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이별
퍼스트 시티, 레드울프 구역, 고급스러운 아파트.
밤을 타 장목화, 성건우가 필요한 약과 기자재를 가져왔다.
들어오는 길에 홀 안의 우편함을 발견한 장목화는 그쪽으로 다가가 구조팀이 지내는 방의 호수를 찾았다. 혹시 오늘 자 신문이 있을지, 그것으로 퍼스트 시티의 정세를 더 파악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안전 가옥을 빌릴 당시, 집주인은 ‘퍼스트 시티 일보’를 연간 구독해뒀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오늘의 동란으로 신문을 인쇄할 수도 없었는지, 아니면 배달이 안 된 건지 우편함은 텅 비어있었다.
대신 이름 없는 편지 한 통이 누워있었다.
의문스러운 얼굴로 편지를 꺼낸 장목화는 한번 살핀 뒤 바로 뜯었다.
봉투 안에는 얇은 진단서 두 장이 들어있었다.
진단서에는 심장과 골수를 빨리 교환하지 않으면 환자가 곧 죽을 거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동시에 몇 가지 약물의 조합이 언급돼 있기도 했다. 그 방안에 따라 치료하면서 푹 쉬면 한 환자는 최소 반년, 다른 환자는 석 달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거라는 진단이었다.
장목화는 성건우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명호와 정도연의 진단서? 잔나가 대사가 보낸 건가? 우리가 멋대로 떠난 것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는 건가? 예언 능력은 정말 신기하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나가 대사는 정말 좋은 분이에요.”
장목화도 깊이 동감했다. 잔나가 대사는 정말로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 * *
퍼스트 시티, 시카라 사원, 외부의 거리.
감찰관 알렉산더는 환하게 밝혀진 7층짜리 사찰을 바라보다가, 은은하게 울리는 불경 소리를 들으며 옆에 있는 딸 갈루란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잔나가 대사가 입적하셨구나⋯⋯.”
* * *
북안 뭇 산, 버려진 도로와 이어진 어딘가.
황폐해진 지 오랜 논밭에, 그 사이를 구불구불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었다. 수질이 얼마나 깨끗한지 바닥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초봄 마을의 생존자들은 보물이라도 본 듯 감격한 표정을 드러냈다.
몇몇 아이들은 냅다 개울가로 달려가 두 손에 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고, 심지어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흙에 입을 맞추는 이들도 있었다.
“검측하지도 않고 바로 마시는 건가?”
게네바가 정도연에게 물었다. 야외 생존 수칙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이라서였다. 겉보기에만 깨끗한 물도 분명 있었다.
정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전에 마시던 물보다는 나으니까.”
초봄 마을 주민들은 변이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된 물을 무려 수십 년 동안 마셔왔었다.
게네바는 묵묵히 이 새로운 인간 행동 방식을 데이터베이스에 추가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명호가 멀찍이 자리한 조그만 폐허 도시를 발견했다.
구세계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 여러 채가 아직 우뚝 서 있었고, 겉면 대부분은 녹색 덩굴 식물에 뒤덮여 있었다.
이내 한명호가 정도연을 쳐다보았다.
“우린 이제 퍼스트 시티로 돌아가 새로운 약을 받아야 해.”
정도연이 짧게 답했다.
“그래. 큰 흰둥이 쪽에 수술할 의사랑 장소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면 뜻밖의 일도 방지할 수 있을 거야.”
한명호는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 없이 버려진 도로 한쪽에 세워둔 검은 SUV로 다가가 저장해 둔 휘발유를 연료 탱크에 주입했다.
그 사이, 정도연은 촌장과 몇몇 친척에게 자신의 병증을 설명했다.
“저는 이제 퍼스트 시티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돌아올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촌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넌 우리 마을에서 가장 건강한 아이였는데, 결국에는 변이를 피하지 못했구나. 어쩌면 그게 우리 초봄 마을의 숙명인지도 모르지.”
정도연의 사촌 오빠는 못 참겠다는 듯 분노를 표했다.
“이 빌어먹을 애쉬랜드, 빌어먹을 세상!”
정도연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웃을 뿐이었다.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요. 치료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촌장이 뒤를 한번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여긴 오염되지 않은 곳이니 우리 운명도 조금씩 바뀌게 될 거다. 너도 그럴 거고. 꼭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마.”
정도연은 고개를 틀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검은 SUV를 쳐다봤다.
“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촌장과 친척에게 뭐라 답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휘휘 흔들던 그녀는 가볍게 뛰어 검은 SUV 보조석으로 향했다.
* * *
다시 도로를 달리며 뭇 산 곳곳을 우회한 차는 북안 불모지로 향했다.
한명호, 게네바, 정도연은 교대로 운전대를 잡으며 차를 몰았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최대한 빨리 레드리버 다리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동 중 또 한 번 극단적인 날씨를 만났다. 차 앞 유리를 깰 듯이 단단하고 큰 우박에 어쩔 수 없이 피할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정오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저 멀리 레드리버 다리가 보였다.
보통 때처럼 그곳에 도시 방위군 검문소가 있었고, 그 때문에 차량 행렬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게네바는 바로 앞에 탄 두 사람에게 말했다.
“위장해야겠다. 병사를 매수할 돈도 준비하고.”
“알겠어.”
한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차 속도를 늦춘 그가 차를 세울 으슥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창 전방의 도로를 살피던 한명호가 무심히 운을 뗐다.
“만약 새로운 치료 방법이 효과가 있다면, 그래서 나한테 반년 정도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난 일단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 거야. 괜찮은 기계 심장은 네 것보다 훨씬 더 강하지 않겠어?”
아무런 대답이 없자 한명호가 고개를 돌렸다.
보조석엔 어느새 가엽게 웅크려 앉은 정도연이 있었다.
눈을 꼭 감은 그녀는 뺨이 붉게 상기돼 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거기다 수시로 경련을 하기도 했다.
한명호는 조심히 오른손을 뻗어 상대를 한번 깨워보려 했다.
“⋯⋯정도연?”
게네바도 뒷좌석에서 앞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자세히 검사해보았다.
“의식을 잃었어. 병증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초봄 마을에서의 격렬한 전투가 정도연의 생명을 대폭 갉아먹은 것인지, 바람이 이루어진 이후 완전히 마음을 놓았기 때문인지, 그녀 몸속의 병마는 순식간에 무서울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몇 초간 침묵하던 한명호는 좀 으슥한 곳을 찾아 그곳에 차를 세웠다.
“겐, 얼른 위장해. 최대한 빨리 도시로 들어가야 해.”
한명호는 아무 표정 없이 말했지만, 침착한 어투와는 달리 매우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네바는 또 다른 군용 외골격 장치처럼 트렁크에 숨고, 한명호는 사냥꾼 동료에게 병이 났다는 구실로 검문소 병사에게 돈을 쥐여주었다. 검은 SUV는 결국 성공적으로 레드리버 다리에 올랐다.
* * *
한창 또 달려가는데, 어느 순간 정도연이 깨어났다.
눈을 번쩍 뜬 그녀는 한명호를 돌아보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젠 시간이 다 됐나 봐. 나 약속 안 어겼지? 사실 나도 이젠 그 약속 지키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
한명호는 시종일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큰 흰둥이 쪽에서 찾은 진료소에 도착하면 넌 일단 수액부터 맞아야 할 것 같아. 열부터 내린 다음에 새로운 치료 방안을 생각해 보자.”
다시 힘겹게 웃던 정도연이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 넌 늘, 언제나 그랬어. 입만 거칠지 마음은 너무 여려. 앞으로는 그러지 마. 모, 모든 사람이 네가 지, 진짜로 하려는 말이 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한명호는 아무 말 없이 차의 속도만 높였다.
뒷좌석에서 게네바도 입을 벌렸지만 끝내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정도연은 점차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간신히 입을 뗐다.
“네, 네가 그랬었지. 이 세상에 미련이 생기지 않냐고, 조금 이기적으로 굴 수는 없냐고. 그래. 사실은, 사실은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무지를 일구고, 함께 농사를 짓고, 함께 사냥하고 싶어.
너한테 더 이상 마음속의 고민을 숨겨두지만 말고, 말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고⋯⋯. 심지어 난 우리 둘, 둘 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면, 지, 지금처럼 이렇게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질척질척한 진흙탕에 빠진 우리 둘이, 아무것도 없는 우리 둘이, 서, 서로 의지하면서 남은 생을 함께 살아갔으면⋯⋯.”
흠칫 몸을 떨던 한명호가 고개를 돌렸다.
정도연은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왼손을 뻗어 핸들에서 자유로운 한명호의 오른손을 건드렸다. 다시금 그녀의 힘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 한명호, 더 이상 네가 이기적이란 거짓말은 하지 마. 너, 넌 절대로 그런 사람이 못 돼. 앞으로 넌, 나 대신, 살아가야 해. 나 대신,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해야 해⋯⋯.
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도 배우고, 무엇보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해. 그래야 네 인생도 비로소 완전해지는 거야. 그래야 넌 비로소 진정한, 진정한 인간이 되는 거야⋯⋯.”
“같이 해.”
한명호는 정도연의 왼손을 꽉 움켜쥐며 차를 더 빠르게 몰았다.
운전하는 동안 정도연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온도도 점차 차갑게 식어갔다.
목에 뻣뻣하게 힘을 준 한명호는 애써 정면만 응시하며 속도를 높였다.
* * *
저녁 8시, 안타나 스트리트, 어느 불법진료소 안.
한명호의 심장 이식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구조팀은 약속된 시간에 맞춰 반고 바이오의 회신을 받았다.
장목화는 성건우, 게네바에게 해독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현재 백새벽은 안전 가옥에서 용여홍을 살피는 중이었다. 지금 용여홍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해서 함부로 어디 옮겨 다닐 수가 없었다.
“일단 회사로 돌아와 한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호움 난임 센터와 그 비밀 실험실에 대해 고려해보래. 겐, 넌 앞으로 어쩔 계획이야?”
장목화가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게네바는 이미 인공지능 로봇의 아버지인 오레이가 자신과 동료들에게 인간과 비슷한 의식이 생성되리라 믿었다는 그 얘기를 들은 상황이었다.
이에 상당히 감격해 진료소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는 장목화의 질문에 잠시 연산을 시작했다.
“난 퍼스트 시티에 남아 너희를 기다릴게. 그 비밀 실험실을 탐색해서 오레이가 남긴 자료를 찾을 기회가 있을지 살펴보지. 여긴 배터리를 충전하기 편한 곳이기도 하고.”
“그래.”
장목화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게네바에게 소스 브레인에 대한 의심까지 전하진 않았다. 오랜 싸움에 몹시 지친 구조팀에겐 뜻밖의 상황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일단 장목화는 반고 바이오가 호움 난임 센터와 그 비밀 실험실 탐색 임무를 부여하든 말든 팀원들과 다시 퍼스트 시티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준비를 한 뒤에 게네바에게 이 문제를 얘기해도 늦지 않았다.
“조심해. 거긴 로봇한테 그리 안전하지 못한 곳이니까.”
성건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당부했다.
* * *
며칠 후, 장목화가 병상에 누운 한명호에게 물었다.
“명호, 넌 이제 뭘 할 생각이야?”
이미 구조팀이 반고 바이오 사람임을 아는 한명호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한동안 초봄 마을에 머물면서 그들을 도와 마을을 다시 세우려고.”
반고 바이오의 제안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었다.
백새벽은 그를 보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너, 아류인을 멸시하지 않았어?’
초봄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아류인이었다.
그 사이 한명호가 덧붙였다.
“혹시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초봄 마을로 와서 날 찾아.”
“그럴게.”
장목화는 이번에도 아무런 강요 없이 그의 뜻에 맞춰주었다.
그러나 성건우는 못내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