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화. 물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깨뜨릴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백새벽의 의식은 흐릿하고 몽롱하기만 했다.
그녀는 계속 안간힘으로 몸부림쳤지만 절대 깨어날 수는 없었다.
백새벽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드디어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났어. 이제는 미래를 봐야 해.’
그 생각이 꾸준히 거듭되는 가운데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백새벽은 시야를 채운 깊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빛이 한 점, 한 점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다가가자 빛은 점점 밝아지고 또 점점 붉어졌다.
그제야 육체의 존재를 감지한 백새벽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하얗고 단조로운 천장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기이한 등이었다.
뒤이어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귓가에 닿는 사람의 소리는 없었다.
멍하니 이러한 광경을 눈에 담다가, 백새벽은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 붙은 세 개의 다정한 얼굴이 보였다.
한 여자와 두 남자…….
그들도 돌아본 백새벽을 발견하고 동시에 웃으며 주먹을 흔들었다.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 * *
다음 날 오전, 647층 14호.
장목화가 자신의 책상 앞에 기대,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새벽이가 생각보다 일찍 수술을 받아서 지상 훈련 일정은 미뤄야겠어. 한동안은 육식주를 신청할 수 없을 것 같아.”
성건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억지로라도 신청해볼까요? 심령의 복도를 탐색하는 데 쓰겠다고요. 육식주가 생명 천사보다 더 위험하겠어요?”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음⋯⋯. 넌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니까 그런 특권이 있을지도 몰라.”
사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그 자체보다 위험한 도구는 많지 않았다.
다시 장목화의 말이 이어졌다.
“그 전에 다른 방을 탐색해보는 것도 방법이지. 그 뭐냐, 506호 말이야. 뭐 꽤 안전하다니 지금의 너한테도 적합할 것 같은데.”
지난 며칠간 성건우는 장목화에게 심령의 복도 방들의 정보를 공유해주었다. 장목화가 미래를 더 효율적으로 계획하도록 도우려는 것이었다.
이내 성건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우리 대부분은 강박증을 앓고 있어서요. 한 방을 다 탐색하기 전에 다른 방을 탐색할 수는 없어요.”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네 정신 문제는 정말 복잡하구나.”
그리고 그녀가 잠시 또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동안은 할 일이 없으니 회사 내부의 아이언마운틴 시티 폐허 관련 자료를 한 번씩 읽어볼까? 혹시 무슨 단서라도 있을지 모르잖아. 다음 임무를 나갈 때 명호랑 겐한테도 물어보고.”
한명호는 아이언마운틴 시티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 레드스톤 마켓에서 몇 년 동안 산 사람이었다.
그리고 게네바가 머신헤븐 인트라넷에서 다운받은 구세계 자료는 반고 바이오의 것만큼 상세하진 않아도 분명 더 나은 부분도 있었다.
덧붙여 장목화는 게네바에게 천재 과학자 인수영에 대해서도 찾아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 그녀가 뭘 연구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죠.”
성건우는 안 그래도 요즘 그렇게 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시를 마치고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장목화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빨강이,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예? 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요.”
용여홍은 꿈에서 깨어난 듯 허둥지둥 답했다.
장목화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팀에서 나갈지 말지? 급할 거 없다니까. 충분히 고민해본 다음에 결정해도 돼. 자자, 좋아. 그럼 이제 트레이닝룸으로 가자.”
이때 잠깐 머뭇거리던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물품을 더 신청하고 싶어요.”
“어떤 거?”
동시에 장목화는 빠르게 상대의 답을 추측했다.
성건우는 사실대로 답했다.
“첫째는 저랑 작은 빨강이가 철강공장에서 찾아낸 그 병력이요. 거긴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처럼 불가의 5대 성지 중 하나예요. 거기서 찾은 병력이 식품회사에 무슨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을지 확인하고 싶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장목화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근데 지금은 적합한 때가 아닌 것 같아. 522호 안의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는 방 주인의 기억 속 모습일 뿐이야. 그 병력이 있어야 할 곳도 아니고, 그로 인한 무슨 변화가 생길 리도 없지. 그 병력은 우리가 나중에 실제로 아이언마운틴 시티에 갈 때나 쓸모 있을 거야.”
성건우는 상관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냥 시도일 뿐인데요, 뭐.”
장목화도 논쟁할 생각은 없는 듯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두 번째 물품은?”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522호 방 주인은 감찰자 영역에 속해 있을 확률이 높아요. 전에 회사 내부에서 은밀하게 전도하고 다니던 사이비 종교 조직 천연 교파가 신봉하던 달지기가 바로 감찰자였죠. 그래서 그 녹음기를 신청해보려고요. 천연 교파의 전도를 도왔던 그 녹음기요.”
장목화가 말했다.
“그 녹음기? 꼭 감찰자 영역이란 보장은 없잖아. 솔직히 그게 여러 사람한테 영향을 미쳐서 그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찰자를 신봉하게 한 걸 보면 그 안에 담긴 힘은 너랑 오하명의 사유 이식에 가까워 보이는데.”
“맞아, 맞아.”
용여홍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에 성건우가 다시 웃으며 답했다.
“사유 이식일 확률이 비교적 높을 뿐이지, 다른 가능성까지 배제할 순 없어요. 게다가 그걸 손에 넣으면 전 그 안에 저장된 내용을 통해 천연 교파와 감찰자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이해하고, 522호의 다른 트라우마를 탐색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도 자체적으로는 육식주나 생명 천사 목걸이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도구잖아요? 모종의 문제를 맞닥뜨리면 전 그 안에 담긴 기운을 제 심령의 복도에 전이시킬 수도 있을 거예요.”
성건우는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를 보며 장목화는 묘하게 익숙하단 느낌이 들었지만, 정작 그 익숙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바닥까지 써먹으려고 하는 이 스타일은⋯⋯.’
용여홍도 속으로 숨을 한번 들이마신 후, 장목화와 성건우를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이후, 용여홍이 물었다.
“겐도 없는데 녹음에 담긴 힘에 영향을 받아 천연 교파의 골수 구성원이 달지기 감찰자의 신실한 신도가 되면 어떡해? 걱정 안 돼?”
진지하게 고민해보던 성건우가 답했다.
“천연 교파의 성찬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성건우는 말끝을 흐렸지만, 용여홍은 뒷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성찬이라면 고려해볼 수도 있다는 거겠지.’
어차피 성건우들 대부분도 옷가지를 훌훌 벗어 던지고 천연으로 회귀하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는 않을 터였다.
한번 헛웃음을 지은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와, 진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거야? 여홍아, 건우는 이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라서 그런 영향에 대한 저항력이 꽤 강해. 음……, 물론 그 녹음기를 만든 각성자 레벨에 따라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심령의 복도 깊은 곳까지 탐색한 사람의 것이라면, 그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전전하며 위력이 약화됐으니 건우한테도 별 영향은 못 끼쳐. 옷을 훌러덩 벗고 싶은 충동이 들다가도 바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겠지.
반면 오하명 같은 독창이나 이미 신세계에 진입한 각성자 것이라면 남은 영향이 적진 않을 거야. 어쩌면 야는 한동안 감찰자 신도가 될지도 몰라.”
용여홍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래도 너무 위험한데요? 저희는 실제 상황이 어떨지 모르잖아요. 그것의 영향을 피할 방법도 없고요.”
장목화가 가볍게 웃었다.
“안심해. 분명 알게 될 테니까. 회사에서 그 녹음기를 수거해간 지 반년이 다 됐어. 그 거물들이 아직도 그것에 관한 걸 알아내지 못했을까 봐?”
“하긴⋯⋯.”
용여홍도 그제야 장목화의 말에 설득되었다.
뒤이어 장목화는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얼른 신청서 작성해. 너 다 하면 단련하러 가자.”
“네.”
성건우는 상당히 흥분한 듯 보였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책상으로 돌아간 장목화는 자리에 앉았다.
이후 그녀는 검은색 공책을 펼치더니 그 위에 간단하게 그려진 지도와 표시된 방향, 방 번호를 확인했다.
곧 향할 트레이닝 룸으로 가는 길을 그린 노선도였다.
한 차례 적응 기간을 거친 장목화는 자신의 대가인 길치가 사실은 첫날 경험한 것처럼 심각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허둥댔던 건 대가에 적응하지 못했던지라 장목화가 살아온 대로 순간적인 판단을 내리고, 빠르게 반응하고, 충분한 사고와 분별을 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무엇보다 생체 공학 의수의 보조 칩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길치의 정도가 현저히 심해진 것이었다.
장목화는 성건우의 경험과 기계 승려 정법의 사례로 생각을 정리했다.
‘지불한 대가는 상응하는 부위에 손상도 입히고, 인지 방면의 이상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해. 인지 장애와 인지 변형 등도 이 이상 현상에 포함되고.
그래서 과학 기술의 도움에 지나치게 의지해 어떤 상황을 인지하려 할 때는 더 심각한 이상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거야. 그것도 잠재의식의 심리 작용에 속하니까.
그에 비해 지도를 그리거나, 많이 멈춰 서서 많이 생각하는 등등은 큰 심리 반응을 일으키진 않으니까 효과가 더 좋아.’
이를 기반으로 장목화는 수시로 심리 상태를 조정한다면 훗날 대가가 심화된 후에는 보조 칩으로 현재의 수제 지도를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기계 승려 정법은 구제가 아예 불가했다. 그는 그야말로 ‘욕망 증강 - 로봇으로 몸을 바꿔 도피 시도 - 여전히 존재하지만 발산할 수 없는 욕망- 욕망이 많아질수록 강해지는 변태적인 심리’란 무한 굴레에 빠져 있었다.
아무튼 지금 장목화에게 길치란 대가는 나름 감당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 매일 외출하기 전 여러 번 계획을 세우고, 도중에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많은 생각과 관찰을 하기만 하면 돼. 출근길이 엄청난 모험처럼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하하!’
* * *
오전 단련을 마치고 샤워까지 깨끗하게 끝낸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은 다 함께 구조팀 사무실로 돌아갔다.
장목화는 손목을 돌려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했다.
“일단 작은 흰둥이 보러 갔다가 돌아와서 점심 먹자. 어때?”
“좋아요.”
용여홍이 즉각 찬성했다.
성건우는 대답 대신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스피커를 전술 배낭에 쑤셔 넣고 있었다.
장목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건 왜?”
성건우는 바로 진지하게 설명했다.
“아직은 병실에 못 들어가잖아요. 유리 벽으로밖에 못 보니까 무슨 말을 해도 못 듣고. 그러니까 춤을 춰서 작은 흰둥이를 즐겁게 해주려고요. 안 그래, 작은 빨강이? 너도 같이 출래?”
“아⋯⋯.”
진짜로 진지하게 망설이는 용여홍을 보고, 장목화가 헛웃음을 지었다.
“야, 넌 뭘 또 그걸 들어주고 있어. 건우 너, 뭐 사유 이식 능력이라도 쓴 거야? 얘들아, 작은 흰둥이는 아직 감호 병실에 있어. 너희가 춤추는 꼬락서니 보고 빵 터져서 상처까지 같이 터지면 책임질래?”
용여홍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뒤이어 성건우가 피식 웃었다.
“사유 이식이라뇨, 쟤한테는 능력을 쓸 필요도 없어요. 어휴, 난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175센티미터밖에 안 되고,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고, 성적도 겨우 중간 정도고⋯⋯.”
거의 음까지 실어 흥얼거리는 성건우를 보고, 용여홍이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