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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530화 (530/649)

530화. 대가 (1)

두꺼운 솜 코트를 걸친 채 손전등을 들고 밖을 나선 용여홍은 가장 가까운 공용 화장실로 향했다.

편안하게 볼일을 보고, 그는 다시 손전등 불빛에 기대 걸음을 옮겼다.

소등 시간 이후의 추위는 일찍이 면역이 되었다. 그는 귀중한 지열 에너지가 모종의 기술로 거의 생산구역으로 보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에너지 구역에서 제공되는 일상생활용 에너지는 저녁에는 아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아끼는 것이 좋았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가 용여홍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용여홍은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파악하자마자 오른손을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그의 팔이 묵직해졌다. 검은 그림자의 무게가 실린 탓이었다.

손전등 불빛 아래, 용여홍은 비로소 습격자를 제대로 확인했다.

익숙한 얼굴인 것을 보니 부근에 사는 이웃인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 혼탁해진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다.

무심병!

또 누군가 무심병에 걸린 것이었다.

용여홍의 마음이 졸아들던 사이, 그의 오른손바닥 중앙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의식적인 반응에 따른 결과였다.

용여홍은 황급히 본능을 억누르며 레이저 발사기의 사용을 포기했다. 레이저는 벽이나 바닥을 관통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용여홍은 강철로 만들어진 오른팔을 흔들며 무심자를 떨쳐냈다. 그 후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려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퍽!

그의 주먹에 맞아 움푹 팬 무심자의 머리에 거대한 상처가 났다. 그렇게 천천히 쓰러지는 상대를 보며, 용여홍은 기계 팔의 위력에 충격을 받았다.

‘나 이제 겨우 회복을 마쳤는데, 이렇게 간단히 무심자를 해치웠다고?’

단순한 주먹의 힘만 해도 장목화의 생체 공학 의수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단단한 정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10여 초간 넋이 나갔던 용여홍은 그제야 돌아서 질서 감독실로 향했다.

* * *

다음 날 오전, 647층 14호, 구조팀 사무실.

“어젯밤에 또 무심자가 나타났다던데?”

막 할 일을 마치고 트레이닝룸으로 갈 준비를 하던 백새벽이 물었다.

오늘 아침 라디오로 접한 뉴스인데, 회사 토박이 성건우와 용여홍이라면 자신보다 소식이 더 빠를 듯해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성건우가 용여홍을 돌아보자, 용여홍은 백새벽을 쳐다보았다.

“아, 내가 마주쳤어.”

백새벽은 놀라 눈이 좀 커졌다.

“괜찮아?”

“괜찮아. 나름 가볍게 처리했지.”

용여홍이 미소를 지었다.

안도한 백새벽은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올해 회사의 무심병 발병률이 좀 높아진 것 같지 않아?”

성건우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이따 큰 흰둥이 팀장님한테 알아봐달라고 하자.”

장목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그제야 용여홍은 그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출근 시간에서 벌써 20분이나 지났을 때였다.

* * *

지하 빌딩 3층, C-14 프로젝트팀.

장목화는 전술 배낭을 멘 채 민수안을 만났다.

민수안이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카 왔구나? 네 생체 공학 와우 이식 수술을 담당할 팀이랑 관련 설비, 기자재 준비는 이미 다 됐다. 네가 불편하지 않게 우리는 되도록 한 번에 일을 처리할 생각이야.”

장목화는 각성 실험의 마지막 단계에서 마취를 받고 깊이 잠들 예정이었다. 그 단계를 둘로 나눠 전반부에는 그녀를 각성시키고, 후반부에는 생체 공학 의수를 이식하는 것이 민수안의 계획이었다.

시간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민 삼촌.”

장목화는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마취약 효과 아래, 그녀는 지각을 잃고 암흑 속에 빠져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두려웠다. 그러니 한 번에 두 가지 작업을 끝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민수안이 점점 더 엄숙하게 표정을 굳혔다.

“정식으로 시작하기 전, 너한테 꼭 해줄 말이 있다. 너도 이미 알겠지만, C-14 프로젝트의 위험성은 굉장히 낮긴 해도 아예 없다고 볼 순 없어.

피실험자는 0.5퍼센트 확률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20퍼센트 확률로 각종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그중에 초조함, 조광증, 단기기억 상실 등이 있지. 한동안은 피부에 알레르기 등이 생길 수도 있고. 근데 이런 문제는 치료받으면 대부분 호전되고, 후엔 완전히 회복될 거야.

실험 성공률로 말할 것 같으면, 각성 확률은 굉장히 불안정한 편이야. 어떨 때는 한 차례 만에 두세 명이 각성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서너 차례 실험을 진행하는 동안 각성자가 아예 나타나지 않기도 하거든.

또 연속해서 실험 받는 사람의 경우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수직으로 상승한다. 그건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깝지.

그러니까 모카야,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결정을 번복해도 돼. 기회는 아직 충분하단다. 넌 벌써 D9급이니 관리층에 진입하는 건 시간 문제야. 만약 네가 내 딸이었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그만큼 위험해.”

민수안이 내쉰 긴 한숨엔 부모의 마음도 고려해보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민 삼촌, 잘 아시겠지만 전 여태 줄곧 밖에만 나돌아다녔어요. 맡은 임무도 다 위험한 것이었고요. 그 당시 사망 확률도 뭐, 0.5퍼센트는 우습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는 사실 어머니 설수민과 이 일로 상의해본 적은 없었다. 일단 아버지와만 일을 저지른 후에 말할 생각이었다.

민수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이미 결정이 선 거라면 나도 할 말은 없지. 바로 시작하자.”

이윽고 그는 여성 연구자 한 명을 부른 뒤, 장목화의 환복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어질 와우 이식 수술을 위해서였다.

왠지 견학 중이거나 함께 연구하는 듯한 기분이 된 장목화는 침착하게 지시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잘 내려놓고,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가 나온 후에는 주사를 한 대 맞기도 했다.

뒤이어 장목화는 세 종류의 광선을 연달아 맞은 뒤, 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 좁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왔다. 이곳에서도 벌써 15분이 지났다.

성건우가 설명해준 절차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지난 1년여간 C-14 프로젝트에는 많은 진척이 있던 모양이었다.

* * *

실험의 말미에서 장목화는 은백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방으로 안내됐다.

이곳에선 여러 의료진이 설비들 부근에서 각자 기다리고 있었다.

“자, 침대에 누워보렴.”

민수안이 방 중앙에 고정된 이동식 수술 침대를 가리켰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인 뒤 침대에 올라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제 마취제를 주입할 거다.”

민수안이 간단히 설명했다.

그와 동시에 연구자 두 명이 의료함을 들고 들어왔다.

“잠깐만요!”

순간 손을 쳐든 장목화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그러냐?”

민수안이 침착한 태도로 물었다.

장목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음악을 틀어주실 수는 없나요?”

곧 통제할 수 없는 어둠에 빠질 거란 생각에 긴장이 된 듯했다.

민수안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음악?”

장목화는 상대의 마음을 사기 위해 웃어 보였다.

“민 삼촌, 음악을 틀면 마음이 좀 안정될 것 같아서 그래요. 마취제 주입이 끝나는 대로 바로 끄셔도 돼요. 음악은 제 컴퓨터에 있고, 컴퓨터는 제 배낭에 있어요. 죄송하지만 그걸 좀 가져와달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실험에 있어 절차 엄수를 중시하는 민수안은 마음 같아서는 그것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취제를 주입하는 대로 음악을 꺼도 된다는 장목화의 말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문제가 될만한 일도 아니잖아. 어차피 지금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마당에 음악을 튼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겠어?’

속으로 중얼거리던 민수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곧 한 연구자가 장목화에게 열쇠를 받아들고 그녀의 배낭을 가져왔다.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는 민수안의 지시에 휴대용 컴퓨터는 은백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방까지 들어오지는 못하고 그 입구에 놓였다.

장목화가 따로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컴퓨터에 꽤 익숙한 연구자들은 막힘없이 음악 플레이어를 실행했다.

- 어렸을 적 꿈을 아직 기억하니…….

은은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사이, 두어 번 심호흡을 한 장목화는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몇 초 후, 살짝 눈을 떠 주위를 살피던 그녀가 다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주삿바늘을 가리켰다.

“왜 이렇게 두꺼워요?”

마취 담당 연구자가 설명했다.

“신체 소질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마취제 양도 다릅니다.”

“제가 무슨 코끼리예요?”

“일반인에게 놓는 양보다 아주 살짝 많을 뿐입니다.”

재차 반박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장목화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냥 눈을 감고 벌렁 드러누웠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 어렸을 적 꿈을 아직 기억하니⋯⋯.

그녀는 반복 재생되는 노래에 집중하며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잠시 후,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장목화는 이제 서서히 혼미한 어둠에 잠길 것을 직감했다.

* * *

몽롱하고 아득한 와중, 장목화의 눈앞에 빛이 나타났다.

느릿하게 눈을 뜬 그녀는 낯선 곳에 이른 자신을 발견했다.

이곳은 이상하리만치 넓고 이상하리만치 텅 빈 홀이었다. 사방의 벽은 서늘한 빛을 번득이는 검은색 금속으로 이뤄져 있었다.

홀의 상공은 밤하늘처럼 어둑했다. 그 하늘에 빼곡한, 느릿하게 돌아가는 별들은 서로 뒤얽혀 무려 열세 개나 되는 몽환적인 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별들에서 나온 빛은 홀에 내려앉아 하나의 흐릿한 인영으로 뭉쳤다.

대칭을 이루듯 두 팔을 양옆으로 뻗은 인영은 꼭 이 세상을 끌어안으려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저울을 흉내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웅장하고도 공허한 목소리가 홀에 연거푸 울려 퍼졌다.

“하나의 대가, 세 개의 은혜. 하나의 대가, 세 개의 은혜⋯⋯.”

이 광경을 보고서야 장목화는 자신이 자리한 이곳을 대충은 짐작했다.

뭇별 홀!

언젠가 성건우가 묘사했던 뭇별 홀과 똑같았다.

‘내가 각성했어! 실험이 성공한 거야!’

기뻐하던 장목화는 갑자기 또 강렬한 의혹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운이 뛰어나게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미 실패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뜻밖에도 상황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순조로웠다.

‘설마 나한테 각성에 부합한 어떤 조건이 있었나? 아니면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고, 어떤 존재가 축복을 내려주셨나?’

장목화는 똑똑한 사람이었고, 똑똑한 사람은 늘 생각도, 의심도 많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그녀는 홀 가운데 인영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여기까지 왔으니만큼 이유가 무엇이든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했다.

평소 각종 방안을 세우길 좋아하는 장목화는 어느 영역의 능력을 각성할지는 벌써 다 정해두었었다.

그녀 생각엔 장생, 보리, 여명, 말인, 깨진 거울, 사명 영역이 자신의 다른 특징이나 구조팀의 구체적인 상황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일단 구조팀엔 이미 장생 영역의 각성자가 있고, 성건우의 실력까지 매우 강해서 그 영역은 배제하기로 했다.

나머지 중에 장목화가 아는 것을 정리해보자면 우선 여명 영역 대가엔 간헐적인 혼수상태, 정신 분열, 오감의 이상이 있었다.

앞의 두 가지는 선택할 생각도 없었고, 다섯 가지 감각 중 미각에 이상이 생기는 게 가장 나았으나 그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 사라졌다.

씁쓸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음식을 통한 위안마저 얻을 수 없다면 짙은 우울감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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