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32화 (532/649)

532화. 인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여홍은 입을 벙긋거리면서도 무슨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장목화가 그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급할 필요 없어. 며칠 더 잘 생각해봐. 작은 흰둥이 수술 결과가 나온 뒤에 결정해도 되고.”

용여홍이 뭐라 답하기도 전, 장목화는 또 하나 질문을 덧붙였다.

“너희 층에 또 무심자가 나타났다며?”

“네, 저를 덮치려고 했어요.”

용여홍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위적인 결과인지, 자연적인 발생인지 모르겠네⋯⋯.”

장목화는 생명 제례 교단 사건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에 관해 한 차례 얘기하다, 장목화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웃었다.

“오후에 다시 얘기하고 일단 점심부터 먹자. 내가 쏠게, 기념으로!”

말을 마친 장목화는 당당히 14호를 나가 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를 보고 용여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번에는 다른 구역 간이 식당에 가보려고요?”

살짝 입을 벌린 장목화는 짧게 한숨 쉰 후 돌아서 성건우를 채근했다.

“야, 네가 앞장서. 어차피 서빙도 네가 할 거니까.”

* * *

저녁 무렵.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던 장목화는 곁눈으로 문을 슥 살폈다. 팀원들은 이미 다 사무실을 떠난 뒤였다.

그녀는 긴 한숨과 함께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흰 종이를 꺼낸 뒤 만년필을 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나가면 오른쪽으로 꺾고 복도 끝까지 가서 엘리베이터 타기.

349층 버튼 누르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광장에 진입한 다음 꽃이 보이면 왼쪽으로 꺾어서 C구역 12호로.

⋯⋯」

곧 장목화는 ‘귀가 대작전’에 필요한 지도를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틀린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 비로소 그녀는 짐을 챙기고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바로 왼쪽으로 틀어야 했다.

장목화는 막 한 발을 내딛자마자 멈추더니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지도와 곳곳에 달린 주석을 확인했다.

순간 장목화는 굳은 얼굴로 입꼬리를 뒤틀었다.

조금도 인지하지 못하고 잘못된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길치라는 대가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하네.’

눈동자를 살짝 굴리던 장목화는 옷 주머니에 꽂아놓았던 만년필을 꺼내 지도에 한 구절을 더했다.

「모든 모퉁이에선 시간이 좀 걸려도 더 많이 생각하고 확인하기.」

그 후 정확한 방향을 선택한 그녀는 지도에 따라 집으로 향했다.

* * *

495층, C구역 11호.

집에 들어선 용여홍은 잠시 멈칫했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까지 각자 자리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왜 그래?”

용여홍이 물었다.

고홍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사는 이 층 말이다. 최근 1, 2년 사이에 무심병에 감염된 사람이 많아진 것 같지 않니?”

벌써 몇 번째나 발생해 몇 명이나 감염된 상태였다.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용여홍이 어머니를 위로했다.

이내 용대용이 문가를 바라보았다.

“우리 층에 있는 감염원을 찾아내지 못해서 감염자가 계속 발생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누군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우리 층이 화를 입은 걸 수도 있지.”

고홍자는 지인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던 중 누군가 했던 추측을 언급했다.

이 이야기에, 용애홍이 내뱉듯 말했다.

“오빠랑 건우 오빠가 감염원이라고, 보균자라고 의심하는 사람⋯⋯.”

순간 말실수했음을 알고 용애홍이 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용여홍은 멍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또?”

용애홍은 부모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오빠들이 이 액운의 근원이래. 오빠들이 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난 다음부터 이 층의 무심병 발병률이 높아졌으니까, 밖에서 발견한 불길한 무언가를 회사 안으로 갖고 왔을 거라는 거지.”

그게 바로 무심병 바이러스나 실체화된 액운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용지고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증거까지 들더라고. 형들이 처음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을 때는 심도환 아저씨와 임결 아줌마가 무심병에 걸렸고, 이번에는 장 아저씨가 당했다고 말이야.”

용여홍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

“근데 우리가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을 때는 누구도 무심병에 걸리지 않았잖아. 최근에 무심병이 폭발했을 땐 우린 아예 회사에 없었고.”

하지만 용여홍은 켕기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심도환과 임결이 무심병에 걸린 건 분명 성건우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사실상 그들은 비밀 유지를 위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에 가까웠다.

“맞아! 내일은 그렇게 반박해야지!”

용애홍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이어, 용대용은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부인 고홍자의 얼굴을 힐긋 살피다 큰아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너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무심병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어. 그 병을 못 본 척 대를 거듭해 살아왔지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위력에 겁나니까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 것뿐이지. 더 이상의 감염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할 거다.”

용여홍도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짐짓 밝은 척 자리에 앉았다.

“네, 이해해요. 우리도 지상에서 무심자를 한두 번 맞닥뜨린 게 아니거든요. 근데도 누구 하나 감염된 적이 없었어요.”

일순간 부모님과 동생들의 표정이 약간 이상해졌다.

그 반응을 보자, 용여홍도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아, 차라리 밖에서 무심자랑 많이 만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걸. 괜히 가족들만 더 불안해지잖아.’

* * *

622층, B구역 59호.

백새벽은 창문 앞 책상에 휴대용 컴퓨터를 올려두고 전원을 켰다.

이미 D6이 됐고, 평소 식사는 식당에서 해결하고, 소등 시간엔 때맞춰 잠드는지라 주어진 에너지로 매일 두세 시간 정도는 컴퓨터를 할 수 있었다.

차가운 물을 벌컥 마신 후, 백새벽은 코믹 프로그램을 틀었다.

사실 구세계 농담 중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서 진심 어린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웃음소리와 촬영 이후 추가된 방청객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퍽 편안하고 차분해졌다. 심지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고요한 방에 웃음소리가 잔잔히 번지는 가운데, 백새벽은 초점 없는 눈으로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오른손을 뻗어 책상 서랍을 연 그녀가 금이 가고 묵직한 부품을 하나 꺼내 들었다.

고개 숙여 그 부품을 바라보다가 백새벽은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네 말대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볼게.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거야.”

* * *

495층, B구역 196호.

자체적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거의 다 회복한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후, 성건우들은 재차 심령의 복도에 진입해 522호 방에 이르렀다.

두 차례 경험에 힘입어 가장 안전한 노선을 따라 능숙하게 이동한 성건우는 폐허의 특정 지역에 잠입했다. 이곳에 이르는 데까지의 과정은 필연적인 몇 차례 전투를 제외한다면 아주 평탄했다.

그 전투 역시도 당시엔 아직 각성자가 아니었던 방 주인을 빠르게 해치운 뒤 다른 무심자들이 몰려들기 전에 이동했던지라 별 문제도 없었다.

성건우는 그들을 처리하는 데 거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큰 기척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중 한 차례 전투가 워낙 조용히 끝나서 그런지, 당시 방 주인의 경험과 달리 사방팔방에 있던 대량의 무심자들이 몰려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성건우는 원래의 안전 노선상 무심자를 만나서는 안 될 곳에서 배회하고 있는 무심자 몇 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게 바로 나비 효과라는 건가? 내가 전투를 심하게 깔끔하게 끝내버려서, 원래는 그쪽으로 쏠렸어야 할 무심자들이 제자리에 남아있게 된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던 성건우가 갑자기 또 새로운 의문을 떠올렸다.

‘이 광경에는 방 주인의 트라우마가 반영돼 있어.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이곳의 무심자를 맞닥뜨리기 전부터 그런 변화를 일으킬 생각을 했을까?’

이내 그가 씩 웃었다.

‘그야 간단하지. 여긴 인간의 썩은 팔다리가 널려 있잖아. 조금 전까지 무심자가 있었다는 증거.

방 주인은 당시 이것들을 보고 앞선 전투에서 기척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후에 더 힘든 전투를 치르게 될 거라 생각한 거야. 그리고 그 추측은 그 사람 잠재의식 속에 남아 이 트라우마의 숨겨진 규칙이 된 거고.’

스스로를 설득한 성건우는 계속해서 이 자리에 남아있는 대신 방 주인의 이동 노선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이상하게도 이전의 규칙대로 방 주인이 만난 무심자의 수는 갈수록 줄었고, 그 급은 점점 더 높아졌다. 나중엔 심지어 고등 무심자까지 출현했다.

그러나 지난번의 한계를 돌파하고 그 고등 무심자에게서 벗어난 후론 더 이상 무시무시한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반적인 무심자도 없었다.

이때 유약하고 겁이 많지만 신중한 성건우가 말했다.

“이 구역에 존재하는 더 위험한 생물 때문에, 무심자들도 감히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걸까?”

사슴사냥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생물이 아닐 수도 있지.”

유약한 성건우의 추측에 간접적으로 동의를 표한 것이었다.

“이제 어쩌지?”

어린 시절 입던 옷을 크기만 키워 입은 듯한 성건우가 물었다.

전부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던 성건우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당연히 계속해야지! 그때 당시 각성자도 아니었던 방 주인도 살아남았는데, 우리한테 별일이 있겠어?”

유약하고 겁 많은 성건우가 바로 반문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번 탐색 중에 무언가와 맞닥뜨리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됐을지도 모르잖아?”

“맞아, 맞아.”

다른 성건우가 동조했다.

이때 소형 스피커를 쥔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난 우리가 이렇게 나뉜 상태에서 움직이다가 그중 한 명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우리 인격은 불완전한 아홉 개로 남게 될까, 아니면 저마다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있는 열 개로 회복될까? 한번 시도해볼래?”

이 안건에 대한 찬성표는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성건우는 다 반대했다.

한 차례 토론을 거친 후 다시 하나로 합쳐진 성건우는 조심스럽게 방 주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이 구역 안쪽으로 진입했다.

한창 걷던 중, 전방에 7층짜리 건물이 한 채 나타났다.

아주 오래돼 보이는 건물 벽은 초록색 덩굴식물에 뒤덮여 있었다.

그 건물을 살피던 성건우는 입구 위쪽에 붙은 간판을 발견했다.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

그 간판을 보자마자 성건우는 탄식을 내뱉었다.

뒤이어 그의 옷은 노란색 승복에 붉은 가사 차림으로 바뀌었다. 얼굴 역시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한 메탈블랙 색으로 변했다. 눈에서 발산되는 붉은빛 때문에 빨간 베일 한 겹이 드리운 것만 같았다.

이곳은 불가의 5대 성지 중 하나니, 응당 부합하는 예의를 갖춰야 했다.

신분을 바꾼 성건우는 한 손을 가슴 앞에 세우고 한 손으로는 육식주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연이 있으면 천 리 먼 길 떨어져 있어도 만나는 법이지요.”

그의 손에 들린 육식주는 그저 장신구일뿐 아무 효과도 없었다. 본체는 안전부 전문 기구에서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염불을 외운 반기계 승려 성건우는 성큼성큼 걸어가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 문 앞에 이르렀다.

1층의 입구는 회전문이지만 일찍이 동력을 잃은 듯 멈춰있었다.

성건우도 굳이 고집 세우지 않고 옆쪽의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방 주인 역시 당시에 그런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도중에 놓인 갖가지 사물의 세세한 부분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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