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융합
엘리베이터 안의 버튼은 하나뿐이었다. 그 옆에는 애쉬랜드어와 레드리버어로 병기된 단어가 있었다.
[심령의 복도]
성건우는 재차 손을 뻗어 그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문을 닫은 황금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성건우의 몸은 점차 가벼워졌다. 머릿속도 그랬다.
이윽고 그는 주위에 떠오른 빛 덩어리들을 보았다. 각기 다른 빛 덩어리 안에서는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나타났다.
[단기 치매] [사유 혼란] [사유 이식] [극단적 충동] [숫자 백치]
[난산증] [내부 간첩] [멍청한 아우라] [잠재의식 사유] [사유 판독]
[의도 동요] [동기 흐리기] [나약한 마음] [문학청년] [억지쟁이]
[겁쟁이] [통곡의 근원] [두려움] [함구증] [양발 동작 불능]
[세 번째 다리 동작 불능] [머리 동작 불능] ⋯⋯
그중 몇몇 빛 덩어리는 아주 가깝고 또렷해서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몇몇 빛 덩어리는 상대적으로 멀고 극도로 흐릿해서 접촉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것 외에 또 다른 빛 덩어리 두 개는 성건우 정수리 위에 떠 있었다.
[수량 배가] [거리 증대]
생각에 잠겨 있다 머리에 쥐가 난 성건우가 곧장 오른손을 뻗었다.
열 겹의 잔영으로는 열 개의 목표를 움켜쥘 수 있었다.
더 많은 수로 분화될 수 있다면,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빛 덩어리 열 개와의 접촉은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성건우의 손을 따라 체내로 스며든 건 세 개뿐이었다.
[사유 이식] [문학청년] [양발 동작 불능]
이는 곧 성건우가 원래 가진 세 개의 빛 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사유 이식은 추리 광대에 녹아들어 ‘사유 유도’로 변했고, 문학청년은 억지쟁이에 녹아들면서 ‘문학청년-억지쟁이’로, 양발 동작 불능은 양손 동작 불능에 녹아들어 ‘사지 동작 불능’으로 변경됐다.
융합이 끝나자, 황금 엘리베이터도 멈췄다.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활짝 열렸고, 성건우의 눈앞에 텅 빈 방이 나타났다.
맞은편에는 황금 손잡이가 달린 주홍색 문이 하나 나 있었다.
성건우가 방 안에 들어서자 뒤쪽의 황금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사라지며 자육한 기체로만 남았다.
기체 안에는 미약한 빛을 번득이는 바다와 하나하나의 섬, 그리고 햇빛을 비추는 거대한 균열이 있었다.
기원의 바다였다.
지금 기원의 바다는 거대하고 입체적인,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곧장 돌아서 기체 안으로 손을 뻗은 성건우는 햇빛으로 인영을 응집하려는 균열을 건드렸다. 그러곤 크게 외쳤다.
“할 수 있다면 맹목 효과를 발휘해보시지!”
심령의 복도 급 억지쟁이를 발휘한 것이었다.
균열 맞은편의 존재는 침묵에 잠긴 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기원의 바다가 컴컴해졌다.
아니, 아니었다. 컴컴해진 건 기원의 바다가 아닌 성건우의 시야였다.
성건우는 맹목 효과를 일으키는 기운이 아직도 밀려들고 있다는 걸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 * *
현실 세계.
성건우는 오른손으로 무장 벨트에 채워둔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손전등의 매끄럽고 투명한 거울면은 순간 먹물에 물든 듯 어두워졌다.
이후 손전등 스위치를 누른 성건우가 빌려온 기운을 남김없이 폭발시켰다. 켜진 손전등에서 발산된 건 빛이 아닌 어둠이었다.
어둠은 곧장 현실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가상 세계의 상극이었다.
손전등에서 발산된 어둠은 천장을 관통한 뒤 밤하늘과 융합하더니 상공의 헬기를 소리 없이 뒤덮었다.
다다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드디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가운데, 그곳에서 엄청난 두려움에 잠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헬기에 탑승한 상대의 대가는 폐소 공포증이었다.
몇 초 후, 벌컥 열린 헬기의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냅다 뛰어내렸다.
퍽-
그리고 멀리 머리를 다 저릿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한 높이에서는 물질 간섭 능력이 있는 각성자라도 중상을 당하기 쉬웠다. 게다가 깨진 거울 영역의 각성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성건우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는 장목화와 백새벽을 향해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해결했어요.”
그사이 또 다른 성건우가 심령의 방 안에서 기원의 바닷속 거대한 균열을 향해 억지쟁이를 한 번 더 발휘했다.
“할 수 있다면 몇 분 기다려보시지!”
현실 세계의 성건우는 바로 또 덧붙였다.
“귀 좀 막고 있어요.”
장목화, 백새벽도 별말 없이 능숙하게 귀를 틀어막았다.
뒤이어 귀를 틀어막은 성건우는 휴대용 녹음기를 꺼내 음량을 최소 수준으로 조절한 뒤, 녹음된 오하명의 음성을 반복 재생했다.
계속 반복되는 녹음본 속 오하명의 신비한 힘은 완전히 다 사라졌다.
시간을 계산한 후 성건우는 귀를 막은 손을 거두고 상황을 확인했다.
뒤이어 휴대용 녹음기를 움켜쥔 그는 수종이의 녹음본 안에 남아 있던 신비한 힘을 자신의 심령 방 안으로 옮겼다.
* * *
이때 균열에서 쏟아지던 햇빛은 벌써 억지쟁이의 영향을 벗어나 인영으로 응집된 뒤 침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종이의 쉬 소리를 자신의 기원의 바다로 집어넣었다.
쉬쉬쉬- 쉬쉬쉬-
햇빛으로 응집된 인영이 흠칫 멎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 뭔가를 떠올린 듯 황급히 균열 안으로 파고 들어간 인영은 자발적으로 그 균열을 봉합하기까지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점차 약해지던 쉬,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뒤이어 기원의 바다 안에는 새로운 균열이 나타났다.
그 균열 안쪽에는 미약한 빛과 중첩된 수많은 그림자가 자리해 있었다.
성건우는 그 균열을 보고 무척 기뻐하며 외쳤다.
“수종아, 수종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없나 보네.”
한숨을 푹 내쉰 성건우는 현실 세계로 완전히 돌아갔다.
급한 볼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 * *
현실 세계.
성건우가 취한 일련의 동작을 보고 그의 상태를 대충 알아차린 장목화가 귀를 막은 손을 내려놓고 떠보듯 물었다.
“너, 심령의 복도에 들어갔어?”
‘그렇게나 쉽게?’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목화와 백새벽의 표정이 변한 사이, 그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화장실 어딨어요?”
* * *
북안 불모지, 초봄 마을, 방공호 안.
깊은 곳으로 진입한 게네바는 마침내 은백색 금속 문을 발견했다.
그는 이 문 뒤에 퍼스트 시티가 지어둔 실험실이 있다고 판단 내렸다.
현재 문 양옆에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입은 병사가 각각 한 명씩 서 있었다. 중기관총으로까지 무장한 그들은 그곳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게네바가 가까이 접근하자 두 병사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다다다-
한 사람은 난사를 시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왼팔을 유탄발사기로 바꿔 게네바 쪽으로 포탄을 날렸다.
그러나 게네바는 의연했다. 이 또한 이미 분석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퍼스트 시티의 사람이라도 실험실에 들어가기 위해선 사전에 통지하고 정확한 센서를 착용해야 했다. 고지도, 표식도 없이 접근했다간 무차별적인 습격을 당할 수 있었다. 허락되지 않은 사람을 실험실 안에 들이느니, 오해로 인한 살인도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 피할 수 없는 기습이었다. 그렇지만 게네바는 지능인이 아니었던가. 계속 전방을 스캔했던 그는 때맞춰 반응에 나섰다.
쾅!!!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사이, 중앙을 피한 게네바는 자신의 전자파 무기를 이용해 반격했다.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두 병사 역시도 종합 경보 시스템을 이용해 게네바와 공격을 주고받았다.
지금 게네바가 의혹이 드는 부분은 실험실 입구에 갑자기 나타난 자신을 보고도 딱히 놀란다거나 당황하지 않는 이 병사들의 태도였다. 두 병사는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을 수백 번, 수천 번 받기라도 듯 한없이 침착했다.
다다다-
콰릉! 콰릉!
탕! 탕! 탕!
퍽! 퍽! 퍽!
게네바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두 병사는 그야말로 펄펄 날며 폭발과 유탄 속에서 상대를 향해 끊임없이 화력을 퍼부었다.
그들의 기세는 한동안은 비등했다. 방공호 또한 매우 견고해서 이러한 충돌에 무너져 내리려는 조짐은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게네바만 살짝 불리한 처지였다.
한창 스파크를 번득이던 게네바는 코어 여러 개가 있어 다중 작업이 가능한 CPU를 이용했다. 이것이면 격한 전투 중에도 스피커를 쓸 수 있었다.
“허튼 생각 말고 무기 버려. 투항해라! 너희는 아무 지원도 받을 수 없다. 수비군 전원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거나 도망쳤다. 안 그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을까.
우리 군은 아직 밖에 있다. 곧 들어올 테니, 너희는 투항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다. 우린 퍼스트 시티와 포로를 교환할 예정이다!”
게네바는 장목화처럼 두 적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놓을 작정이었다. 계속해서 싸움만 이어갔다간 20분 안에 승부를 보기 어려웠다.
그가 한 말 중에는 거짓이 없었다. 지능 로봇 하나가 아닌 한명호, 정도연 두 사람이나 있는 거라면 군대라 불리긴 충분하지 않은가?
또 게네바는 이런 환경에선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확실히 승기를 잡을 거라 예상했다. 저 병사들이 착용한 군용 외골격 장치 배터리는 점점 줄어들 테지만, 그는 열 개 이상의 고성능 배터리를 가지고 있었다.
진심 어린 게네바의 충고에도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두 병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의 기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맹렬한 화력으로 게네바의 접근을 저지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얼굴이 헬멧에 가려져 있어 게네바는 상대의 표정 변화도 관찰할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의 신체 신호를 바탕으로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은 상대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음을 인지했다.
잠시 후, 게네바가 상대의 마음을 공략하는 책략을 포기하려 한 그때였다. 두 병사가 갑자기 게네바를 안전거리 밖으로 떠밀어내더니, 동시에 돌아서 실험실로 이어지는 은백색 금속 문 앞으로 돌아갔다.
삐-
뒤이어 문이 옆으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두 병사는 앞뒤로 서서 그 안으로 달려들었다.
이 틈을 타 안으로 난입하려던 게네바는 순간 불길한 신호를 감지했다.
이에 황급히 몸을 돌린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멀리 몸을 날렸다.
게네바가 막 착지하자마자 뒤쪽에서 묵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르릉!
점점 커진 폭발의 규모는 실험실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 여파에 방공호도 격렬하게 흔들렸다.
자폭 장치였다. 두 병사가 실험실의 자폭 장치를 가동한 것이었다.
게네바는 방공호도 따라 무너질까 걱정이 되어 얼른 출구로 달렸다.
여태 적잖은 사람을 만나왔고, 구세계 콘텐츠도 꽤 많이 봐왔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건한 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자폭 장치를 활성화한 두 병사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었다 한들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게네바의 핵심 모듈 안에선 의문이 하나둘 피어올랐다.
이게 바로 인간의 희생정신일까? 그들은 자폭 장치를 활성화했을 때 조금의 두려움도, 후회도 없었을까?
게네바가 방공호를 나왔을 때, 초봄 마을의 생존 주민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자신의 차, 혹은 억지로 시동을 건 수비군들의 차로 이곳저곳을 오가며 물자를 찾아 싣고 있었다.
정도연이 따로 주문한 건 없지만, 여태껏 애쉬랜드에서 생존을 위해 수많은 경험을 했던 그들은 이곳에서는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조금 있으면 퍼스트 시티 부대가 속속들이 돌아올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땅의 진동을 느꼈던 한명호가 게네바를 보고 얼른 물었다.
게네바는 금속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답했다.
“실험실이 파괴됐어.”
“그럼⋯⋯.”
정도연은 장목화가 게네바에게 따로 맡긴 일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게네바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10분 안에 출발해야 한다.”
“그래.”
정도연은 군용 외골격 장치에 달린 스피커를 이용해, 고향 사람들에게 곧장 이 사실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