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두 가지 질문
소지훈과 민수안도 이제야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끅.”
민수안은 분명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건만, 트림이 되어 나왔다.
이제 민수안도 이게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을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제8 연구원 특파원과의 전투에는 칸나가 개입해 있었고, 가상 세계의 주인과 대적했을 때의 성건우는 실질적으로 이미 심령의 복도 급에 이르러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상대의 대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가를 겨냥할 수 있는 도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승리하는 건 충분히 합리적인 일이니 달리 놀랄 이유가 없었다.
소지훈은 성건우의 이야기를 듣고 먼저 웃음을 보였다.
“역시 자네가 장문봉 씨 딸을 진심으로 따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장 팀장은 이점들을 하나하나 최대치로 활용했어. 적을 이용해 적을 치는 자네의 묘수도 아주 독특하고도 효과가 있었고.”
장기적인 정신 문제가 없었더라면 절대 생각해내지 못했을 수였다.
“정신병자는 워낙 다방면으로 사고를 하니까요.”
성건우가 겸손하게 대꾸했다.
순간 민수안은 성건우가 본인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재차 실감했다.
소지훈이 다시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하려던 질문은 다 했어. 덕분에 자네에 대해 더 똑똑히 알게 됐군. 앞으로 더 이상 심사는 없을 거야. 포상도 사흘 안에 내려질 거고. 근데 민 팀장 쪽에는 최대한 협조해서 여러 검사를 받아야 해. 그걸로 각성의 비밀을 한층 더 파악할 수 있다면, 다른 세력과 경쟁 중인 회사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저한테 전속 식당을 개방해주신다면요!”
성건우는 흔쾌히 답한 뒤 조건을 제시했다.
옆에 있던 민수안의 얼굴엔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조건이람?’
그러면서도 그는 얼른 그 조건에 응했다. 소지훈에게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이 혼자 결정해도 될 정도로 너무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조건 같지도 않은 조건이었다.
뒤이어 성건우는 좌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두 가지 질문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인격이 바뀐 건가? 변화폭이 상당하네.’
민수안은 소지훈을 쳐다보았다. 질문을 받아줄지는 그의 권한이었다.
소지훈이 바로 손목을 돌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으니 물어봐. 사실 그렇게 급하게 굴 거 없어. 관련 지식은 포상과 함께 지급될 거니까.”
성건우는 상대의 말은 아예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심령 방에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확인합니까?”
소지훈은 살짝 앞으로 몸을 기울인 자세 그대로 잠시 고민했다.
“처음 다섯 개 방을 탐색하는 동안은 그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 여섯 번째 방에 진입한 후부터 깊이 진입할수록 익숙한 느낌이 난다면,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이 거기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지.
트라우마 셋, 혹은 꿈 하나를 돌파하고도 그런 느낌이 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어. 그 방은 과감하게 포기해도 돼.
계속 의식 단련을 이어가며 정신력과 능력을 강화할 수도 있겠지만 방안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인의 의식과 가까워지고, 그에게 발각될 가능성도 커져. 상대와 맞닥뜨리게 되면 끔찍한 전투가 발발할지도 모르지. 장단을 고려할 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군.”
소지훈이 잠시 말을 멈추고 성건우를 살폈다. 그는 기록하지 않고 있을 뿐, 진지하게 경청 중이었다.
소지훈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현재까지 수집된 상황으로 볼 때, 그 대문은 신세계와 관련돼 있을 뿐만 아니라 각성자 자체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그래서 거기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거야. 이 점에 있어선 타인의 경험은 참고가 안 돼. 각성자마다 신세계의 대문을 찾는 방은 서로 다르니까.”
성건우는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대꾸했다.
“신세계에 진입한 회사 내 각성자들은 외부와 적잖게 접촉하나 봅니다.”
소지훈은 그 말에 답을 하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두 번째 질문은 뭔가?”
성건우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혹시 주위 방 번호가 갑자기 바뀐 적 있으십니까?”
민수안이 고개를 내젓는 동안, 소지훈은 더 자세히 물었다.
“얼마나 갑자기?”
“어젯밤에 본 번호와 오늘 본 번호가 서로 달랐습니다.”
성건우의 답변에, 소지훈의 짙은 눈썹이 가운데로 몰렸다.
“만약 문에 붙은 번호가 갑자기 사라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새로운 번호가 나타난 거라면, 방의 원주인이 죽은 후 새로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각성자가 그 방을 배정받은 경우일 거야. 근데 하루는 너무 짧지? 그렇게까지 공교롭지는 않을 텐데.”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까?”
성건우의 말투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호응에 가까웠다. 물어보지 않고서는 답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소지훈은 한동안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확실한 가능성은 아니지. 그냥 몇 가지 추측해볼 뿐인 거지. 드문 상황이기는 한데 오랜 세월이 쌓여왔으니 그런 사례도 분명 있었거든.
현재로서 가장 주류인 추측은 그런 방이 심령의 복도의 주인과 관련돼 있을 거라는 거. 방 번호를 조정할 수 있는 건 심령의 복도의 주인뿐이니까.
또 아주 많은 사람이 뭇별 홀, 기원의 바다, 심령의 복도가 달지기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믿지.”
탁!
성건우가 소리 나게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소지훈, 민수안이 동시에 의혹을 표하자 성건우는 얼른 설명을 이었다.
“전 복도만 좀 돌아다녔지, 아직 어떤 방도 깊이 탐색하진 않았습니다.”
“그래, 탐색은 신중히 해야 해. 그럼 이만 돌아가 포상을 기다리게.”
자리에서 일어난 소지훈이 성건우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성건우도 매우 예의 바르게 일어나 소지훈과 악수를 했다. 소지훈의 손은 마치 끓는 물 속에서 방금 건져낸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열이 나시는 겁니까?”
성건우가 친절하게 물었다. 지금의 그는 감정을 중시하는 성건우였다.
소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따뜻한 물을 많이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성건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제안했다.
* * *
647층, 14호.
성건우가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원들도 속속들이 돌아왔다.
장목화는 바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쪽은 어땠어?”
성건우 역시 즉각 이사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를 모두 들려주었다.
총 열 명의 성건우는 소지훈, 민수안, 심지어 그때그때의 성건우가 되어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했다.
물론 사람의 기억력은 완벽하지 않으니, 있는 그대로 똑같이 구현했다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의미만큼은 제대로 전달했다.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네. 소 이사는 군인 스타일이라 일 처리가 진짜 시원시원하다고 하더라고.”
장목화가 처음 보인 반응은 감탄이었다. 그녀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라면 그만한 대우는 당당히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상대의 요구 조건을 파악하고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만족시켜주며 양측 관계를 적절히 조정하고 나면, 기회를 봐서 또 겁을 주면 그만이었다.
사실 심사가 갖는 의미는 그리 크지 않았다. 특히나 성건우처럼 회사 토박이인 직원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설령 그가 외부의 특정 세력과 결탁해 있다 한들, 회사에서 섭섭하지 않게 대하고 최대한 만족을 시켜주면 다시 또 천천히 돌아올 것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반고 바이오에서는 누군가를 통제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어느 달지기의 신실한 신도가 된 건우가 생명을 바쳐서라도 회사에서 진행해야만 하는 어떤 비밀 임무를 맡은 게 아닌 이상에는 말이지.
근데 그런 사람이면 일반적인 심사는 물론이고 특수한 능력이 있는 각성자나 도구 앞에서도 그 사실을 발각당하진 않을 거야. 비밀 임무까지 맡은 사람이라면 그만한 능력이 있는 것일 테니까.’
장목화가 생각을 정돈하며 용여홍, 백새벽,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그래, 우리 심사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을 거야.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자. 내 생각에는 내일이면 포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장목화의 말을 듣고도 성건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하지 않았다.
“뭐가 더 있어?”
장목화가 아직도 그의 생각을 읽어내지 못할 리 없었다.
성건우는 기다렸다는 듯 숨김없이 물었다.
“1215호 문 뒤에 뭐가 있을 것 같아요?”
장목화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뱉었다.
“휴……. 네가 나한테 물으면, 난 누구한테 묻냐? 그거랑 관련된 지식은 우리 보안 등급으론 접할 수도 없어. 좀 전에 소 이사와 했던 얘기 뒷부분도 말해주면 안 되는 거였어. 그러니까 내 말은, 얘기해주려거든 며칠 더 기다렸다가 더 이상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이 없을 때 해야 했었단 말이야.”
그녀는 혹시 성건우가 자신의 진정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혹은 오해했을까 봐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장목화는 과학 기술 영역의 도청까지는 막을 수 있지만, 각성자 능력을 통한 도청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좀 전의 내용이 엄청난 금기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기껏해야 약간 주의를 받고 넘어갈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때, 성건우가 갑자기 깨달았다는 얼굴로 외쳤다.
“알겠다!”
장목화는 그가 뭘 알았는지, 얼마나 알았는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성건우가 방금 전 한 질문에만 간단히 답했다.
“그 문 뒤에 자리한 위험의 정도는 너와 내 예상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커. 나중에라도 혹시 그런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안 깊숙이 들어가면 안 돼. 우리가 신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 광경의 본질을 충분히 파악한 상황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야. 알겠지?”
문득 옆에서 듣고 있던 백새벽이 본인 추측을 이야기했다.
“그럼 어쩌면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장목화가 곧장 대꾸했다.
“정말 그렇다면 더더욱 들어가면 안 돼! 오레이 얘기 잊었어?”
용여홍도 아비아에게 직접 듣진 못했으나 장목화, 성건우에게 전해 들은 오레이 얘기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소스 브레인의 아버지, 퍼스트 시티의 황제 오레이 우비스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신세계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 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조사가 불가능한 지경이 아니면, 나도 절대 건우한테 신세계로 들어가 보란 권유는 하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로.”
말을 마친 장목화가 다시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심사도 끝났으니까 건우랑 여홍이 둘이 새벽이한테 구경 좀 시켜줘. 다른 층 활동 센터는 어떤지.”
장목화가 이 일에 나서지 않은 건 349층에 살기 때문이었다. 그 층의 활동 센터 역시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관리층과 그 가족에게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만 치중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용여홍과 성건우가 답하기도 전, 백새벽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포상을 받은 뒤에 다시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아요.”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도 동의했다.
“그러네.”
심사를 마쳤다고 해서 완전한 통과라고는 볼 수 없었다. 또한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처럼 회사 토박이들이야 곳곳을 멋대로 돌아다녀도 괜찮았지만, 외부 출신 직원인 백새벽은 아직은 신중하게 굴어야 했다. 모든 상황이 다 정리된 후에 다른 층을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더 온당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