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화. 가설
저장해 둔 통조림과 용여홍이 준 국수면으로 우육면을 끓여 싹 비운 성건우는 양치하고 세수도 한 뒤 침대에 누웠다.
그는 재차 심령 복도에 진입했다.
열 명으로 나뉜 성건우는 주위를 살피며 문에 붙은 번호를 확인했다. 전에 본 번호와 똑같았다.
성건우도 전에 걸었던 길을 따라 복도 한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1215호 근처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심층적으로 탐색하면서 더 많은 이상 상황을 수집해 훗날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순간 열 쌍의 눈 모두가 동시에 굳어졌다.
[1 2 3 5]
분명 이들이 기억하는 문의 번호는 ‘1215’였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사슴사냥 모자를 쓴 성건우가 말했다.
“변한 거야?”
유약하고 겁많은 성건우도 성건우 민주 협의회 동료들에게 알렸다.
“다른 문에 붙은 번호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어.”
성실한 성건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데. 설마 1215호 방에 뭔가가 있었던 걸까? 이동할 수 있는? 그래서 진입하기 굉장히 어려운 방이었나?”
“글쎄요.”
붉은 가사를 걸친 반로봇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열 명의 성건우는 한 차례 토론을 진행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결국 심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민수안에게 주위의 방 번호가 변한 적이 있었느냐고 묻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647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두 친구가 탑승했다.
용여홍은 액정 패널에 끊임없이 높아지는 숫자만 보다 입을 열었다.
“1년에 최소 한 번씩은 무심병 환자가 생기지?”
반고 바이오 내부의 상황을 묻는 질문이었다.
“응, 내가 기억하는 한은 그래.”
성건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들이 사는 495층에 무심병이 많이 발발하진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라디오 방송을 듣는 어른들의 겁에 질린 모습이나 활동 센터에 모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은 늦가을이었지. 생명 제례 교단 사람이 연루돼 있었고. 올해는 8월 초에 발발했어⋯⋯.”
용여홍이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때, 성건우가 턱을 만지던 손을 내렸다.
“어? 8월 초면 네가 수술받던 때 아냐?”
퍼스트 시티의 동란이 발생했던 때가 바로 8월 초였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용여홍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라 여겼다. 성건우는 또 자신을 놀리려고 회사의 무심병 폭발과 자신이 다친 걸 연관 지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 * *
647층, 14호.
성건우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미 출근한 장목화에게 말을 쏟아냈다.
“큰 흰둥이 팀장님, 8월에 일어난 무심병 폭발 사건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언제 끝났는지 한번 찾아봐 줘요.”
순간 장목화가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물론 큰 흰둥이는 장목화 자신이 직접 지은 별명이었다. 팀원들과 격 없이 그 귀여운 별명을 부르는 것도 그녀 자신이 만든 분위기지만, 성건우가 그 별명을 부를 때만큼은 정말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어떨 것 같아요?”
성건우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를 쏘아보다 그냥 고개를 돌린 장목화는 컴퓨터로 인트라넷에 접속한 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 범위 내에서 관련 뉴스를 찾았다.
뒤이어 장목화가 검색 결과를 살피며 말했다.
“첫 번째 사건은 8월 7일 오전 8시 반부터 10시 반 사이에 발생했어. 발견이 늦어서 정확한 시간을 파악할 수 없나 봐. 무심병 폭발이 마무리된 건 8월 13일이고⋯⋯.”
일순 미간을 구긴 장목화가 고개를 들어 성건우와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8월 7일, 퍼스트 시티에 동란이 일어난 바로 그날이야.”
8월 7일은 용여홍에게 굉장히 깊은 인상으로 남은 날이었다.
퍼스트 시티에 동란이 발생한 날인 동시에, 그가 중상을 입고 오른팔을 잃은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장목화는 반고 바이오에 무심병이 폭발한 날도 그날이라 말했다.
용여홍은 바로 내뱉듯 물었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지 않나요?”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지.”
용여홍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성건우를 발견했다.
‘쟤는 또 나 때문이라고 얘기하겠지?’
용여홍은 이제 성건우가 할 이야기도 짐작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백새벽이 사무실로 들어와 무거운 분위기에 의혹을 표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장목화는 바로 상황을 설명한 뒤,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전에 우리 퍼스트 시티 동란에 관심을 보이거나 심지어는 직접 개입한 달지기가 있을 수 있다고 추측했었지? 우리가 또렷한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때 달지기가 실제로 개입했던 건 아닐까? 그 달지기 사이의 충돌로 일어난 일정한 파란이 애쉬랜드 곳곳에 소규모의 무심병 폭발을 일으킨 거지.”
장목화의 대답한 가설에 용여홍은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어쨌든 나 때문인 건 아니네!’
백새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이면 8월 7일에 무심병 폭발이 일어난 곳은 회사만이 아닐 거예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 다음 임무를 수행하러 밖으로 나가면, 이동 중에 거쳐 가는 모든 곳에 8월 7일에 무심병에 감염된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자.”
용여홍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가설대로면 퍼스트 시티에서도 8월 7일에 많은 무심자가 나타났어야 해요. 근데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잖아요.”
그 동란 이후에도 구조팀원들은 용여홍이 어느 정도 회복하기를 기다리느라 퍼스트 시티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머물렀었다.
용여홍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재수도 오지게 없던 사람 기억 안 나?”
순간 멍해졌던 용여홍이 누군가를 떠올렸다.
“베울리스? 퍼스트 시티 집정관 겸 총사령관?”
만약 그가 갑자기 무심병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퍼스트 시티의 동란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내 장목화가 또 다른 가설을 세웠다.
“소문에 따르면 그 사람은 굉장한 강자였다고 하니, 해당 범위 내의 파란으로 인한 무심병 바이러스가 전부 그자에게 몰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용여홍과 백새벽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 성건우가 대뜸 또 화제를 바꿨다.
“잔나가 대사는 우리가 퍼스트 시티의 동란을 일으킬 거라 예언했었지. 하지만 그 후에 발생한 모든 일은 우리랑은 별 관계가 없었어⋯⋯. 아무래도 우리 작은 빨강이의 불운이 베울리스한테 전염됐나 본데.”
자신을 보며 씩 웃는 성건우를 보고 용여홍이 바로 발끈했다.
“야! 난 그 사람 본 적도 없어!”
순간 성건우는 몹시 충격받았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헉, 그럼 네 불운은 갈수록 대단해지고 있다는 거네! 접촉하지 않고도 그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단 거잖아!”
“그만, 그만. 음, 내 생각에는 토마토 달걀 볶음과 관련된 것 같아.”
성건우를 저지한 장목화가 귓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돌돌 말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종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굴었다. 방에 도청기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수종이라는 이름 대신 완곡한 표현을 썼다.
곧이어 장목화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만약 우리가 시카라 사원에서 미리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그 특파원의 습격을 받지도, 도우미를 찾으러 가지도 않았을 거야. 그럼 토마토 달걀 볶음은 그 특파원에 놀란 나머지 퍼스트 시티를 바로 떠났겠지.
주민 집회 당시에 그 사람이 계속 퍼스트 시티에 남아있었다면 상황의 변수는 더 많아졌을 거야. 어쩌면 그렇게까지 크게 불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일리 있어요.”
용여홍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장목화의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는 잔나가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즉 구조팀이 정말로 어떤 의미에서 퍼스트 시티의 동란을 유발했을 때를 전제로 한 이야기였다.
문득 성건우는 그립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어디로 갔을지 모르겠네요.”
이내 생각에 잠겨있던 백새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잔나가 대사의 예언은 결국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실현됐네요.”
엷게 웃던 장목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바로 예언이지. 자, 이제 단련하러 가자. 이 문제는 나중에 검증해보고. 지금 우린 회복하고 휴식에 집중해야 해. 상부의 심사가 끝나고 포상이 주어질 때까지 대기해야지. 그 후엔 각자 원하는 바도 신청하고.”
그러다 잠시 뜸을 들이던 장목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무심병 발병 원인이 정말 우리 추측대로라면, 중요한 건 8월 7일에 무심병에 감염된 사람이 나타난 곳을 찾는 일이 아니야. 감염자가 나타나지 않은 거점들을 찾아, 그런 장소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거지.”
그녀의 말투에서는 강렬한 희망과 기대감이 드러났다.
이 순간 용여홍은 장목화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옆자리의 성건우 역시 굉장히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 *
하루를 마친 장목화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이미 돌아와 거실에 앉아있는 장문봉을 보고 흠칫했다.
“어? 아빠, 일찍 퇴근하셨네요?”
그녀는 집에 돌아와 직접 밥을 해먹을 생각으로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다. 거기다 최근 구조팀 일정은 굉장히 여유로워서 퇴근도 꽤 빠른 편이었다.
장문봉은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 덕분이지. 생체 공학 와우 수술이랑 각성자 실험 일정이 잡혔다. 예행 검사가 끝나는 대로 구체적인 날이 잡힐 거야.”
장목화는 아빠를 힐긋 보며 짐짓 겁먹은 척 물었다.
“제가 무서워서 결정을 번복하면 어떻게 돼요?”
순간 장문봉이 눈을 부라렸다.
“각성자 실험이야 없던 일로 쳐도, 생체 공학 와우 수술은 기절을 시켜서라도 들여보내야지!”
“무서워라⋯⋯.”
장목화가 말끝을 늘이며 중얼거렸다. 물론 구조팀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성건우처럼 ‘아빠를 생각해서 전 왼손만 쓸게요.’ 이런 농담을 하진 않았다.
대신 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질문을 이었다.
“아빠, 우리 회사에서 이미 신세계에 진입한 각성자는 얼마나 돼요?”
장문봉이 미간을 팩 찌푸렸다.
“그건 네 급에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느릿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사실은 나도 잘 몰라. 그 방면은 M3급은 돼야 알 수 있거든.”
이사회 구성원들이나 알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름 생각에 잠긴 장목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사회 구성원은 총 다섯 명⋯⋯.”
장문봉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 * *
495층, C구역 활동 센터.
성건우, 용여홍은 오늘도 조여름, 장이경 부부와 만나 구석에서 주위 열기를 느끼며 각종 주제로 한담을 나눴다.
“근데 돌아온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진원이는 도통 안 보이네.”
용여홍이 언급한 또 다른 친구 얘기에, 조여름이 피식 웃었다.
“아기 보느라 바쁜가 보지.”
용여홍은 즉각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아, 그렇겠네.”
그런데 순간 세기 조절을 못 했던지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를 바라보던 조여름이 곧 성건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너희는 승진이 진짜 빠르구나. 동기인데도 너희만 보면 열등감이 생겨.”
반고 바이오는 작다면 작지만, 크다면 큰 세력이었다. 용여홍과 성건우가 D5급이 됐다는 사실은 일찍이 495층 전역에 퍼져 있었다.
“너도 안전부 일선 팀에 전출 신청해 봐.”
성건우의 진지한 제안에 조여름이 그를 노려보았다.
“됐어. 내 동기 하나, 아니, 둘이 관리층이 되길 기다렸다가 그 덕이나 볼래.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