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실험 정신
주도권을 잡은 신중한 성건우는 자신의 방, 131호에서 나온 후에야 생명 천사 목걸이 안에 든 각성자 기운을 이전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에는 오래된 은제 천사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나타났다.
성건우는 그것을 움켜쥔 채 걸음을 옮겼다.
뜻밖에도 오른 다리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은 마비상태였다.
성건우는 턱을 쓸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큰 흰둥이 팀장님 추측은 틀렸네. 이건 인지상의 결함에 속하는 걸까? 대가의 본질은 자아인지에 대한 영향인가?”
다른 성건우들은 답이 없었다. 지금은 표본이 너무 적어서 어떠한 규칙도 도출해낼 수 없었다.
뒤이어 열 명으로 나뉜 성건우가 두 번째 시도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그들 중 사슴사냥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성건우만 생명 천사 목걸이를 가지고 있기로 했다.
나머지는 빈손인 상태를 유지하거나 스피커 따위만 쥐었다.
뒤이어 아홉 성건우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모두 오른 다리를 질질 끌면서 절뚝거리며 움직였다.
사슴사냥 모자를 쓴 성건우는 결론을 내렸다.
“이 영향은 인격이 분열되었다고 바뀌는 것 같지는 않네.”
그러자 겁 많은 성건우가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행동하지? 심령의 복도에는 우리랑 이 목걸이를 격리할 수 있는 물질도 없는데.”
성건우는 보석함과 종이 뭉치를 구현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본질적으로는 그의 정신이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생명 천사 목걸이로 대표되는 심령의 복도 깊은 곳까지 탐색한 각성자의 기운과 스스로를 격리할 수 없었다.
이내 성실한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뻔하잖아? 기운을 현실로 돌려보내고, 필요할 때 다시 불러들여야지.”
“때맞춰서 전이시킬 수 있을까?”
겁 많은 성건우는 그 방안이 썩 내키지 않는 듯했다. 이전에도 시간이 필요했고, 그 작업을 맡을 하나의 인격도 분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슴사냥 모자를 쓴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다들 모여서 한 번 시도해보자.”
“뭘 믿고?”
성실하지만 고집이 센 성건우가 왜 그 말을 들어야 하냐며 뻗댔다.
그 짧은 언쟁과 투표를 거친 끝에, 성건우들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그 후 오른쪽 다리를 엉덩이 뒤로 옮긴 성건우는 원래 자리에 새로운 다리 하나를 만들어냈다.
지금의 그는 정신체, 혹은 의식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얼마든 신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다리가 세 개나 달린 성건우는 걸음을 내디뎌 보더니, 엉덩이 뒤에 달린 다리를 무시한다면 별 불편함 없이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몇 바퀴를 돌아보던 그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쯧, 역시 상응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니까? 이런 상태에서의 균형에 다시 적응해야 할 뿐이지. 그게 뭐가 힘들다고?”
* * *
사흘 뒤 오전, 647층 14호.
백새벽은 전화로 오늘 오후에 수술이 진행될 거라는 알림을 받았다.
동시에 성건우도 상부에 제출했던 신청서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향해 아주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라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신체 개조나 의수 이식을 권하지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요?”
성건우가 바로 볼멘소리를 냈다.
‘큰 흰둥이 팀장님은 유전자 개조자면서 생체 공학 의수를 이식받고 거기다 각성까지 했는데!’
몇 초간 고민하던 장목화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말했다.
“그 선생님이 한 말 기억해? 그 사람 정신은 심령의 복도 안에서 신세계를 찾는 중이고, 육신도 현실 속의 신세계를 찾는 중이라고 말했잖아. 현실 속 신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선 육신의 상태가 좀, 순수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럴 지도요.”
성건우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문득 장목화를 바라보았다.
“그럼 팀장님은⋯⋯.”
유전자 개조도 받고 전기 뱀장어 형 생체 공학 의수도 이식받은 장목화의 육신은 사실 일반인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순수하다고 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장목화가 호탕하게 웃었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사람이 많을 수 있겠어? 가지 않고는 안 될 때가 온다면, 그리고 기회가 생긴다면 의식만이라도 진입시켜야지. 상황을 봐서 결정할 거야.”
이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됐을 무렵, 용여홍은 백새벽을 바라보며 그녀 대신 불평해주었다.
“근데 일정이 너무 멋대로인 거 아냐? 당일 오전에야 오후에 수술받게 될 거라고 알려주다니. 마음의 준비할 시간도 없게.”
“맞아, 맞아.”
성건우가 동조했다.
백새벽은 입술을 오므리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더 좋아. 이래야 무서워하거나 후회할 시간이 없지.”
고개를 끄덕인 장목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맞아, 뭐든 후딱 해치우는 게 낫지. 내가 같이 가줄게.”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하지만 백새벽도 그리 완강하게 굴지는 않았다.
장목화가 다시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꼭 같이 가야지. 수술할 때 옆에 누가 있다는 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데. 또 수술 마치면 한동안 거동이 불편할 테니 옆에서 잡다한 일을 대신해줄 사람도 필요하고.”
결국 백새벽은 장목화의 설득에 넘어갔다.
“알겠어요.”
“그럼 저도 갈래요.”
용여홍이 내뱉듯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곧 그는 당혹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성건우도 바로 따라나섰다.
“저도요!”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너희, 진짜⋯⋯. 너희가 가봤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작은 흰둥이 몸이라도 닦아줄 수 있어?”
“응원은 해줄 수 있죠!”
성건우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래.”
장목화도 성건우들과 공연히 언쟁하고 싶지 않다는 듯 대충 대꾸했다.
사실 무엇보다 길을 잃을까 걱정됐기 때문이지만.
* * *
오후 2시 30분, 지하 빌딩 12층 어느 연구소 안.
세 동료의 보호 아래 이곳에 이른 백새벽은 일련의 검사를 받은 뒤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뒤이어 그녀는 유리벽으로 격리된 수술 준비실을 가리키며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에게 말했다.
“들어갈게요.”
“그래.”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새벽이 들어가자 그녀의 유전자 개조를 담당하는 연구자가 말했다.
“각종 사항에 대한 안내는 이미 해드렸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강조할게요. 비교적 위험이 낮은 방안을 택하셨지만 그건 상대적인 확률일 뿐입니다. 일반인에겐 각종 고난도 질병의 수술보다 안전하다고 볼 수 없어요.
유전자 붕괴로 인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직 번복할 기회가 있어요.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보시죠.”
상대의 말을 차분히 경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백새벽의 귓가에 다른 목소리가 닿았다. 무의식적으로 돌아선 백새벽의 시선이 곧 유리벽 너머로 향했다.
성건우, 장목화, 용여홍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성건우는 유리벽에 얼굴이 괴상하게 짓눌리도록 딱 붙어있었고, 얌전한 용여홍과 장목화는 격려를 보내려는 듯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저마다 응원에 열심이었다.
“화이팅!”
“기다리고 있을게!”
“문제없을 거야!”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깐의 공백 끝에, 백새벽이 연구자를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 * *
연구소, 대기 구역.
성건우는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수시로 투덜거렸다.
“왜 아직도 안 나오지?”
성급함과 대범함은 종종 인내심 부족과 직결되곤 했다.
벽에 붙은 벤치 끝에 앉은 장목화가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가만히 좀 있어! 보는 내가 다 어지럽다.”
‘아이, 진짜. 얘는 이런 상황에서는 감정이 전염될 수 있다는 것도 몰라? 원래는 하나도 긴장 안 됐는데 너 때문에 나도 긴장되잖아!’
뒤이어 용여홍도 장목화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좀 기다려. 이런 수술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잖아.”
성실한 성건우가 즉각 반박했다.
“누가 그래? 너도 안 받아봤잖아!”
“난 받아봤어.”
장목화가 무의식적으로 용여홍을 거들었다.
성건우가 얼른 물었다.
“그때는 얼마나 걸렸어요?”
“⋯⋯.”
순간 장목화는 말문이 막혔다. 당시 의식이 없어서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 없었다. 깨어난 후에도 수술 시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 답을 쥐어 짜냈다.
“아무튼⋯⋯. 무지 오래 걸렸지.”
그 후엔 주의를 환기하려 그냥 성건우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몇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왜 이렇게 안달이야? 작은 빨강이 좀 봐,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처럼 가만히 있잖아.”
성건우는 뚱하게 대답했다.
“거의 1시간마다 화장실 가는데요. 빈뇨는 긴장할 때 보이는 대표적인 증상이죠.”
괜스레 자신까지 끌어 들어가자 용여홍도 뭐라고 참여하고 싶었지만 입 안이 바짝 마른 관계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조차도 자신이 화장실에 몇 번이나 다녀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수술이 시작된 지 3시간 하고도 17분이 지났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서 장목화는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로 그때, 수술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침대가 밀려 나왔다.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은 특이한 박막에 싸여 있었고, 몸에는 다양한 기기와 약병에 연결된 수많은 튜브가 꽂혀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용여홍은 다리가 후들거려 잠시 비틀거렸다. 바로 앞으로 튀어 나간 장목화와 성건우만 눈에 어른거릴 뿐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장목화가 물었다.
이번 유전자 개조를 담당한 연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성공적입니다. 앞으로 수술 이후의 반응을 살펴야 하지만요.”
그는 답하는 동시에 조수들에게 백새벽을 감호 병실로 옮기도록 했다.
“얼마나 걸립니까?”
성건우가 그치지 않고 캐물었다.
연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대략 3시간 정도 있으면 상황이 안정될 겁니다. 그다음부터 한 달 동안은 일반 치료를 통해 몸의 회복을 가속할 예정입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정기적인 고압 산소 치료가 포함돼 있고요.”
‘3시간⋯⋯.’
드디어 동료들 곁으로 따라붙은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침대에 누운 채 감호 병실로 옮겨지는 백새벽을 돌아본 그는 창백한 그녀의 안색을 확인했다. 그 얼굴에서는 또렷한 고통이 느껴졌다.
장목화 역시 용여홍처럼 백새벽의 모습을 살피다가 진정하려 애쓰며 앞으로의 상황을 세심하게 물어보았다.
“혹시 우리 중 누군가 남아 새벽이를 보살펴야 할까요?”
연구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여러분이 들어갔다간 특정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한 감염이 발생하기 쉬워서 한동안은 접촉이 불가합니다. 안정기에 접어들면 환자분 혼자서도 충분히 거동할 수 있을 테고요.
여러분은 매일 2시간씩 주어지는 면회 시간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자주 오셔서 환자가 좋은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신체 회복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언제나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인 장목화는 성건우가 나서기 전에 얼른 대화를 마무리했다.
감호 병실로 들어가는 백새벽을 눈으로 배웅한 세 사람은 감호 병실 옆에 붙은 방에 들어가 유리벽 너머로 안쪽 상황을 주시했다.
잠시 후 장목화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건우야, 네가 사무실에 가서 우리 도시락통 가져다가 간이 식당 가서 음식 좀 받아와.”
용여홍이 바로 힘없이 답했다.
“전 필요 없어요, 배 안 고파요.”
그를 돌아본 장목화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성건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우리가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작은 흰둥이도 그걸 느끼고 빨리 일어나서 우리랑 같이 먹고 싶어 할지도 몰라.”
‘이건 또 무슨 성건우야? 어쩐지 좀 애 같은데.’
장목화도 속으로만 중얼거렸지, 대놓고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사이 잠시 고민하던 용여홍이 말했다.
“알겠어.”
지금의 그는 성건우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왼발 먼저 들어가야 백새벽이 복을 받을 거라 말해도 그대로 실천할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