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주시
홀에 진입한 성건우는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책상 위에 놓인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들과 곳곳에 흩어진 포장지들을 발견했다.
구세계 콘텐츠를 섭렵한 그는 이 건물 1층은 제2 식품회사 소매점이었으리라 유추했다. 아직 온전하게 줄지어진 카운터도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느릿하게 앞으로 걸어가며 바닥의 포장지들을 훑어보았다.
귤피 사탕, 과일 젤리, 샤치마(沙琪玛), 크림 견과, 소다 과자, 잼 비스킷, 카스테라 등등.
순간 반기계 승려였던 성건우의 얼굴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든 성건우가 입맛을 다셨다.
꿀꺽, 군침도 절로 넘어갔다.
급히 시선을 거둔 그는 다시금 기계 승려가 되어 붉은 눈을 번득였다.
눈 깜짝할 사이 고승이 된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 식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거나 포장만 남아있군요. 무심자들은 감히 이 구역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추리 광대가 아닌 자문자답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인간이 한 짓입니다. 구세계 파괴 이후 아이언마운틴 시티의 생존자가 한 짓이에요.”
짝짝짝!
심지어 성건우는 본인 스스로를 위해 박수도 보냈다.
“식품회사는 확실히 종말을 맞은 생존자들이 기지로 삼기 적합하지요.”
한 번 더 강조가 끝나자마자, 그가 또 자기 자신에게 반박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식량을 편하게 얻기 위해서라면 그 주위에 기지만 구축해도 충분하니까.”
“보면 알겠지.”
또 다른 성건우가 의미 없는 논쟁을 중단시켰다.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앞으로 몇 발짝 옮겨 매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승려로서의 제 법명은 무엇입니까?”
어떤 성건우가 제안했다.
“제도로 해.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의 그 제도.”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바로 손바닥을 세우며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오늘부터 저는 제도 선사입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보폭으로 제2 식품회사 1층을 한 바퀴 돈 성건우는 홀이 소매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뒤쪽과 양쪽은 창고였다.
또 바닥에 널린 쓰레기를 제외한다면 이곳엔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그만 벌레조차도 없었다.
“보아하니 방 주인도 이 건물의 1층을 샅샅이 살펴본 것 같습니다.”
성건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방 주인이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면, 잠재의식이 다른 경험에서 취한 정보로 보완했을 테고 그렇다면 모기와 파리 등이 등장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성건우는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미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다. 그래도 모퉁이에 난 좁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어스름한 빛 덕분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성건우는 손전등을 꺼내 써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발아래 계단 하나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계속 걸어가던 그때, 반기계 승려 성건우가 돌연 우뚝 멈춰 두리번거렸다. 주위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손전등 빛으로 주위를 훑자, 사방의 상황이 들어왔다.
얼룩덜룩 풍화된 벽, 녹슨 철제 난간, 달려있기는 해도 전기가 공급되진 않는 천장의 불 등등이 성건우의 머릿속에 또렷이 새겨졌다.
이런 환경에서 숨어있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 시선의 주인은 계단 아래에 있거나 2층에 있을 터였다.
성건우는 겁을 내는 대신 손전등을 쥔 채 다시 천천히 2층으로 올랐다.
어두운 복도와 방들이 있는 이곳은 제2 식품회사의 사무 공간인 듯했다.
속도를 좀 늦춘 성건우는 손전등 빛으로 옆쪽 문에 붙은 번호를 보았다.
[203]
[판매부]
계속 앞으로 가려던 성건우는 갑자기 손전등으로 203호를 비췄다.
다시 그 주시가 느껴졌다. 어둠 속에 숨은, 소리 없는 주시가.
노란 빛줄기는 어지러운 책상과 바닥에 쓰러진 의자, 먼지 쌓인 컴퓨터와 모니터를 비췄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나 생물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방 주인이 받았던 느낌일까요?”
반기계 승려 성건우가 손을 들어 그의 강철 턱을 매만졌다.
뒤이어 그의 눈에서 발산되는 붉은빛이 몇 차례 번득였다.
“이상해⋯⋯.”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반기계 승려 제도 선사가 물었다.
성건우는 강철 턱의 특이한 질감을 느끼며 조용히 웃었다.
“인간의 유해가 보이지 않잖아. 대량의 분변 같은 것도 없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던 곳 같지 않아.”
성건우는 곧장 스스로에게 반박했다.
“아까 얘기했잖아? 생존자 기지는 여기가 아니라 근처일 수도 있다고. 정기적으로 여기 와서 식량만 가져갔을 수도 있어. 무엇보다 설령 이곳이 진짜 생존자 기지였다고 하더라도, 다들 동료의 시체는 다른 곳에 모아두고 조를 짜서 먼 곳에서 볼일을 해결했을지도 몰라.”
성건우가 다시 강철 턱을 긁적였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여기 인간이 생활했던 흔적이 없다는 거야.”
성실한 성건우가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럼 답은 전자네.”
그때, 순간 또 뭔가를 느낀 그가 손전등으로 복도의 끝을 비추었다.
곧게 뻗은 빛 아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한 인영이 드러났다.
상대는 여성이었다. 흰 셔츠에, 짙은 파란색 정장 재킷을 걸친 그녀는 구세계의 커리어우먼처럼 보였다.
얼굴을 보니 스무 살 정도 되었을 법했다. 귀를 살짝 덮는 검은 단발, 오뚝한 코, 적당히 도톰한 입술. 한 마디로 그녀는 엄청나게 수려한 미인이었다.
대략 첫인상을 확인한 뒤엔, 성건우는 빠르게 더 세세한 부분을 살폈다.
상대의 셔츠와 재킷은 언제 빨았는지 매우 지저분했고 팔자주름, 얼굴 근육, 눈가, 목을 보면 스무 살이 아니라 최소 삼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또 그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다만 눈동자는 혼탁하지 않았다.
성건우를 목격한 그 여자의 눈엔 두려움이 어렸다. 표정도 생생했다.
이내 미친 듯 질주하던 그녀는 구르고 뛰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누가 있었네⋯⋯.”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 성건우가 다시 계단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 탐색하고 나니, 정신력은 절반 이상 소모되어 이젠 돌아가는 데 쓸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수정의식교의 5대 성지 중 한 곳에 나타난 낯선 여성은 아무리 신중하게 굴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었다.
성건우는 정신 상태가 더 나아진 다음에 탐색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동안엔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 * *
다음날 오전, 647층 14호.
성건우가 막 어젯밤 일을 말하려는데,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장목화는 이내 웃으며 기쁘게 외쳤다.
“작은 흰둥이~ 상부 전화야. 648층 9호로 와서 생체 공학 의수랑 원하는 유전자 개조를 고르래.”
구체적인 수술 날짜는 선택 후에야 정해졌다.
백새벽은 입술을 오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녀를 보고 장목화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내가 따라가서 도와줄까?”
잠시 침묵하던 백새벽이 답했다.
“좋아요.”
“저도 갈래요!”
성건우가 의욕적으로 나섰다.
용여홍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도요.”
장목화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참나, 작은 흰둥이가 아기야? 이렇게 많은 사람을 줄줄이 달고 가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장목화도 성건우, 용여홍을 말리진 않았다.
* * *
648층, 9호.
구조팀은 이곳에 도착해 한 중년 여성을 보았다.
상대 역시 구조팀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습니까? 고를 사람은 한 분인 걸로 압니다만.”
“자문단은 오면 안 됩니까?”
성건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용여홍도 얼른 동조했다.
팀장 장목화는 애써 웃으며 팀원들의 대책 없는 패기를 변호했다.
“보잘것없는 이도 셋 모이면 제갈량의 지혜가 나온단 말이 있잖습니까.”
담당자는 입을 살짝 삐쭉였다.
“자문이 필요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요.”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잘 있는 발가락 개수만 헤아렸다.
그래도 담당자는 딸려온 인원에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
그저 책상 위 액정 화면을 백새벽에게 돌려주고 마우스도 건넸다.
“직접 고르세요. 선택하면 신청서 양식을 채운 뒤 저를 부르시면 됩니다.
생체 공학 의수 중 무료 이식이 가능한 모델은 아무 표시도 붙지 않은 겁니다. 노란색 표시가 붙은 건 별도의 공헌 점수를 지불해야 한다는 건데, 구체적으로 얼마나 더 붙는지는 뒤쪽에 기입돼 있습니다.
붉은색 표시는 무료이긴 해도 위험성이 크다는 뜻이라, 지원자 각서에 서명해야 합니다.
유전자 개조는 당신이 받은 보상이니 모두 무료입니다. 각기 다른 색의 표시는 역시 각기 다른 위험을 의미하니까 잘 살펴보세요.”
백새벽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성건우는 곧장 액정 화면 맞은편의 의자를 끌어왔다.
“자, 앉아.”
백새벽도 힘들게 허리를 굽혀서 보고 싶진 않아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백새벽이 마우스 휠을 굴리면서 화면을 채운 생체 공학 의수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대부분은 장목화가 미리 설명해준 것들이었다. 독사 형, 드래곤 형, 고양잇과 동물 형, 변이 박쥐형, 검은 쥐 인간형, 불사조 형⋯⋯.
생체 공학 의수 이름이 꼭 실제 동물로 지어지는 건 아니었다. 원형과 최종적인 기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어지는 것인데, 기능에 편향된 경우 보통은 판타지, 혹은 신화 생물의 이름이 붙었다.
백새벽이 목록을 살피는 사이, 성건우는 마치 본인 일인 것처럼 그 옆에 딱 붙어서 이것저것 제안을 했다. 장목화 역시 다른 한쪽에 붙어있었다.
오직 용여홍만 자리를 잘못 잡아서, 어쩔 수 없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액정 화면을 힘겹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팀원들과 한 차례 토론을 한 끝에, 원래 어느 정도 마음이 정해져 있었던 백새벽은 빠르게 결정을 했다.
그녀가 선택한 건 어인 형 생체 공학 의수였다.
이 생체 공학 의수의 기술은 안정적인 편이라 위험 부담이 크지 않았다. 꽤 큰 공헌 점수를 별도로 지불해야 하기는 했지만 백새벽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그녀가 여태 모아둔 점수에 이번에 받은 외근 수당까지 더하면 가까스로 값을 치를 수 있었다.
장목화가 대량의 공헌 점수를 무이자로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백새벽은 빌리지 않을 수 있다면 최대한 그러고 싶었다.
비용도 선택의 요소 중 하나이긴 했으나, 백새벽이 최종적으로 어인 형 생체 공학 의수를 선택한 데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 의수에는 수중에서도 산소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특수한 표피와 그에 대응하는 내부 구조 덕분이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여태 구조팀이 미흡했던 부분인 수중 작전 능력의 큰 결함을 메울 수 있었다.
설명을 보니 이 생체 공학 의수를 이식한 자는 수중에서 거의 24시간 생존할 수 있고, 격렬하게 움직여도 2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거기다 어인 형 생체 공학 의수에는 두 가지 능력이 더 있었다.
하나는 화염 분사였다. 이 생체 공학 의수엔 활성 세포가 갖춰져 있는데, 이 세포들은 자체적으로 유분을 생산할 수 있고, 체내에서 지방을 취해 저장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저장된 연료가 중요한 순간 손바닥 중앙에 압축되면서, 화염 분사기와 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축적은 아주 느릿하게 이루어지기에 며칠이 지나도 다 채워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이 부분을 고려해 특수한 표피에 유류 연료를 직접 흡수하는 기능도 더했다.
한 마디로 이제 백새벽은 팔을 휘발유 통에 집어넣어 화염 분사에 필요한 연료를 충당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