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509화 (509/649)

509화. 게네바의 위로

세 사람이 계속 용여홍의 수술이 끝나기만 기다리던 그때였다. 안타나 스트리트 쪽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들려왔다.

소란은 빠르게 잠잠해졌지만, 극도로 고요해진 적막이 외려 더 불안했다.

곧이어 상공에서 헬기와 드론 소리가 났다.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수배된 잔당이 여기로 도망쳤나?”

백새벽도 걱정을 드러냈다.

“여기도 조사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너하고 나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입고 여기 안을 지키자. 야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친구 사귈 준비해.”

지시를 마친 그녀는 불법 공방 작업 구역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릴까요?”

“한 30분 정도.”

옅은 금색 수염을 기른 그림이 허공에 답했다.

성건우는 무장 벨트에 권총을 채우고 시계점의 닫힌 문으로 다가갔다.

* * *

불모지, 노스 앙헤포드 구역, 초봄 마을.

게네바, 정도연은 무턱대고 돌진하는 대신 각종 센서와 전자 무기에 의지해 마을 안 각 건물에 숨은 적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전자파의 힘에 밀려 나온 탄환에는 어마어마한 관통력이 있었다. 이 매서운 무기 앞에서는 이미 안전한 장소에서 두꺼운 벽으로 보호받고 있던 퍼스트 시티 수비군들도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초봄 마을 정문에 도착한 한명호는 황토색 탱크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그곳에 걸쳐진 시체를 옆으로 밀어낸 뒤 탱크 안으로 들어가 운전석을 차지했다.

한명호도 구세계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상전의 왕이라 불리던 이 무기 장비와의 접촉은 처음이었다.

레드스톤 마켓에서 치안관으로 일할 당시 무기 상인 여럿과 그들이 가진 밀수품은 여러 번 봤지만, 그중에도 탱크는 없었다.

애쉬랜드의 안 좋은 도로 상황과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철로를 감안할 때 탱크는 운송이 편한 물건도 아니라 밀수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이것과 관련한 거래는 보통 한쪽에서는 가져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져가기 용이한 인접 구역에서만 이루어졌다.

탱크를, 특히나 퍼스트 시티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탱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한명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잠시 연구하며 기억을 더듬는가 싶던 그가 곧 행동에 나섰다.

레드리버 부근에서 초봄 마을로 달려오는 동안 게네바는 투영을 이용해 한명호, 정도연에게 ‘탱크를 운전하는 법’ 등의 영상을 틀어주었다.

절대 준비되지 않는 전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장목화의 지시를 엄격하게 따르는 것이었다.

게네바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이런 무기 사용법과 관련한 자료와 기술이 아주 많았다. 본래 타르난 시장이자 지능 로봇 경비대장이었던 그는 아주 오랜 시간 치안 유지와 도적 소탕, 외적에의 저항을 업으로 삼아왔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토색 탱크가 소리를 냈다.

무한궤도가 돌아가는 사이, 느릿하게 방향까지 틀고 포관으로 초봄 마을 정문을 겨눴다.

콰릉!

두꺼운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대문은 즉시 산산조각이 났다.

한명호는 그대로 탱크를 몰고 초봄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게네바의 지휘 아래, 한명호가 일사불란하게 포탄을 장전하며 전자파 무기로 해결할 수 없는 적들을 날려버렸다.

콰릉! 콰릉!

건물들이 무너지고, 목숨을 건지고 도망친 적은 소수에 불과했다.

저항할 용기를 잃은 그들은 장애물 뒤에 숨어 마을 중앙으로 흩어졌다.

게네바, 정도연은 번갈아 가며 탄창을 교환하면서 때로는 화력으로 그들을 압도했고, 때로는 마을 중앙의 퍼스트 시티 병사들을 처치했다. 병사들이 서로 협력해 남아있는 장갑차 두 대를 이용하지 않도록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황토색 탱크가 접근하기 시작하자, 남아있던 수비군들은 꽤 견고해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로 물러났다.

그 건물은 초봄 마을 학교이자 그들이 정성껏 지은 피난소였다.

건물 지하에는 주민들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둔 방공호도 있었다.

이때 정도연은 퍼스트 시티 병사들이 지난 몇 달간 방공호 입구에 만들어둔, 영구적인 바리케이드들을 발견했다.

“검측 결과 내부에 대량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초봄 마을 주민들도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네바가 중저음의 합성음으로 말했다.

이래서는 한명호가 탱크로 입구를 직접 공격하기도 어려워졌다.

운이 무척 좋아 포탄을 그 안에 적중시킨다 한들 퍼스트 시티 수비군뿐만 아니라 초봄 마을 주민들까지 화를 당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바로 그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이 험난한 과정을 버텨왔는데, 빈대를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순 없었다.

결국 탱크를 세우고 그 안에서 나온 한명호는 소총을 들어 선별적인 사격이 가능할지를 확인했다.

한명호도, 정도연도 그렇게 초조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상황도 아직은 그들의 예상 범위에 들어있었다.

정도연이 초봄 마을 주민인데, 구조팀이 방공호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었다. 그들은 수비군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그 안에 들어갈 상황까지도 고려했었다.

작전의 진행을 위해 흩어지던 그때, 장목화는 자신이 가진 반고 바이오산 강력한 마취 가스를 게네바에게도 절반 정도 나눠주었었다.

장목화가 전기 뱀장어형 생체 의수로 방출하는 마취 가스는 당연히 충전이 필요했다. 외부에서 모험하는 동안 여러 상황에서 마취 가스는 톡톡한 역할을 했다. 외골격 장치보다 효과가 더 클 때도 있었다.

그래서 장목화는 꽤 많은 양의 마취 가스를 가지고 다녔었다.

게네바가 마취탄을 제작하는 동안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정도연은 방공호 출입구 구역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퍼스트 시티 수비군이 이 틈을 타 반격할 가능성까지 차단하는 것이다.

물론 계속 화력으로 그들을 압도하진 않았다. 때때로 그쪽을 향해 총을 몇 발 쏘고, 유탄도 한 발씩만 날렸다.

그들이 가진 탱크도 한 대뿐이고, 휴대한 무기와 탄약도 유한하니 뒤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낭비할 순 없었다.

그때였다. 게네바도, 정도연도 분명 아무도 없다고 확신한 어느 건물 안에서 갑자기 한 인영이 나타났다.

허공에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모습을 드러낸 그 인영은 비늘로 뒤덮인 얇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어스름한 석양빛 아래, 비늘들은 각기 다른 색으로 반짝거렸다.

이는 바로 반고 바이오산 카멜레온 타입 인공지능 갑옷이었다.

탕!

인영은 등장 즉시 방공호 입구를 겨누던 한명호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손에는 가우스 소총이 들려 있었다.

은백색 전류에 휩싸인 금속 탄환이 쏘아져 나오고, 그 인영이 떠오름과 동시에 정도연도 종합 경보 시스템으로 이를 인지했다.

깜짝 놀란 정도연은 한명호를 향해 냅다 몸을 날렸다.

쾅!

정도연에 떠밀린 한명호가 탱크 위로 쓰러진 그때, 가우스 소총의 총알은 군용 외골격 장치의 어깨 장갑에 튕겨 먼 곳으로 날아갔다.

자칫 잘못했다면 총알은 정도연을 그대로 관통했을 것이었다.

이때 게나바의 유탄발사기는 이미 총구를 돌린 상태였다.

콰릉!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인영은 도망칠 새도 없이 화르르 피어오른 불덩어리에 삼켜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심지어는 중상을 입지도 않았다. 카멜레온 타입 인공지능 갑옷의 탁월한 방어력 덕분이었다.

그가 잃은 건 유탄의 위력에 폭발한 가우스 소총 뿐이었다.

다음 순간, 게네바의 손바닥에서 붉은 레이저 한 줄기가 발산됐다. 비늘을 그대로 관통한 레이저는 결국 상대의 내장을 뚫고 들어갔다.

몇 차례 비틀거리던 인영은 마침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주위를 더 잘 살폈어야지.”

게네바는 한 마디 당부를 한 뒤 재차 마취탄 제작에 집중했다.

뒤이어 정도연은 훌쩍 뛰어 일어났다.

“알겠어.”

거친 숨을 두어 번 몰아쉬던 그녀는 방공호 출입구 구역을 마저 감시하며 근처 건물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한명호도 얼른 일어나 자신의 소총을 주워 들고 금속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정도연과 부딪힌 곳을 매만졌다. 이내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왜 날 구한 거지? 아주 위험한 짓이었다는 거 몰라? 너도 크게 다칠 수 있었어! 까딱하다간 죽었을 수도 있다고!”

한명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서, 정도연도 그만 주눅이 들었다.

“너, 넌 날 도우러 와준 거잖아. 그런 위험은 내가 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난 어차피 얼마 살지도 못하잖아. 죽으면 심장은 너한테 갈 거고⋯⋯.”

“살면서 단 한 번도 너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한 적은 없어?”

말까지 끊고 눈을 번득이던 한명호는 잠시 좀 뜸을 들였다.

“살아, 꼭 살아남아. 네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네 심장을 보관할 기구나 설비도 없잖아. 이렇게 오래 고생시켜놓고 아무 보람도 없게 만들 건 아니지? 나까지 죽게 할 생각이야?”

차갑게 돌아선 그가 다시 방공호 출입구 쪽을 겨눴다.

입을 다문 정도연은 약간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한명호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곁에 있던 게네바가 두 사람을 위로했다.

“내 모듈 하나를 살짝 개조하면 임시 저온 탱크로 쓸 수 있다. 보존액은 없지만.”

“얼른 마취탄이나 만들어.”

한명호는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게네바를 재촉만 했다.

* * *

퍼스트 시티, 안타나 스트리트, 그림 시계점.

도시 방위군 제복을 입은 성건우는 문 앞을 지키고 서서 벽에 붙은 괘종시계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지났을 무렵, 일련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누군가가 시계점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굉장히 크고 다급한 소리였다. 아무도 호응하지 않으면 상대는 문을 걷어차고라도 들어올 것 같았다.

성건우가 문을 여니, 도시 방위군 팀이 있었다.

자신들과 같은 제복을 입은 사람의 등장에 그들 역시 놀란 눈치였다.

성건우는 활짝 웃으며 포카스가 준 신분증과 문서를 꺼냈다.

“봐봐. 난 너희랑 같은 군복이야. 신분증과 문서도 있고. 그러니까⋯⋯.”

도시 방위군들은 순간 깨달음을 얻은 듯 저마다 입을 열었다.

“비밀 임무 수행 중인 거야?”

“여기 무슨 문제가 있지?”

“유용한 단서라도 발견했어?”

“우리는 못 본 척하면 될까?”

“어떤 비밀 임무이기에 제복을 입고 있어?”

병사들이 질문을 쏟아놓는 동안 어둑한 하늘을 누비던 새카만 헬기가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프로펠러의 요란한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고, 주변엔 거친 바람이 일었다.

성건우는 허공의 헬기를 힐긋 보다가 다시 웃으며 정면을 보았다.

“안에 들어와서 좀 기다릴래? 너희가 문 앞에서 몇 마디만 묻고 바로 떠나버리면 상관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나랑 우리 동료들 비밀이 들통날 가능성도 크고. 좀 골치 아파질 거 같은데.”

성건우의 논리에 완전히 설득된 도시 방위군들은 제식 돌격 소총을 쥔 채 그림 시계점 안으로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들은 곧 뒤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장목화와 백새벽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도시 방위군 제복을 입은 채 군용 외골격 장치까지 착용한 그녀들을 보고, 그들은 본능적으로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저 사람들도?”

시계점에 들어온 도시 방위군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성건우와 비슷한 키에 조금 거칠어 보이는 얼굴, 파란 눈동자에 금발인 것을 보면 얄가이인 혈통인 듯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지만, 말투엔 어렴풋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맞아.”

성건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마자 장목화, 백새벽도 신분증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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