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재진입
495층, C구역 11호.
집에 돌아온 용여홍은 거실에서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남동생 용지고를 보았다. 여동생 용애홍은 옆에서 폴짝폴짝 뛰며 노트북을 차지하려 용을 쓰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는 듯했다.
“또 컴퓨터 해? 대학 입학시험이 코앞이잖아!”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오랜만에 큰형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용지고는 고개를 힐긋 돌리더니 못 말린다는 듯 대꾸했다.
“형, 벌써 11월이 다 됐어. 시험은 벌써 끝났고, 이미 입학도 했다고.”
멍한 표정을 드러낸 용여홍은 너무 오랫동안 밖에 나가 있던 탓에 시간 개념이 없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구조팀이 회사를 떠난 건 봄이었고, 지금은 벌써 늦가을이었다. 용지고의 마지막 복습과 시험, 지원 같은 일들을 모조리 다 놓친 것이었다.
“하하. 내 기억이 아직 출발 전에 멈춰있네.”
용여홍이 머쓱하게 웃었다. 지난 며칠 동안에도 가족의 대화는 오로지 용여홍이 밖에서 겪었던 일에만 집중돼 있어 가족의 소식은 전혀 몰랐다.
다시 용지고가 무슨 대꾸를 하기도 전, 용여홍이 먼저 의아하게 물었다.
“근데 주말도 안 됐는데 집에는 무슨 일이야?”
용지고가 해맑게 웃었다.
“우리 형이 집에 왔잖아! 교수님께 말씀드렸어. 앞으로 며칠 동안은 집에서 등하교하겠다고.”
용애홍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용지고의 속셈을 까발렸다.
“무슨! 그 틈을 타 컴퓨터 하려는 핑계지! 오빠! 얘 좀 혼내줘!”
용지고가 얼른 해명에 나섰다.
“형, 형도 알지? 학교 수업 중에 컴퓨터 관련 수업은 일주일에 몇 개도 안 돼. 더 많이 배우려면 집에 있는 컴퓨터를 쓸 수밖에 없다고.”
그 말에 용애홍이 코웃음을 쳤다.
“뭘 배우려고? 구세계 콘텐츠?”
용지고는 못 참겠다는 듯 동생을 홱 노려보았다. 구세계 콘텐츠 몇몇은 완전히 거짓부렁이었다. 세상에서 여동생이 제일 귀엽다니! 세상에서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을 줄 세우면, 제일 코앞에 이 여동생이 있을 것이었다.
용여홍은 동생들 싸움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어서였다.
‘작은 흰둥이가 그랬지. 집에 돌아가면 보통 방에서 쉬면서 컴퓨터를 한다고. 근데 이번에 퍼스트 시티에 갔을 때 수종이를 꼬드기려고 새벽이 휴대용 컴퓨터를 내줬었잖아? 그 경비로 받은 돈은 회사로 돌아오는 동안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마련하는 데 썼고.
결국 새벽이가 받은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던 거야. 그럼 여태껏 집에서 지내는 동안 너무 무료하지 않았을까?’
용여홍의 시선은 자연스레 거실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으로 향했다.
그러자 용지고와 용애홍은 동시에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 * *
B구역 196호.
성건우는 아직 정각 뉴스가 시작하지 않은 틈을 타 침대에 기대듯 눕더니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사실 더 이상 이런 동작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성건우의 인격 열 개 중 대부분은 의식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심령의 복도 131호로 들어온 성건우는 벽에 걸린 액정 TV를 보고 그 안에 담긴 수종이의 기운을 향해 연거푸 외쳤다.
“수종아! 수종아! 수종아!”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게임에 빠졌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성건우는 결국 이 시도를 포기했다.
다시 암황색 두꺼운 카펫이 깔린 복도로 나온 성건우는 또 한번 522호 앞에 이르렀다.
“아직 있네⋯⋯.”
성건우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에는 여지없이 그 폐허 도시가 떠올랐다. 차들은 곳곳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어둠 속 벽들은 보일 듯 말 듯 했으며, 수시로 거대한 피 웅덩이가 나타났다. 유리창은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게 없었다.
성건우는 다급히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대신, 지난번 습격을 받았던 그 장소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한 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에서 무심자가 튀어나왔다.
지난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이번엔 다쳐도 어떻게 되는지 시험해보지 않았다.
툭……!
높은 곳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광고판만 그대로 떨어지며 차에서 튀어나온 습격자를 덮쳤다.
성건우가 순간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알겠다! 저장본을 불러오는 거구나.”
이 트라우마 속 각각의 상황은 정신이 회복되면 초기화되는 모양이었다.
이론적으로 이런 초기화에서 세부적인 것 대부분이 그대로 복원되나 그중 일부는 바뀌었다. 결론적으로 이는 방 주인의 무의식적인 심령 활동이므로 매번 완전히 똑같을 순 없었다.
냉정하고 총명한 성건우는 지난번 무심자들이 어디서 몰려나왔는지를 떠올리곤, 몸을 숙인 채 살금살금 움직여 길가의 어느 건물 안에 숨었다.
그로부터 몇 초 후, 여러 명의 무심자가 묵직한 물체가 떨어진 소리에 이끌려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주위를 한 바퀴 돌았음에도 먹이를 발견하지 못하자 분분히 어두운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성건우가 숨어든 곳은 구세계의 슈퍼마켓이었다. 이곳에 남은 먹을 것은 포장만 남아있거나 누군가가 싹 쓸어간 상황이었다.
그 외의 나머지는 쓰러진 선반으로 인해 바닥에 흩어지거나 원래 자리에 나름 온전하게 남아있었지만, 대부분의 이름은 틀렸거나 잘못돼 있었다. 전체적으로 사실적이지 못했다.
성건우도 이런 상황을 이해했다. 당시 숨거나 이동하느라 바빴을 방의 주인에게 이런 사소한 부분에 신경 쓸 여유가 있었을 리 없었다.
그의 잠재의식은 당시 상황을 재구성할 때 다른 경험에서 취한 정보로 보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모순적인 부분을 피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치약 형태에 ‘신 오렌지’란 라벨이 붙어있는 식이었다.
성건우는 자신이 흔히 쓰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구현한 뒤, 그걸 쥐고 슈퍼마켓의 다른 출구로 향했다.
이곳에는 다른 사람도 없고 무심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성건우는 훈련으로 익힌 기술을 발휘해 최대한 기척을 줄였다.
이 순간 그를 주도하는 건 거칠고 대담한 성건우가 아니었다.
또 다른 출구 근처에 이른 성건우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신문과 잡지가 꽂힌 소형 가판대를 발견했다.
[아이언마운틴 일보] [피플] ⋯⋯
흥미로운 듯 그쪽으로 다가간 성건우는 그중 두 개를 골라 대충 한번 넘겨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림과 문자 등이 또렷하게 드러난 표지와 달리 속지는 공백에 가까웠다.
방 주인은 당시 이곳을 분명 지나치기는 했으나 신문이나 잡지를 힐긋 보기만 했을 뿐, 자세히 살필 시간까지는 없었던 것 같았다.
일단 성건우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문 이름인 아이언마운틴 일보, 또 하나는 피플지 표지를 장식한 인물, 23세의 천재 과학자 인수영이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귀엽게 생긴 이 앳된 여성은 꽈배기처럼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사진과 제목 외에 표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신문과 잡지를 진지하게 몇 번 더 살핀 성건우는 다시 원래 자리에 놓고,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멘 채 걸음을 옮겼다.
방 주인이 도주한 길을 따라 이동한 그는 도시 반대편에 숨어들었다.
성건우는 이미 원주인이 지났던 곳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방법을 모두 다 파악한 상태였다.
세세한 부분들까지 사실감이 짙을수록, 현 상황에도 합리적일수록 방 주인이 지난 곳일 가능성이 컸다.
그에 반해 혼란스럽고, 모순적이고, 왜곡된 곳은 방 주인이 발을 들이지 않은 곳이었다. 잠재의식의 자체적인 보완을 거친 그런 곳에는 여러 경험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이후의 경과가 확실히 성건우가 찾아낸 이 규칙이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했다. 그렇다고 성건우의 여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방 주인이 숨고 이동했던 과정에 곡절이 많았던 까닭에 그 역시 적잖은 습격을 받아야 했다. 몇 번이나 위험에 봉착했던 그는 자체적인 실력과 어느 정도의 행운을 기반으로 겨우 그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았다.
사실 성건우는 타인의 트라우마 속에선 인간 의식을 감지하지 못해도, 조심만 하면 특수한 능력이 없는 무심자들에게 무리 없이 대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총을 쏘는 순간부터는 큰 소리에 이끌려 몰려드는 대량의 무심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포기하고 소음기가 장착된 연합202와 아이스모스로 무기를 바꿨다.
소음기는 확실히 도움이 됐지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그를 습격하는 무심자 역시 소리 내 동료를 끌어들이면서 수적으로 성건우를 압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성건우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리얼리티 RPG 게임을 하듯 정신력을 아끼기 위해 노력하며 적들을 소탕하고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위험한 상황들까지 꼼꼼히 기억했다. 다음에 다시 왔을 때는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정신력이 거의 바닥났을 무렵, 성건우는 과감하게 여러 명의 무심자를 형용할 수 없는 우울감에 빠뜨렸다. 그러고는 그 틈을 타서 전에 찾아둔 안전 경로를 따라 522호를 빠져나왔다.
그런 무심자 중에는 특수한 능력이 있는 고등 무심자도 있었다.
* * *
495층, B구역 196호.
눈을 번쩍 뜬 성건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방 주인이 이동한 경로상 적들의 수는 점점 줄었어. 근데 실력은 더 강해졌지. 아마도 그들은 폐허 도시 안의 특별한 무언가랑 접촉한 건지도 몰라. 음, 아이언마운틴 유적?”
한참 생각에 빠진 사이, 스피커에서 익숙한 앳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다시금 모든 게 고요해졌다.
* * *
다음 날 오전, 성건우는 495층의 직원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공교롭게도 용여홍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성건우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용여홍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 뭐 먹었어?”
용여홍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엄마가 어젯밤에 남은 음식을 몽땅 넣어서 국수를 끓여주셨어.”
반고 바이오 직원 대부분은 전날 저녁 남은 음식만으로 다음 날 아침을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 한꺼번에 다 넣고 끓여 국수를 만드는 습관이 있었다.
물자가 귀한 시대에 형성된 습관으로 만들어진 이 국수는 따지고 보면 무근자 야영지의 잡탕과 궤를 같이하는 음식이었다.
용여홍을 한번 훑어보던 성건우는 갑자기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컴퓨터는 왜 가져 왔어?”
지금 용여홍은 휴대용 컴퓨터와 마우스, 플러그까지 들고 있었다.
“아, 오늘 포상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잖아. 단련한다고 해도 몸이 안 받쳐 주니까 온종일 그것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휴, 아무것도 안 하고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건 너무 무료하잖아.”
성건우가 바로 서럽다는 듯 물었다.
“내가 골라준 구세계 콘텐츠를 무시하는 거야?”
지난 며칠간 용여홍은 647층 14호에서 할 일이 없을 때면 성건우와 함께 구세계 드라마를 봤었다. 그럴 때마다 백새벽은 장목화와 짝을 이뤘다.
용여홍은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야. 이게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래.”
이야기하는 사이 647층에 도착한 그들은 함께 14호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