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13화 (513/649)

513화. 이주

퍼스트 시티, 그림 시계점.

헬기에 있던 그 사람이 갑자기 뛰어내린 이후, 도시 방위군의 수색 작업은 정체돼 버렸다.

각성자의 능력은 비밀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정신을 차리기 전까진 다른 이들은 조금 전 습격이 어느 쪽에서 발생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퍼스트 시티의 다른 강자들이 몰려들기 전, 작업 구역에서 걸어 나온 옅은 금색 수염의 그림이 손을 닦으며 말했다.

“이식은 끝났어. 근데 환자는 아직 안 깨어났다. 난 의사가 아니라 언제쯤 깨어날지는 모르겠네.”

“저⋯⋯. 이식 수술비는 얼마인가요?”

장목화가 간신히 웃음을 짜내며 물었다.

그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콘리가 그러던데, 자네들에게 아주 대단한 응급 치료 주사가 있다고. 괜찮다면 이식 수술비 대신 그 주사 두 개를 주는 게 어때? 그거라면 중요한 순간에 목숨을 구해줄지도 모르니.”

구조팀에 현재 남은 페이카는 총 네 개였다.

너무 후하다고 생각했던 장목화는 곧 뭔가를 깨달았다.

반고 바이오 직원들에게 페이카는 다른 물건들처럼 다 쓰면 언제고 다시 신청해 받을 수 있고, 수량도 넉넉한 응급 치료 주사일 뿐이었다. 하지만 애쉬랜드의 다른 사람들에겐 또 하나의 목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 용여홍도 페이카 세 대를 맞지 않았다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날 때까지 결국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네, 그러죠.”

장목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돈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빚이 없으니 용여홍을 담보로 맡겨둘 구실도 없었다.

머지않아 이 구역은 더더욱 엄격하고 자세한 조사를 받게 될 것 같았다. 용여홍을 이곳에 홀로 남겨두는 건 상당히 위험했다.

백새벽은 성건우와 함께 간이 들것으로 용여홍을 옮겼다.

이제 용여홍의 오른팔은 메탈블랙색으로 변해 있었다.

용여홍을 지프 뒷좌석에 안전하게 싣고, 백새벽은 운전석에 앉아 바로 시동을 걸며 장목화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죠? 포카스 장군한테 요양할 곳을 찾아달라고 할까요?”

지금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빨리 용여홍에게 링거를 맞혀 수술이 빛바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목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포카스 장군을 찾아가지는 않을 거야.”

백새벽은 바로 의혹을 표했다.

“예?”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수스랑 크리스티나를 만난 거, 너무 지나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두 사람 대화를 들어보면 크리스티나는 그 아파트 주민이었어. 최소한 수시로 그곳에 머물러 왔었고.”

장목화가 나열하는 사실들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백새벽은 단박에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팀장님 말은, 그게 포카스 장군이 준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장목화가 생각에 잠겨 답했다.

“꼭 준비한 거라 볼 순 없는데……. 포카스 장군은 특파원 중 한 명의 안전 가옥과 크리스티나의 집이 같은 건물이란 사실을 발견하고,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아무 손해도 입지 않을 방법을 택한 거야. 우리를 보내는 거.

아수스랑 크리스티나, 그리고 욕망 성인 교파의 관계야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테니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우릴 이용한 거지.”

한창 뒷좌석에서 용여홍을 살피던 성건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엉큼하네. 우리한테 아직 축하연도 안 열어줬으면서.”

장목화는 늘 그랬듯 그를 무시하고 백새벽에게만 말했다.

“레드울프로 가자. 마지막 안전 가옥으로. 저녁에 부근의 병원에서 약을 좀 훔쳐 와서 우리가 직접 수액을 달아주자. 회사에도 상황을 보고하고.”

“네.”

백새벽은 안타나 스트리트 밖으로 차를 몰았다.

* * *

신분증과 문서, 제복을 갖춘 구조팀은 퍽 어수선한 현장 분위기에 힘입어 이 위험 지역을 꽤 수월하게 빠져나갔다.

그때, 문득 차창을 쳐다본 성건우가 갑자기 기쁜 얼굴로 외쳤다.

“이두형 선생님!”

성건우를 따라 시선을 옮긴 장목화는 검은 가운을 입고 한 골목길 안에 앉아있는 이두형을 발견했다. 그는 거미줄을 짊어진 전봇대에 머리를 살짝 뒤로 기댄 채 잠든 것 같았다. 매우 편안해 보였다.

이미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태양 때문에 주변은 온통 어두웠다. 성건우의 예리한 눈썰미가 아니었다면 이두형을 못 보고 지나쳤을 듯했다.

이두형은 골목길 양쪽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 속에, 검은 옷차림으로 아예 어둠 속에 녹아든 상태였다.

수종이마저 놀라 달아나게 하는 범상치 않은 그 이름에, 백새벽도 곧장 브레이크를 밟아 지프를 길가에 세웠다.

차에서 내린 성건우는 이두형에게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이를 보고, 장목화도 잠시 망설이다가 역시 두 사람 곁에 앉았다.

그러나 백새벽은 뒷좌석에서 수액을 맞는 용여홍을 지키고 있었다.

이두형이 고개를 살짝 틀며 눈을 떴다. 그는 성건우를 한번 훑어보더니 다시 아까 전의 자세로 돌아갔다.

“당신은⋯⋯.”

그의 말투에 평소와 달리 피로가 어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성건우는 말 그대로 의중 같은 건 생각지 않고 물음에만 답했다.

이두형이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로 온 건, 당신이 심령의 복도에 진입했기 때문이군요. 이런 우연이⋯⋯.”

장목화는 이 대화에 끼어들지 않으려 온 힘을 다했다.

‘이두형 선생님, 왜 그렇게 도사처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내 성건우가 고스란히 충격받은 얼굴을 드러냈다.

“그렇게 티가 나나요?”

이두형은 눈도 뜨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네, 제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요. 심령 방의 상태를 바꾸는데 급급해하지 마세요. 바로 방에서 나와 복도로 진입하려 하지도 마시고요. 한두 달 정도 기다리면서 정신 상태를 어느 정도 안정시킨 뒤에 그런 작업들을 해야, 당신의 대가 악화 정도를 효과적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성건우는 대가의 주체가 당신‘들’이라고 반박하진 않았다.

다시 이두형이 말을 이었다.

“이만 가보십시오. 제 잠을 방해하지 마시고.”

“그러죠.”

성건우는 언제나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뒤이어 의혹 어린 눈으로 이두형을 힐끔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턴 장목화도 골목길 밖 길가에 선 지프로 돌아갔다.

* * *

북안 불모지.

현재 대규모의 차량 행렬이 뭇 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망쳐 나온 초봄 마을 주민들이었다.

퍼스트 시티의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 밤중에 거의 4시간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도 없고 별도 얼마 뜨지 않은 오늘 밤, 계속 주행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일찍이 발굴된 작은 폐허 도시에 이른 이들은 임시로 야영하며 위험을 피하기로 했다.

한명호, 정도연, 게네바의 짙은색 SUV는 행렬 맨 끝에서 이동 흔적을 지우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도 폐허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건물 사이, 바깥의 사람은 볼 수 없는 이곳에 열 개 이상의 모닥불이 피워진 걸 보았다.

초봄 마을 주민 대부분은 정상인과 달랐다. 외부인의 말로 표현하자면 모두의 생김새가 각자 다 기괴했다.

지금 모닥불가에 둘러앉은 그들은 얼른 휴식을 취하거나, 주위를 순찰하거나, 배를 채우고 있었지만 따로 말을 하는 이는 없었다. 거기에 비정상적인 겉모습까지 어우러지니 전체적으로 다소 우울한 분위기였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정도연은 한명호, 게네바에게 설명했다.

“다들 평소에는 친근하고 열정적이야. 근데 지금은 외부인이 있는 데다가 지난 몇 달 동안 갇혀 있었잖아. 마음을 쉽게 열기 어려운가 봐.”

“상관없어.”

한명호가 간단하게 답했다.

게네바에게는 더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때, 두 다리가 위축된 촌장이 몸만 큰 그의 아들에게 업혀 다가왔다.

이내 그는 전에 한번 얘기한 목적지에 대해 정도연과 상세히 토론했다.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한 그는 다시 모닥불 앞으로 돌아가 손뼉을 두 번 쳤다. 아직 잠들지 않은 주민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에게 쏠렸다.

촌장은 목을 가다듬은 뒤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거다. 그리 오랜 시간 살았던 마을을 떠나는 건, 우리가 스스로 일궈낸 논밭을 버리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우린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험 대상이 된 사람들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 다들 똑똑히 봤잖아. 퍼스트 시티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다들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들은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 번은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긴 불가능이야. 우리는 단 한 번의 패배로 완전히 궤멸할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전하는 현실에 주민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유랑은 사실 애쉬랜드 사람 대부분의 생존 방식이다. 몇 년, 혹은 그보다 짧은 시간에도 각자 각양각색의 원인으로 이주를 한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 상황은 훨씬 낫지 않은가? 적어도 우리는 퍼스트 시티 사람들한테 붙잡혀 있다가 무사히 도망쳐 나와 살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주민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공황과 불안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죽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들을 둘러보던 촌장의 얼굴에 점점 더 상기된 빛이 감돌았다.

“도연이가 살기 적합한 곳을 찾았단다. 거긴 음용할 수자원도 충분하고, 개간할 황량한 논밭이 있고, 개조할 수 있는 버려진 유적이 있다는구나! 지금은 또 여름이라 거길 고칠 시간도 충분해!

바쁘게 일해서 첫 수확을 얻으면, 새로운 초봄 마을이 세워지겠지? 거긴⋯⋯, 거긴 오염되지도 않았다. 오염되지 않았다고! 우리 후손들도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올 거고, 더는 변이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거다!”

초봄 마을 주민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다들 좌우를 둘러보며 서로에게 귓속말도 하며 촌장의 말을 검증하려했다.

그때, 정도연이 두 손을 입가에 대고 목청을 높였다.

“진짜예요! 제가 보장해요!”

그녀는 오늘 마을 주민들 앞에 평소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대단한 조력자들을 데려와 퍼스트 시티 수비군으로부터 주민들을 구해낸 정도연은 어느새 그들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대상이 되었다.

정도연이 보장한다는 말은 그 어떤 것보다 힘이 컸다.

짧은 침묵 이후, 기괴한 모습으로 변이된 주민들 사이에서 각양각색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만세!”

“우라!”

“오, 하느님!”

잔뜩 흥분한 그들의 외침에 잠들어 있던 주민들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아낌없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정도연은 조금 얼떨떨해졌다. 벌써 모든 주민과 함께 그 골짜기에 도착한 것 같았다.

주민들과 힘을 합쳐 잡초를 제거하고, 논밭을 개간하고, 이웃과 도랑을 만들고, 깨끗한 수자원을 끌어오고, 친척들과 온종일 바쁘게 밀을 수확하다가 식탁에 둘러앉아 맑은 물로 만든 술을 마시며 즐겁게 지내는…….

하나둘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그 그림을 향해 정도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주민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가장 바깥쪽에 서 있던 한명호가 정도연을 돌아보았다.

“이 세상에 미련이 생기지 않아? 죽기 싫지?”

정도연이 솔직하게 답했다.

“조금은. 근데 걱정하지 마, 난 약속은 지켜.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한명호는 가타부타 말없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조금 이기적으로 굴 순 없어?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기 전에 너 자신부터 생각하라고.”

정도연이 자신의 짧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근데⋯⋯.”

그러다 문득 그녀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한명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약속을 번복하고 사력을 다해 다시 살려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 안 돼? 넌 왜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데? 왜 넌 이기적으로 굴지 않는 거야?”

한명호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내내 주위를 순찰하던 게네바도 둘의 대화를 들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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