약 지금 성건우를 통제하는 게 제도 선사가 아닌 새롭고 신기한 걸 추구하고, 노래와 춤추길 좋아하는 성건우였다면, 분명 어둠 속 주시자를 향해 함께 춤출 것을 권했을 것이다.

지난번 2층에 올라왔을 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성건우는 손전등을 이리저리 흔들어도 복도 끝에서 그 여자의 인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의 방을 순서대로 하나씩 검사하기 시작했다.

사무실 위주로 이뤄진 이곳은 오래된 문서 자료가 상당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522호 방 주인은 당시 그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듯했다. 자료를 집어도 말이 안 되는 글이나 깨진 글자만 잔뜩 적혀 있었다.

그렇게 복도 끝에 이르렀을 무렵, 귓가에 작은 발소리가 닿았다.

눈에서 발산되는 붉은빛을 몇 번 번득이던 성건우가 손전등을 껐다. 뒤이어 그 붉은 눈빛도 꺼졌다.

어둠 속에 웅크린 그는 쪼그려 앉아 조용히 벽에 기댔다. 마치 어린 시절 숨바꼭질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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