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재진
바깥에서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지낸 때가 워낙 많아서, 그들은 따로 신체를 단련할 시간도 없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애를 써왔다.
이제 막 회사로 돌아왔으니 오늘은 회복과 몸 상태 조정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부상에서 막 회복한 용여홍에게도 적당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용여홍은 정말 많이 허약해진 상태라, 평소보다 더 일찍부터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축축하게 젖은 옷이 몸에 짝 달라붙었다.
“뱃살 좀 붙었네.”
허를 찌르는 성건우의 지적에, 용여홍은 부끄러워 인상을 썼다.
‘아이, 그렇게 꼭 하나하나 지적해야 속이 후련해?’
성건우는 용여홍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작은 흰둥이, 쟤 다리 좀 눌러주라. 쟤 코어 근육 좀 더 단련해야 해.”
“좋아.”
백새벽은 거절하지 않았다.
순간 용여홍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그래⋯⋯.”
“왜? 그건 항상 건우 네가 했잖아.”
장목화가 끼어들었다. 성건우에게 놀림당하는 용여홍을 적극적으로 구해주는 건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이내 성건우가 떳떳하게 대꾸했다.
“아, 회사에 오자마자 의사 선생님 만나서 재진 받아야 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거기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동시에 그는 트레이닝 룸의 문으로 향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용여홍은 백새벽의 도움을 받아 코어를 단련했다.
그러면서 조금 전 성건우와 했던 말을, 두 사람이 동경하는 미래를 떠올린 그는 문득 감상에 젖었다.
‘무심병이 없고 물자도 충분하다면, 그런 삶도 충분히 아름다울 텐데.’
이내 백새벽과 옆에서 유산소 운동 중인 장목화를 돌아본 용여홍은 다시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실 외근할 필요도, 무심병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면, 지금도 엄청나게 행복하고 좋은 삶이잖아.’
* * *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3층.
성건우는 예의 그 장소에서 인 선생을 만났다.
이 삼십 대의 여자 선생은 흰 가운을 걸치고, 틀어 올린 검은 머리에 금테 안경까지 끼고 있어 상당히 지적이고 성숙해 보였다.
곧바로 성건우의 파일을 찾아낸 그녀가 검은 만년필을 집어 들더니 한담을 하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며칠 후에나 올 줄 알았더니.”
성건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 앞으로 더 이상은 치료와 관찰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 나은 것 같아서?”
인 선생은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환자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정색하고 대꾸했다.
“아니요, 문제가 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서요.”
이런 말을 하는 환자는 처음이라, 인 선생은 몇 초간 좀 멍해졌다.
“해결할 수 있냐 없냐는 네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성건우는 햇빛처럼 찬란하게 웃었다.
“우리는 이미 합의했고, 완벽한 협상 메커니즘도 구축했습니다. 굉장히 좋은 상황이라 더 이상의 치료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사실 치료할 수도 없고요. 치료를 위해 뻔히 살아있는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잖습니까.”
‘……허, 우리?’
인 선생은 속으로 숨을 들이마시며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너희들 사이의 의견이 불일치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큰 방향이 일치하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일치하는 점은 취하고 의견이 서로 다른 점은 잠시 보류하는 거죠.”
성건우의 상태는 전혀 환자 같지 않았다.
인 선생은 한번 떠보듯 물었다.
“어떤 방향이 일치하는데?”
성건우의 표정이 돌연 엄숙해졌다.
“전 인류의 구원입니다!”
검은 만년필을 쥔 인 선생의 손에 흠칫 힘이 들어갔다.
몇 초간 망설이던 그녀가 정색하고 말했다.
“네가, 아니,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기록해서 보고해도 괜찮겠지?”
그는 일단 성건우에 대한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상부에 재촉할 작정이었다. 상대를 병원에 보내 약물치료를 받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이죠.”
성건우는 전혀 두려울 게 없다는 듯 덤덤하게 응했다.
* * *
647층, 14호.
오전 단련을 마친 구조팀은 샤워도 깔끔히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가 식당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내 성건우가 자료를 뒤적이던 용여홍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활동 센터 갔었어?”
용여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럴 시간 없었어. 가족들이 계속 질문을 쏟아내다시피 해서.”
성건우가 바로 아쉬움을 표했다.
“아휴, 아직 다른 사람들한테 기계 팔을 자랑하지도 않았다고? 다들 엄청나게 부러워할 텐데!”
솔직히 말해 용여홍은 기계 팔에 약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젯밤 활동 센터에 나가지 않은 데에는 사실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성건우의 말을 들으니 기계 팔을 갖게 된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휴대용 컴퓨터를 내보였을 때도 그러했듯, 이웃 주민들은 이번에도 그를 무척 부러워할지도 몰랐다.
장목화도 용여홍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했는지 웃으며 일렀다.
“정말로 기계 팔이 적응이 안 되면, 포상받은 후에 생체 공학 의수를 골라봐. 공짜 의수는 말고. 그런 건 전부 후졌거든.”
“네, 생각해 볼게요.”
용여홍은 약간 마음이 동했다. 그렇지만 사실 수술을 다시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별로 좋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장목화가 백새벽을 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작은 흰둥이 넌 평소에 방에 돌아가면 뭐 해?”
백새벽이 차분하게 답했다.
“컴퓨터 보면서 쉬어요.”
이를 듣고, 용여홍이 불쑥 끼어들었다.
“활동 센터에는 안 나가?”
백새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층 사람들은 활동 센터 별로 안 좋아해.”
‘하긴, 새벽이가 사는 층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외부에서 들어온 직원들이라 서로 좀 데면데면하겠다.’
생각을 마친 장목화가 웃었다.
“너희 층 활동 센터 주관이 일을 잘 못 하네. 이따 건우랑 작은 빨강이랑 같이 다른 층을 한번 돌아다녀 봐. 다른 활동 센터는 엄청 시끌벅적해.”
“그래, 그래.”
성건우가 바로 응했다.
뒤이어 장목화가 이야기를 더하려는데, 갑자기 책상 위 전화가 울렸다.
“예, 예.”
전화를 끊은 장목화가 이상한 표정으로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C-14 프로젝트팀에서 부르는데? 다른 테스트가 필요하대.”
끝으로 그녀가 놀리듯 덧붙였다.
“무지하게 바쁜 몸이시네.”
성건우는 방의 벽시계를 한번 보고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곧 점심시간인데. 오후에 갈래요. 거기서 점심을 줄 것 같지도 않아요.”
그는 이런 상황이 굉장히 못마땅했다. 전부터 연구소 식당은 어떤지 보고 싶었건만, 단 한 번도 기회가 없었다.
“어이구, 멋대로 막 나가시겠다?”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성건우를 가만히 보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조금 전 전화했던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장목화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공적인 말투를 썼다.
“저희 팀 내부에 매우 중요한 정기 회의가 있어서, 성건우 팀원은 오후 2시 이후에나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C-14 프로젝트팀은 아무런 이의도 표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빠르게 전화를 끊은 뒤 다시 활짝 웃으며 성건우를 보았다.
“됐어. 세상에 나처럼 좋은 상사가 어딨냐?”
성건우는 바로 용여홍을 쳐다보았다.
“너한테 말하는 거네. 잘 새겨들어.”
용여홍은 본능적으로 반박하려다 금세 수긍했다. 실제로 이 구조팀을 떠난다면 어떤 상사를 만나게 될지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이내 용여홍이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졸업하자마자 처음으로 만난 상사가 이렇게 좋은 분이라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어.”
용여홍도 자신이 만약 다른 구조팀으로 갔거나 안전부의 다른 일선 팀에 속해 있었다면, 지금처럼 잘 있을 순 없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다른 일을 했다면 지금처럼 많은 일을 겪지는 않았을 테고, 이렇게 위험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용여홍은 지난 일 년 동안 근 십 년 동안 할 법한 양에 달하는 일들을 겪으며 자신이 더 많이 성장했다고 믿었다. 이는 단순한 직급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내면의 성장에 더 깊은 발전이 있었다.
“맞아, 맞아. 봐봐, 넌 기계 팔도 갖게 됐잖아.”
성건우가 깊이 동조했다.
결국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놀리는 거지? 안 되겠어, 그동안 내가 영 팀장으로서 위엄이 없었어. 팀장으로서 말한다. 점심은 네가 쏴!”
“네, 알겠어요. 오늘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겠네요.”
성건우가 환한 얼굴로 답했다.
내내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백새벽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웃음이 번졌다.
* * *
오후 2시 15분, 지하 빌딩 3층.
성건우는 C-14 프로젝트의 책임자 민수안을 만났다.
밝고 따뜻한 사무실에 앉아 금테 안경을 올리던 민수안은 책상 맞은편의 등받이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지난번에는 ‘앉아’라고만 하셨는데.”
성실한 성건우는 못 하는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연 민수안이 돌연 길게 트림했다.
다시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자네를 찾은 이유는 알고 있겠지.”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너무 많아서 어떤 건지 모르겠네요.”
민수안은 옆에 놓인 보온병을 들어 입을 축였다.
“지난번에는 왜 이미 각성자가 됐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
성건우는 그 말이 더 놀랍다는 듯 당당히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저한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민수안은 보온병을 잡은 손가락을 움직거리다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 지금은 어느 레벨인가?”
“이제 막 심령의 복도에 진입했습니다.”
성건우는 매우 솔직하게 답했다.
그 답에 금테 안경을 낀 민수안의 눈빛이 대폭 밝아졌다. 그는 성건우를 응시하면서 한동안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확인하려는 듯 다시 물었다.
“확실한가?”
성건우는 곧장 답하는 대신 등받이에 기대며 양손을 깍지 껴 쥐었다.
파직- 파직-
그와 동시에 사무실 안의 형광등이 갑자기 깜빡였다.
“전자파 간섭⋯⋯.”
민수안은 성건우의 레벨에 더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가 질문을 이어갔다.
“언제 각성한 거지?”
성건우는 이런 뻔한 질문을 왜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실험에 참여했을 때요.”
민수안은 두 손을 깍지껴 쥐며 조금 이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일 년 삼 개월 만에 심령의 복도에 들어갔다고?”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도 약간 늦은 편이죠. 마지막 단계에서 시간이 적잖게 지체됐으니까요. 휴, 아무래도 결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더는 이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으려는 듯, 민수안이 다시 화제를 틀었다.
“자네 팀은 지상에서 아주 많은 일을 겪었지. 자네 팀장은 자네가 각성자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도 이를 보고하지 않았고.”
성건우는 바로 손사래를 쳤다.
“추리 광대 한 번이면 해결되는 일이었습니다. 한 번으로 안 되더라도 여러 번 시도하면 됐고요.”
이건 구조팀도 이미 협의를 마친 사안이었다. 회사에 성건우가 각성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상, 모든 책임은 그 스스로 지기로 했다.
성건우는 이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되었다. 그 정도면 이런 작은 실수로 처벌받더라도 큰 타격을 입지는 않을 터였다.
민수안의 관심은 곧장 그 부분으로 옮겨갔다.
“자네 능력 중 하나가 추리 광대다? 장생 영역인가? 다른 능력은 뭐지?”
순간 성건우는 이 지식인 분위기가 풀풀 나는 연구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도 각성자입니까?”
“그래.”
민수안도 숨기지 않고 답했다.
말을 마친 순간 그는 또 한 번 트림했다.
“레벨은요?”
갑자기 성건우는 심사받는 대상에서 심사하는 사람이 돼 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