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대가 (2)
말인 영역에 따르는 대가에는 기억 손실, 수면 장애, 특정 방면에서의 자율성 결핍이 있었다. 장목화는 이런 대가들이 평소 상태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에 이 영역도 포기했다.
보리 영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장목화는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싶지도 않았고, 감각 기관에 이상이 생기는 것도 싫었으며, 거짓말을 못 하게 되는 것도 싫었다. 거짓말할 수 없다면 중요한 순간에 골치가 아파질 터였다.
또한 욕망 증강 유형의 대가도 팀에게 피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사명 영역에는 사지 마비와 졸음이라는 대가가 따랐다. 그 역시 원치 않았다. 전자는 전투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었고, 후자는 사고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다만 안구 이상이라는 대가는 기껏해야 추해질 뿐이라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그녀는 이 영역은 일단 후순위로 미뤄두었다.
깨진 거울 영역에 따르는 대가 중 빛이나 물, 거울 공포증처럼 일상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들키기 쉬운 대가도 바로 제외했다.
폐소 공포증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가상 세계의 주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은 건 안면 인식 장애와 길치인데, 전자는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우니 굉장히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지만, 후자는 꽤 고려해볼 만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는 미각 이상, 안구 이상, 길치를 두고 고민하다가 10여 초 후에 결정을 내렸다.
길치!
이는 생체 공학 의수의 보조 칩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었다.
물론 주위 환경에 대한 관찰력과 기억력도 동시에 떨어지겠지만, 중요한 상황에서는 관찰하면서 기억할 수 있으니 잊어버리거나 실수할 걸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또 늘 팀과 함께 움직일 테니 해결책도 얼마든 존재했다.
한숨을 내쉰 장목화는 별빛으로 이루어진 인영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치를 대가로 능력을 얻겠어.”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고공에서 세 개의 별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각기 다른 빛 덩어리가 된 별들이 장목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각각의 빛 덩어리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공간 환각] [물품 인식 불능] [자극 장애]
빛 덩어리가 몸에 스며들자마자, 장목화는 약간의 변화를 느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이게 각성의 느낌일까?’
장목화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지만 달라진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홀 중앙에 자리한 별빛 인영이 살아난 듯 가장자리로 물러나면서 장목화와 멀리 떨어졌다.
장목화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냥 진작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조금 전 거울처럼 매끄러운 검은색 금속 벽에 의지해 스스로에게 공간 환각 능력을 사용해 보아서였다.
‘이 능력은 공간에 대한 목표의 감지를 방해해서 전후좌우, 상하 원근을 헷갈리게 만드는 거구나. 게다가 어느 정도의 단절과 재구성도 가능한 것 같네. 조건에 부합하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거야. 물론 이런 방면의 심층적인 탐색은 기원의 바다에 들어가 한두 개의 섬을 극복한 후에나 가능하겠지.’
장목화는 당장 현실 세계로 돌아가려 하지는 않았다. 지금쯤 그녀는 생체 공학 와우 이식 수술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녀는 물품 인식 불능과 자극 장애 능력도 발휘해 보았다.
하지만 거울 같은 매개체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뭇별 홀 안에 실질적인 물체나 자극이 결핍돼 있어선지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렇다면 그냥 이름을 통한 기본적인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물품 인식 불능은 목표한테 필요한 물품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환각의 일종일 거야. 뭐,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는데 우산을 들게 된다거나, 독을 바른 비수를 맛있는 버터크림 케이크로 착각해 먹게 된다든지.
자극 장애는 자극에 대해서 정확한 반응을 못 하는 거겠지? 손전등 빛에도 눈을 못 감는다거나, 위험한 줄 알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드는 건가?’
끊임없는 추측과 분석 속에 장목화의 피로도도 점차 짙어졌다.
이후 천천히 옅어지는가 싶던 그녀는 뭇별 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장목화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를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던 민수안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곧바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내 민수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좀 어때?”
그의 경험에 따르면 피실험자가 깨어나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제부턴 뭐든 치료할 수 있었다.
‘민 삼촌, 많이 흥분했나?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 아니, 잠깐만⋯⋯.’
장목화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귀를 만져보았다. 이전과 달리 금속의 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생체 공학 와우 이식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구나!’
청력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 그녀의 귀엔 두꺼운 피부 한 겹이 더해져 있었다. 그러나 귀가 완전히 틀어막히진 않아서 언뜻 봐서는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었다.
안도한 장목화는 지금의 상태에 적응하려 노력하며 일어나 앉았다.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민수안의 질문에 답했다.
“아주 좋아요. 아, 저 각성했어요.”
흠칫 놀란 민수안이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성공했다고?”
장목화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안은 금테 안경을 추켜 올리며 옆머리를 긁적이더니, 의혹이 어린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마지막 단계에 음악이 있으면 각성 성공률이 높아지나?”
‘건우가 정말로 좋아할 추측이네요.’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떠보듯 물었다.
“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생체 공학 의수 이식 수술은 그렇게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끝나자마자 바로 떠날 수 있는 수술도 아니었다.
그러나 민수안은 끄떡없다는 듯 가벼운 몸놀림으로 침대에서 뛰어내린 장목화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확실히 신체 소질이 뛰어나구나. 유전자 개조 효과가 상당히 좋은 모양이야. 근데 내 생각에는 조금 더 쉬면서 30분 정도 관찰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괜찮은데, 혹시 모르니까.”
고개를 움직이다 약간의 현기증을 느낀 장목화가 소리 내 답했다.
“알겠어요.”
다시 민수안이 물었다.
“어느 영역을 선택한 거야?”
“깨진 거울이요.”
장목화는 숨김없이 답했지만, 능력과 대가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각성자에게 그건 비밀로 유지해야 할 사항이었다.
민수안 역시 더 캐묻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돌아가면 관련된 자료를 제공해주마. 조금 더 빠르게 기원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다 민수안은 저도 모르게 덧붙였다.
“절대 너희 팀의 성건우씨처럼 그렇게 마구잡이로 굴면 안 돼.”
‘그게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던가요? 오랫동안 정신적인 문제를 앓아온 사람이 아닌 이상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짓이잖아요.’
장목화는 속으론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30분이 더 흘렀는데도 별다른 문제가 나타나지 않자 장목화는 민수안을 향해 예의 바르게 말했다.
“민 삼촌, 저 가봐야겠어요.”
“그래, 사흘 뒤에 검사받으러 와라.”
민수안은 C-14 프로젝트팀 사무실 문까지 장목화를 배웅했다.
그 사이 자신이 치른 대가를 떠올린 장목화는 얼른 생체 공학 의수 안의 보조 칩에 한 가지 정보를 추가했다.
[647층 14호로 돌아가야 함.]
이렇게 한다면 길을 잃고 다른 층으로 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문가에 서서 떠나는 장목화를 지켜보던 민수안은 오늘의 실험 과정을 복기했다. 또 한 번 겪은 실험에서 더 많은, 유익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색에 빠져드는 연구광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민수안은 다시 또 돌아온 장목화를 발견했다. 그는 바로 친절하게 물었다.
“왜 그러니?”
약간 멍한 표정이 된 장목화는 머지않아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었다.
“어, 민 삼촌, 질문이 있어서요.”
“뭐?”
민수안은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 조금 더 다정한 얼굴을 했다.
잠시 장목화의 눈동자가 살짝 굴러갔다.
“C-14 프로젝트는 신청만 하면 실험에 참여할 수 있는 거죠? 어떤 직급의 직원이라도 가능한가요? 외부 출신이라도요?”
민수안이 웃었다.
“물론.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게 늘 지원자 부족이었거든.”
“아⋯⋯. 그럼 전 가볼게요.”
장목화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거긴 왜?”
의아하다는 듯 묻는 민수안을 보고,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아무 데나 가리킨 거예요.”
이내 그녀는 가리켰던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647층.
한동안 오지 않는 팀장을 기다리던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은 알아서 트레이닝 룸에 들어가 오늘의 단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단련을 마치고 컵에 든 물을 모조리 마셔버린 성건우는 땀을 훔치며 사무실로 향했다.
몇 걸음을 막 내디뎠을 무렵, 맞은편에서 장목화가 걸어왔다.
“지각이에요!”
성건우의 지적에도 장목화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 오늘 휴가 냈어. 생체 공학 와우 이식 수술을 받았거든.”
눈을 반짝이던 성건우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더니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효과는, 좋나요?”
“아주 좋아!”
장목화가 이를 악문 채 답했다.
짝짝짝!
성건우는 언제나처럼 손뼉으로 축하했다.
장목화는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보다가 더는 언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서 계속 단련해.”
자신을 그대로 스쳐 가는 장목화를 보고, 성건우도 아무 말 없이 계속 걸어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 * *
사무실로 들어온 성건우는 따뜻한 물을 받았다.
잠시 후, 오전 단련을 다 마친 팀원들도 샤워한 뒤 14호로 들어왔다.
사무실 안을 슥 훑어보던 용여홍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 팀장님 아직도 안 오셨네⋯⋯.”
“나 아까 팀장님하고 복도에서 만났어.”
성건우가 말했다.
“아, 그럼 보고하러 가셨나 보다.”
백새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목화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무실에 있는 동료들을 보고 이마를 한번 훔쳐낸 그녀가 싱긋 웃었다.
“단련은 모름지기 알아서 해야 하는 법이지.”
“팀장님, 보고하러 다녀오셨어요?”
용여홍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사무실 안으로 걸어오며 장목화는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생체 공학 와우 이식 수술을 받고 왔어. 그리고 각성 실험도.”
성건우는 단박에 중점을 파악했다.
“각성하셨어요?”
장목화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곧바로 성건우의 거침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능력이랑 대가는요?”
장목화는 잠시 고개를 틀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나가서 얘기해줄게.”
물론 팀 동료들에게까지 능력과 대가를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까운 사이인 것을 떠나 그래야만 서로에게 잘 협조해 부작용의 영향을 줄일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하기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백새벽이 말했다.
“그럼 저도 오늘 생체 공학 의수 이식과 유전자 개조 수술을 신청할게요.”
“그래.”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전에 내일과 뜻밖의 사건 중 무엇이 먼저 올지 알 수 없다고 했던 건, 스스로도 각성자 실험을 받고 깨어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였다.
만약 장목화가 깨어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된다면 백새벽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었다.
백새벽은 계속 구조팀에 남아있을지부터 생각하게 될 테고, 종국엔 구조팀을 떠나야겠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유전자 개조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뜻밖의 사건을 고민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