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11화 (511/649)

511화. 앞선 대비

황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 정도연은 자신의 상태를 떠올리고 황급히 군용 외골격 장치의 헬멧을 벗었다.

“저예요!”

“연이?”

“정도연?”

“도연이라고?”

감옥에서 놀라움 섞인 탄성이 흘렀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순간 정도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 긴박한 상황에 ‘연이’란 애칭이 너무 깜찍하기 이를 데 없어 조금 민망해진 탓이었다.

이내 도리질로 쓸데없는 생각을 떨친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문 열어드릴게요.”

감옥 열쇠를 가진 경비병을 찾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힘으로 자물쇠를 열어버릴 작정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헬멧을 다시 착용했다. 어딘가에 숨어있는 적이 독가스를 방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때 이곳까지 쫓아온 한명호가 좌우를 둘러보며 함께 도우려 나섰다.

“네가 데려온 사람이냐?”

촌장이 가까이 다가온 정도연을 보며 침착하게 물었다.

또 다른 주민도 감옥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 외골격 장치는 어디서 난 거야?”

사실 이들도 밖으로 나가 아직 잡히지 않은 정도연이 다시 돌아와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평범한 유적 사냥꾼 혼자 그런 임무를 완수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설령 수십, 수백에 달하는 황야유랑자나 유적 사냥꾼들을 끌어들인다 한들 퍼스트 시티 정규군에 맞서긴 거의 불가능했다.

또 방공호 안에 새로 지어진 감옥에 갇히고 퍼스트 시티가 이쪽의 실험에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급기야 이곳에 심상치 않은 강자를 파견하고 무시무시한 무기 장비도 적잖게 지원해줬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모든 희망이 꺾였다.

다들 그저 초봄 마을을 떠난 정도연이 무사히 잘 살기만 바랐었다.

그런데 정도연이 정말로 이렇게 자신들을 구하러 다시 나타났다. 어젯밤 수비군들 사이에 일어난 혼란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구원의 서곡이었다. 이중 누구 하나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꿈같은 현실이었다.

무려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정도연이 동료 하나와 로봇까지 데려와 경계가 삼엄한 방공호를 뚫고 수비군들을 다 격파하고 몰아냈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게 놀랍거나 기쁘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던 이때 다시 뜬 희망 앞에 누구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탕! 탕! 탕!

정도연은 정조준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돌격 소총으로 감옥들에 걸린 자물쇠를 명중시키며 모든 자물쇠를 파괴하고 날려버렸다.

한명호 역시 탄창을 갈아 끼우며 정도연을 도왔다. 그의 사격 솜씨는 정도연과 게네바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여러 개의 철창문이 열리자 정도연은 얼른 촌장의 질문에 답했다.

“제가 모셔온 조력자분들이에요. 수비군들은 이미 저희가 다 처리했으니 다들 얼른 나가세요. 차와 물자를 찾아 15분 내로 철수해야 합니다.”

촌장은 그 말에 상당히 놀랐다.

“겨우 둘이서 이 일을 해냈다고?”

정도연은 다시 촌장의 말을 정정했다.

“셋입니다. 수비군 대부분이 퍼스트 시티에 소환된 상태라, 여기 방어력이 굉장히 약해져 있었어요. 근데 다들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래, 다들 나가서 차와 식량을 찾도록!”

촌장이 곧장 손을 휘두르며 지시한 뒤, 그의 아들에게 업혔다.

촌장의 아들은 지능이 7, 8살 수준인 성인 남자였다.

그때, 곁에 있던 게네바가 다급히 물었다.

“실험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능인 게네바는 실험실 안의 귀중한 자료를 챙겨야 한다는 장목화의 당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촌장은 이렇게 능동적인 로봇에 놀란 까닭에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

“가장 안쪽에 있네.”

금속 목을 끄덕거린 게네바가 정도연, 한명호를 돌아보았다.

“너희는 주민들과 함께 나가서 이동에 필요한 각종 준비를 부탁한다. 그 인공지능 갑옷도 잊지 말고. 지금은 망가졌더라도 고치면 또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니. 큰 흰둥이 팀은 그런 방면에 강하다.”

그런 방면에 강한 건 사실 구조팀이 아닌 반고 바이오였다.

검푸른 제복 차림의 게네바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돌아서더니 방공호의 가장 안쪽을 향해 달려갔다.

시선을 주고받던 정도연과 한명호는 곧장 게네바의 말에 따랐다.

* * *

퍼스트 시티, 그림 시계점 안.

장목화는 머리를 굴리며 도주 방안을 고민하면서도, 부디 자신의 추측이 틀리기를 바랐다.

조금 전 이곳에 방문했던 도시 방위군이 그런 말을 했다고 꼭 이 구역이 가상 세계에 뒤덮여 있다고 볼 순 없었다.

설령 가상 세계에 뒤덮여 있다 한들 그 주인은 마커스를 보호하면서 구조팀과 접촉했던 그 사람이 아닌, 거울교의 다른 강자일지도 몰랐다.

다다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는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의 소음이 된 그 소리 때문에 대화하려면 이제 거의 악을 써야만 했다.

백새벽은 긴장한 듯한 장목화와 진지해진 성건우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침묵했다. 혹여 뜻밖의 상황이 벌어질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이내 성건우는 문 근처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상공에 머물러 있는 헬기를, 일찍이 구조팀에 농락당했던 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의 의혹 어린 눈빛을 마주 보려는 것 같았다.

‘여홍이 수술에 엄청나게 방해될 텐데.’

속으로 중얼거리던 성건우가 손을 들어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렇게 잠시 기계식 시계 여러 개가 진열된 진열장에 기댄 채 잠깐 졸았다.

* * *

기원의 바다 안, 황금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섬 위.

이곳에 떠오른 성건우의 인영은 빠르게 아홉으로 분열된 뒤 엘리베이터 문 앞을 막은 또 다른 성건우를 빙 에워쌌다.

그중 하나가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신중하게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결정 내릴 때가 왔어.”

황금 엘리베이터 앞을 막은 성건우는 곧장 반박했다.

“정신 좀 차려. 아직은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알 수 없는 상황이잖아. 설령 위험하다 한들 다른 방법도 있다고.”

지금의 그는 뭔가를 느낀 듯 녹음기로 말을 걸러 듣지 않았다.

이내 다른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여홍이도 용감하게 동료를 구했어. 희생도 무릅쓰고. 우리가 작은 빨강이보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 되겠어?”

작은 스피커를 쥔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아, 맞아.”

손을 들어 턱을 매만지던 성건우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로 나쁜 상황이든 간에 결국은 일어나게 돼 있어. 그럼 비가 오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게 낫지.”

육식주를 굴리던 성건우가 2초 정도 뜸을 들이다 중얼거렸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우십니다.”

생명 천사 목걸이를 쥔 성건우도 곧장 따라붙었다.

“누군가는 우리 의지를 이어나가 줄 거야!”

곧 아홉 성건우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막은 성건우의 의견을 무시하고, 용여홍의 용기에 질 수 없다는 이유 아래 하나로 뭉쳤다. 희생을 무릅쓴 용여홍의 정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햇빛이 몰려드는 듯한 틈이 있었다.

* * *

현실에서 성건우가 번쩍 눈을 떴다.

장목화는 자신과 백새벽 쪽으로 돌아서는 성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성건우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햇살처럼 찬란한 미소였다.

그의 모습에 장목화, 백새벽 모두 멍한 표정이 됐다.

그녀들이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 성건우는 시계점 문으로 향했다.

* * *

기원의 바다 안.

허공의 틈은 아홉 성건우에 의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찢어졌다.

벌어진 틈으론, 날아가는 화살처럼 강렬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량의 햇빛이 성건우의 기원의 바다를 비추자 황금 엘리베이터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성건우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 역시 심령의 복도 깊은 곳까지 탐색한 각성자가 자신의 심령 세계 위치를 파악하고 침입을 시도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사실 아홉 성건우가 의견 일치를 보았을 때 이 성건우의 안색은 이미 어두워졌다. 상대를 막고 싶었지만 무려 아홉이나 되는 데다가 서로 속속들이 잘 아는 그들을 막긴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무승부에 그칠 터였다.

무승부는 곧 상대도 황금 엘리베이터에 진입하지 못하고, 그 역시 다른 곳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결국 아홉 성건우가 햇빛이 몰려드는 틈을 찢고, 마주한 각성자를 손님으로 초대하려 하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죽고 싶어서 이래?”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가 허공을 향해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가장 먼저 동귀어진의 방안을 제안한 성건우가 소리 내 웃었다.

“살고 싶어서 이러지. 하지만 그건 네 선택에 달린 문제잖아?”

또 다른 성건우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넌 우리 마음속의 가장 약한 부분이야.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아무 감정도 없는, 냉혹한 성격이 된 거라고. 그래서, 너 자신한테도 그렇게 차갑게 굴 거야?”

스피커를 쥔 성건우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아, 맞아.”

육식주를 굴리던 성건우는 한숨을 내쉬며 염불을 외웠다.

“시주님, 집착을 버리면 여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은제 천사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쥔 성건우가 곧 호탕하게 웃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놈, 이제는 너 자신의 생존을 위해 결정을 해야 해. 우리를 거절하고 다 같이 죽을래, 아니면 화해하고 양보할래? 전자를 택하면 죽겠지만, 후자에는 한 줄기 희망이 있어!”

또 다른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우리한테 가담하는 수밖에! 얼른! 낭비할 시간도 없다니까? 진짜 죽고 싶어서 그래?”

아홉 성건우가 이어나가는 말들에 황금 엘리베이터 앞을 가로막은 성건우의 이마 혈관이 불룩 튀어나왔다. 그들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 저, 저 얼굴들 좀 보라고!’

모두 자신과 같은 얼굴이었지만, 하나같이 밉살스러웠다.

두어 번 심호흡하던 황금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는 결국 어두워지다 못해 컴컴해진 얼굴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곤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허공으로 뻗었다.

그는 분명 이기적이고 나약했으며, 냉혹하고도 무정했다.

하지만 정말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허공에 자리한 아홉 성건우는 이 광경을 보고 틈을 벌리려는 건 멈추고 호탕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들의 기원의 바다를 비추던 햇빛은 하나의 인영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대신 균열 안쪽은 빛의 반면처럼 깊고도 어두웠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너 같은 녀석을 다룰 때는 목숨을 걸어야 들어 먹힌다고!”

“이기적인 사람의 약점은 그 자신밖에 없으니까!”

“맞아, 맞아.”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칼을 내려놓았으니 부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정말이지, 어차피 이럴 거면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가로막은 거야? 괜히 시간만 허비했잖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성건우들의 조롱에 황금 엘리베이터 앞에 자리한 성건우의 안색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당장이라도 결정을 번복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저 망할 녀석들을 막아서고 싶었다.

‘그래, 다 같이 죽어보자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애써 스스로를 통제한 그는 이쪽으로 날아오는 아홉 성건우를 보았다.

성건우들은 저마다 오른손을 뻗어 이기적인 성건우의 몸에 댔다.

그러자 손 열 개는 순간 하나로 융합됐다가 또 층층이 겹쳐졌다.

열 명의 성건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분명 이미 하나로 융합돼 있었지만 움직이는 동안에는 또 열 겹의 잔영이 보였다.

그렇게 황금 엘리베이터 앞에 이른 그는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황금 엘리베이터는 단번에 문을 열어주었다.

성건우는 뒤에 남은 균열의 변화는 신경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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