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규칙 찾기
이내 문득 성건우가 조여름의 남편 장이경을 바라보았다.
“혹시 천연 교파에 대해 들어봤습니까?”
천연 교파는 전에 한동안 회사 내부에서 전파돼 몇몇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이비 종교 조직이었다.
장이경은 기억을 더듬었다.
“옷 벗고 곳곳을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그 교파 말입니까?”
“네.”
용여홍이 호응했다.
조여름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런 교파도 있단 말이야?”
장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화이트 기사단 근처 지역에서 몇 번 봤었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여름이 물었다.
“좋았어?”
헛웃음을 지은 장이경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몇몇은 나이가 들었고, 몇몇은 아류인이었어.”
성건우는 흥미롭다는 듯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당신이 보기엔 그 사람들이 어떤 달지기를 믿는 것 같았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장이경이 말했다.
“5월의 감찰자 같던데요.”
성건우는 순간 큰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그렇군요. 나체 역시 일종의 행위 예술이니까요.”
그 후로 또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건우와 용여홍은 임신한 조여름을 배려해 억지로 돌려보내고 본인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 * *
B구역, 196호.
침대에 기대듯 누운 성건우는 어둠 속에서 말없이 눈을 떴다.
창으로 스미는 복도 가로등 빛엔 가끔 행인들의 그림자가 어렸다.
몇 분 후, 조짐을 보이던 라디오에서 약간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오늘 이사회 이사, 기택조 부총재가 안전 생산의 달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허정민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 수자원 보호 부서에서는 물 절약 강좌를 계속 개설할 계획입니다⋯⋯.
오늘 저녁 6시 20분, 568층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차 조사 결과, 일상생활 중에 쌓인 사소한 갈등의 폭발을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든 층에 울려 퍼지는 앳된 목소리가 라디오를 듣는 직원들에게 오늘 하루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다. 개중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성건우 방의 적막을 완전히 깨뜨려주진 못했다.
정각 뉴스 다음은 오늘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인한 리뷰 프로그램이 예고돼 있었다. 반고 바이오를 지하 빌딩으로 옮긴 후에 있었던 모든 악질 사건과 그에 대한 재판 결과를 새롭게 소개하는, 경고성 짙은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 역시 허정민이라 성건우들 모두가 매우 흥미로운 듯 귀를 기울였다.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악질 사건 중엔 청취자들에게 익숙한 사건도 있었다. 386층에서 발생했던 폭발 사건이 그 예였다.
아직 혼란한 시대였을 당시, 반고 바이오는 심각한 물자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다. 특히 광물 자원은 더더욱 심해서, 이사회는 전문 팀을 파견해 주위의 일부 광산을 점령했다.
그 팀원 중에 D6급 중간층 직원 한 명이 있었다.
반년간 광산에서 힘겹게 일하고 돌아온 그는 이웃과 정분이 난 아내를 발견했다. 그 이웃은 그보다 직급도 높고, 누군가의 친척으로 관리층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실에 직원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이 일을 크게 벌려봤자 아내와는 이혼하게 될 테고, 사건의 원흉은 아무 피해도 받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광산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반년이 지난 뒤 다시 집에 돌아온 그는 그날 저녁 이웃의 문을 두드렸다. 아내의 간통 상대가 나오자, 직원은 별다른 말 없이 곧장 옷을 잡아당기며 허리에 두른 뇌관을 드러내 보였다.
간통남은 그게 무엇인지 미처 판별하기도 전, 상대의 손에 붙잡혔다.
그리고 바로 폭발이 일어났다.
두 남자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은 건 다음 날 그 층의 아이들이 놀다가 주운 손가락 몇 개뿐이었다.
해당 구역은 방바닥까지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폭발 장소가 문 앞이라 안쪽 침실까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사망자 수는 둘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은 지하 빌딩 구조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어, 반고 바이오는 출입 검사와 광산 관리를 더더욱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일련의 규칙과 제도가 생성됐고, 외근 직원의 혼인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 역시 위법으로 규정해 문건에 기입했다.
조용히 이 리뷰 프로그램을 다 들은 성건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 * *
심령의 복도에 대응하는 방에 그의 인영이 떠올랐다.
이번에 성건우는 1215호를 찾는 대신 자신의 방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새로운 목표를 선택했다.
522호였다.
이 호수의 첫 번째 번호인 5는 5월의 달지기 감찰자 영역을 대표했다. 그는 천연 교파가 믿는 대상이었다.
물론 5는 장생 영역에 속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투표를 통해 기초 탐색의 방침을 정한 열 명의 성건우는 다시 하나로 합쳐져 522호 방문을 열었다.
그 안은 처참했다. 창문 유리는 이미 깨졌고, 외벽은 깊은 밤 어둠에 잠겨 있었으며, 곳곳은 거대한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폐허가 된 모습이었다.
성건우는 당당히 방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갑자기 어느 건물 안에서 나온 것처럼 차량이 어지럽게 널린 거리에 이르렀다.
급히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길 중앙에 선 그는 주변부터 관찰했다.
바로 그때였다. 옆쪽에 세워진 차의 앞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헝클어진 머리, 혼탁하고 충혈된 눈. 무심자였다.
성건우는 차 문이 열린 순간 무심자의 존재를 감지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그대로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과녁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단박에 성건우를 덮친 무심자가 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물어뜯긴 자리의 살점이 그대로 뭉그러졌다.
“아악!”
고통의 비명을 내지른 성건우는 그제야 힘을 내 무심자를 떨쳐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 명으로 나뉘어 서로를 살폈다.
모든 성건우의 어깨에는 끔찍한 상처가 나 있었다.
사슴사냥 모자를 쓴 채 파이프를 문 성건우는 제일 먼저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이 상황으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어. 첫째, 여긴 현실이 아닌 심령 세계야. 인간 의지에 대한 감지는 방 주인의 당시 상태, 혹은 인지에 따라 결정돼서 가능할 수도, 불가능할 수도 있어. 그러니 앞으로 탐색할 때 오로지 그 감지에만 의지하면 안 될 것 같아.
둘째, 다른 사람의 심령 세계를 탐색할 때는 정신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피해도 입을 수 있는 모양이야.”
성실한 성건우가 반박했다.
“지금 우리한테 신체가 어딨어? 이건 그냥 정신이 구현된 것뿐이야.”
이때 무심자가 다시금 성건우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가 허공으로 붕 떠오른 순간, 갑자기 높은 곳에 위태롭게 달려 있던 광고판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며 그를 덮쳤다.
쾅!
제때 방향을 틀지 못한 무심자는 광고판에 치여 그대로 추락했다. 그의 머리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경련하며 몸부림치는가 싶던 그는 한동안 죽지도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기만 했다. 무심자의 생명력이 얼마나 질긴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 이외에는 어떤 짓도 하지 못했다. 최소한 성건우 민주 협의회 진행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사슴사냥 모자를 쓴 성건우가 입에 문 파이프를 거두며 말했다.
“내 말은, 우린 원래 심령 세계 안에서의 습격은 각성자의 능력 형식으로 구현된 게 아닌 이상 정서적인 면에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잖아. 예를 들면 공황에 빠지거나, 두려움을 느끼거나, 혼란스럽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래서 우린 좋지 않은 인상 때문에 강제로 심령의 복도를 벗어났어. 근데 이제 보니까 물리적인 공격도 가능하다는 거야. 마찬가지로 우리한테 위해를 끼칠 수 있다고.”
유약하고 겁이 많지만 총명한 성건우가 동조했다.
“이곳에서의 물리 공격은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정신 공격이야. 그저 다른 환경에 따라 이런 형식으로 표현되는 거지.”
이번엔 상대적으로 감정을 중시하는 내성적인 성건우가 나섰다. 그가 입은 일상복은 청소년 시기에 입었던 옷을 늘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깨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니 정신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나 봐.”
바로 거칠고 대담한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런 습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해야 물리적인 공격 형식을 갖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사슴사냥 모자를 쓴 성건우가 파이프를 흔들었다.
“총기와 탄약을 구현해서 사격할 때 물질 간섭 능력을 부가하면 돼. 총알은 작고 가벼우니까, 간섭은 살짝만 더해도 될 거야. 그럼 정신력도 아낄 수 있을 거고.”
다른 이의 심령 세계 안에서 구현한 무기로 직접 사격해도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으므로 반드시 정신을 주입해야 했다.
이런 방면에 있어 물질 간섭 능력은 다른 능력보다 훨씬 우세했다.
성건우들의 의견은 빠르게 일치되었다.
정신력을 아끼기 위해 다시 하나로 합쳐진 그들은 어느덧 손에 상용되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구현했다.
이 무기를 쥔 성건우는 거리 전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 건물의 여러 창문 안에서, 또 거리 모퉁이와 버려진 자동차 안에서 인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족히 백 명은 될 듯했으며, 모두 남루한 차림에 무서울 정도로 혼탁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이 무심자 중에는 각종 총기나 몽둥이, 스패너를 쥔 이도 있고, 맨손인 이도 있었다. 그들 모두 사방팔방에서 성건우를 향해 몰려들었다.
다- 다- 다-
탕탕탕!
성건우는 익숙하게 한 번 구른 다음,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무심자들 역시 무기 사용에 매우 능했다. 양손 동작 불능과 억지쟁이 능력이 없었다면 성건우 혼자 백 명이나 되는 적을 당해내진 못했을 터였다.
현실의 군대와 달리 이곳의 무심자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다다다-!
격렬한 총격전 끝에 대량의 무심자가 목숨을 잃고 쓰러졌지만, 이 거리 끄트머리에서 더 많은 무심자가 요란한 소리를 듣고 분분히 달려들었다.
이제는 셀 수도 없는 인원에 성건우는 약간 연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탄약이 부족해⋯⋯.”
실제로 부족한 건 그의 정신력이었다. 눈앞의 적들은 어떻게 처치할 수 있다 해도, 계속해서 몰려드는 그 이후의 무심자까지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뒤이어 성건우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당시 방의 주인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도망쳤던 걸까? 트라우마만 안은 채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지?’
그러나 지금 당장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는 뒤로 홱 돌아선 다음, 좀 전에 들어온 곳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몸을 날리고 굴린 끝에 심령의 복도로 돌아온 그는 그렇게 이번 탐색을 마쳤다. 답이 없을 땐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었다.
* * *
다음 날, 성건우가 647층 14호에 들어왔을 때 장목화는 구조팀 전원이 엄격한 심사를 받게 될 거라는 통지를 받았다.
포상은 심사가 끝난 뒤에 내려질 것이라고 했다.
성건우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심사였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그에게 일렀다.
“이번 심사 책임자는 민수안이 아닐 가능성이 커.”
장목화의 말은, 성건우의 두 번째 심사 담당자는 더 높은 급의 회사 고위층, 혹은 특수한 능력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둘 모두일 수도 있었다. M1 이상이면서 특수한 능력을 가진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성건우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어쨌든 전 정말로 정신에 문제가 있으니까요.”
장목화는 자신의 각성자 실험이 성공을 거두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애초에 장목화는 성건우가 단단히 대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무엇보다 원칙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회사도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를 상당히 관용적으로 대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