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24화 (524/649)

524화. 마구잡이

성건우는 겸손을 떠는 대신 소지훈의 뒤를 따라 긴 소파의 끝자리에 앉았다. 민수안의 자리는 반대편 끝이었다.

모두 착석하자 1인용 소파에 앉은 소지훈이 호탕하게 웃었다.

“심령의 복도에 이르렀다면 더 이상은 아주 많은 것들이 중요치 않아지지. 난 줄곧 심사 같은 거 할 필요 없다고 얘기했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이 절차에 따라야 한대. 오늘 자네를 부른 건 세 가지 사항을 파악하기 위해서야. 그 외 다른 질문은 하지 않겠네.”

“그러시죠.”

성건우가 진지하게 응했다.

소지훈은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민수안과 인 선생의 보고를 떠올렸다. 그중 몇몇 구절이 깊게 인상에 남았었다.

이내 소지훈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 양손을 깍지껴 쥐었다. 그의 표정은 사뭇 엄숙해 보였다.

“첫 번째, 난 자네가 회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성건우는 자세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첫째, 활동 센터에서 개최하는 노래 대회와 춤 활동이 너무 적습니다. 둘째, 식당 식단을 며칠 더 일찍 공개한다면 직원들 의견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셋째, 몇몇 라디오 프로그램은 개선이 필요해 보입니다⋯⋯.”

“⋯⋯.”

성건우가 엉뚱한 답을 하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동문서답을 할 줄은 몰랐다. 듣고 있던 민수안은 순간 화들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성건우를 가르쳤을 언어 교사의 자질이 의심될 정도였다.

반면 소지훈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많은 경험을 했던 사람답게, 당시 안전부에서 각종 풍파를 경험하고 기이한 대가를 치른 각성자들도 적잖게 만났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저으며 웃을 뿐이었다.

“내가 물은 건 회사에 대한 자네의 태도야.”

지금 그의 얼굴은 약간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방안 온도가 서늘한데도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성건우는 매우 간단하게 답했다.

“저는 회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야 처음으로 지상으로 나간 거고요.”

소지훈은 그 답이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래, 회사는 우리 모두의 집이지. 더 많은 걸 얻거나 바꾸려면 스스로 더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해. 자네가 나와 대등한 수준에 이른다면, 혹은 나보다 더 강해진다면 이사회에 자네 자리가 없을 수 있겠나? 총인원이 정해진 조직도 아닌데 말이야.”

이 대목에서 소지훈은 민수안을 한번 바라보았다.

“회사 규정으론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바로 M1급 대우를 받을 수 있어. 근데 자네는 민 팀장한테 지금의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팀에 남고 싶다고 했다지? 그 팀의 팀장이 되는 일도 마다했고.

우리한텐 참 곤란한 상황이야. 장문봉 씨 따님이 아무리 승진한다 해도 기껏해야 D9에 그칠 뿐이거든. 관리층에 진입할 수는 없어. M1급 직원을 이끄는 팀장이 될 수는 없단 말이지.

잘 생각해봐. 정말로 M1급 대우를 포기하고, 현재 상황을 그대로 유지한 채 순서에 따라 한 단계씩 승진할 생각인 거야?”

성건우는 매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 머리를 가리켰다.

“저희가 한 팀을 이끈다면, 그 팀원들이 더 걱정됩니다.”

소지훈은 잠시 할 말을 골랐다.

“음, 회사 안에 남는 방안도 있어. 근데 이건 앞서 말한 두 번째 문제랑 관련돼 있지. 민 팀장이 전에 했던 질문을 한 번 더 하겠네. 자네가 추구하는 건 뭔가? 아니, 자네는 뭘 하고 싶나?”

성건우는 바로 상반신을 꼿꼿하게 세웠다.

“전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 저희는 무심병의 기원과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하려 합니다.”

소지훈이 웃었다.

“과연 자네가 장문봉 씨 딸을 따르는데 이유가 있었군. 자네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야. 그럼 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원래는 불모지 13호 유적에 누굴 보낼지, 호움 난임 센터 탐색을 누구한테 맡길지 고민 중이었는데 자네들한테 계속 맡기는 게 제일 낫겠어.”

“저희가 도움을 요청할 때는 도와주셔야 합니다.”

성건우가 당당히 조건을 내세웠다.

“문제없지, 다들 회사를 위해 일하는 거니까.”

그리고 소지훈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M1급 대우를 포기한다 해도 몇 가지 특전은 얻을 수 있을 거야. 예를 들면 심령의 복도와 관련된 지식, 별도의 공훈 점수 같은 것들.”

성건우는 잠깐의 생각 끝에 물었다.

“별도의 공훈 점수를 제11 고아원으로 직접 보내 주실 수도 있습니까?”

“물론.”

소지훈이 이렇게 작은 요구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워낙 일 처리가 빠른 사람이라 조금도 늑장을 부리지 않고 그가 알고자 했던 세 번째 사안의 파악에 나섰다.

“자, 그럼 이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된 경위를 말해보게. 자네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부분은 언급하지 않아도 돼. 난 대략적인 이해를 하려는 것일 뿐이니까. 어쩌면 그걸 바탕으로 제안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성건우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했다.

“원래는 굉장히 정상적이었습니다. 두세 달 동안 능력에 익숙해진 후 기원의 바다로 통하는 문을 열었고, 두려움으로 이뤄진 섬들을 극복했습니다.”

소지훈이 끼어들었다.

“그 섬의 본질은 누가 알려줬지?”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이두형 씨란 분입니다. 스스로는 골동품 학자라고 얘기했던 정식 사냥꾼입니다.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러 검은 쥐 마을로 향하던 중에 만났습니다.”

소지훈은 어떠한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봐.”

성건우는 하던 말을 이었다.

“그 후 저희는 레드스톤 마켓에서 지하 방주 안의 노예들을 구해주고자 그곳 주인 디마르코를 습격했습니다. 그 사람은 숙명통으로 제 기원의 바다에 침입했고, 저는 그 사람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에 얻은 한 도구의 기운을 전부 그 안으로 이전시켰습니다.”

순간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민수안은 표정 관리도 잊어버렸다.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고? 그러고도 여태 살아있다니!’

소지훈도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러면 심각한 후유증이 생길 거라는 사실은 몰랐나?”

성건우가 결연하게 답했다.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좁은 길에서 적을 만났을 때는 용감한 쪽이 이기는 법이니까요!”

소지훈과 민수안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나 당당한 바보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몇 초 후에야 소지훈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물었다.

“그다음은?”

성건우가 재잘재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희가 디마르코의 육신을 파괴했습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기습당해서 방어할 틈도 없었던 겁니다.

이어진 전투에선 저는 그 도구의 기운을 이용해 한동안 그 사람을 막아내고, 제 육신을 점거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덕분에 그 사람 의식은 일부만 제 기원의 바다에 남고 점차 흩어져 사라졌죠.

그리고 이번에 퍼스트 시티에 가서 진짜 신부를 사냥한 뒤에, 저희는 또 그 사람한테서 맹목의 고리를 얻었습니다. 그런 우연과 인연을 생각하며 전 한동안 맹목의 고리도 제 기원의 바다에 옮겨뒀습니다.”

‘자기 심령 세계에 아무거나 쑤셔 넣어서는 안 된다고!’

연구자로서 실험 과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민수안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포효했다. 만약 그의 수하에 이런 연구자가 있었더라면, 벌써 그를 광산으로 보내 흙먼지나 먹게 했을 것이다.

소지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정말 운 좋은 사람이네.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니.’

성건우는 계속해서 과거를 회상했다.

“8월 초, 퍼스트 시티에 일어난 동란에서 위기를 맞고, 전 엘리베이터의 문을 막은 저와 타협하고자 기운에 대응하는 강자를 소환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소지훈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이런 사람이 여태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하늘의 가호 덕이려나?’

“엘리베이터 문을 지키던 저는 유약감과 겁의 화신이었습니다. 빠르게 굴복해서 전 순조롭게 심령의 복도에 진입해 새로운 능력을 얻었습니다. 기원의 바다의 기운들은 한 차례 난전 끝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요.”

이때, 131이라는 번호가 붙은 성건우의 심령 방 안에서는 여덟 성건우가 한 성건우를 짓누르고 있었다.

바닥에 짓눌린 성실한 성건우가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거짓말하면 안 되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라고! 수종이의 기운을 빌려 협박했기 때문이잖아! 그래서 겨우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거잖아! 모호한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마!”

여덟 성건우는 성실한 성건우의 말은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제압에만 충실하게 임했다. 그 덕분에 냉정하고 지혜로운 탐정 같은 성건우는 계속해서 그 성건우를 솜씨 좋게 조종할 수 있었다.

성건우의 이야기를 듣고, 민수안은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굴었으면서도 나랑 똑같이 심령의 복도에 진입했다는 거야? 이게 과학이야? 말도 안 되잖아!’

소지훈은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훔쳐낸 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자네 경험을 흉내 내려 하면 안 되겠어.”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열 명 중에 열한 명이 죽어 나갈 것이었다. 주위에서 도우려 하는 이들까지도 죽음에 휘말릴지 몰랐다.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상대는 다 다르니까요.”

성건우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소지훈, 민수안은 더 이상 이 부분은 토론할 뜻을 접었다.

잠시 후, 소지훈은 성건우의 얘기를 천천히 되새겨 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자네들은 일찍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한 사람을 해치웠다는 말인가?”

성건우는 숙명통을 가지고 있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디마르코를 그가 처리했다고 말했었다.

이내 성건우가 손가락을 접으며 덤덤하게 답했다.

“한 명뿐이겠습니까.”

‘한 명뿐이겠냐고?’

충격에 빠진 민수안은 엉덩이 밑에 바늘방석이 깔려있기라도 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성건우는 본인이 구조팀의 유일한 각성자라고 말했다. 거기다 8월 초 퍼스트 시티에 동란이 일어났을 때에서야 비로소 심령의 복도에 진입할 기회가 생겼다고도 했다.

그 후 구조팀은 회복하는 데 힘쓰다 곧장 돌아왔기에,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충돌할 여지도 없었다.

즉, 구조팀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를 해치운 건 그 전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심령의 복도 급 수준의 강자가 생기기 전이었다는 소리였다.

그게 한 번뿐이었다면 황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라고 넘어갈 수 있었다. 조금 전 성건우가 설명한 대로 오랫동안 지하 방주에 처박혀 있던 터라 여러 방면에서 경계심을 잃은 디마르코가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장목화가 이끄는 이 구조팀이 처치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그보다 더 많다고 했다. 민수안은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있고, 또 아무렇지 않게 처리해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애초에 구조팀의 실력이 그렇게까지 강할 리도 없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민수안은 점차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반고 바이오 이사회 이사 소지훈 역시 잠깐의 침묵 끝에 물었다.

“디마르코 말고 또 누가 있지? 어떻게 처리했나?”

“제8 연구원 특파원과 마커스를 보호했던 가상 세계의 주인도 저희 손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성건우는 그 두 차례의 전투 경과를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장목화가 제출한 보고서에도 이 두 사건이 언급돼 있지만, 원인과 결과만 나와 있을 뿐 그 외의 장황한 설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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