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용기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은 전에 몸을 굴릴 때 어디로 빠져나갔지만, 그 역시 별 상관없었다. 그녀는 바로 옷 안쪽 주머니에서 레드리버 한 자루를 꺼냈다. 풍부한 경험의 노련한 사냥꾼이 권총을 하나만 갖고 다닐 리는 없었다.
일단 크리스티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 꽤 큰 총성이 여러 번 울렸어. 이 아파트엔 집회에 참여하지도, 출근하지도 않은 사람이 분명 있겠지. 그 사람들이 총성에 반응해 창문에 대고 소리친다면, 레드리버 다리 부근의 도시 방위군이나 주위 검문을 통과한 치안요원들은 득달같이 달려들 거야.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사실 크리스티나 실력으론 평범한 도시 방위군이나 치안요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상황만 받쳐줬다면 당장 나체 파티를 열 수도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걱정하는 건 여기서 연달아 시끄러운 소란이 벌어지면 헬기를 타고 고공을 비행 중인 강자들의 시선까지 끌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욕망 성인 교파가 신임 집정관 가이우스에게 어떻게 아수스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폭로된 순간 총구를 돌려 이 몰락 귀족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욕망 성인 교파는 아수스가 훗날 중요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그때였다. 장단점을 치밀하게 비교해보기도 전, 크리스티나는 순간 한 방안이 떠올랐다. 이곳에 있는 구조팀 네 명을 당장 처리한 뒤, 시력이 회복되거나 아수스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레드리버 권총을 들어 올렸다. 느껴지는 인간 의식을 향해 바로 총을 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먼저 겨눈 건 당연하게도 가장 위험하게 느껴지는 성건우였다.
조준을 마친 뒤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그녀가 다시 망설이기 시작했다.
‘진짜 잘생겼단 말이야……. 몸매도 너무 좋고 남성미도 넘쳐. 어디 가서 저런 예쁜이를 또 만나겠어. 그리고 아수스의 크기를 비웃기도 했잖아? 아, 궁금해. 한번 해보고 싶어. 이렇게 죽여버리는 건 너무 큰 낭비 아니야? 최대한 시간을 아끼면 한 번 정도는 해볼 수 있을 텐데. 아, 진짜 못 참겠어.’
크리스티나도 성 중독이 때를 가리지 않고 도졌음을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건 참을 수도, 헤어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 순간, 허물 벗는 뱀처럼 꿈틀거리던 성건우가 왼팔을 굽혀 옆쪽을 향해 휘둘렀다. 그가 친 건 티테이블의 다리였다. 조금 전 그가 사력을 다해 티테이블 쪽으로 굴러온 것도 이걸 치기 위해서였다.
이는 아홉 성건우가 일종의 가려움을 해소하려는 행위였다. 팔꿈치를 움직이는 것 정도는 온몸을 긁는 행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아서 이 정도는 충분히 거뜬했다.
쾅!
성건우의 왼팔 어딘가가 티테이블 다리와 정확히 충돌했다.
상처 부위였다. 실제적인 꿈의 주인에게 대항하고자 다용도 군용칼로 낸, 왼팔의 깊은 상처였다.
티테이블과의 충돌로 상처는 당연히 벌어졌다. 상처를 싸맨 붕대는 빠르게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로 인한 극심한 통증에 성건우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지고 붉어졌다. 하지만 덕분에 짧게나마 끔찍한 가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성건우는 통증에 의지해 벌떡 일어났다.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려던 크리스티나는 성건우가 티테이블을 친 순간 뭔가를 감지하고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탕!
크리스티나의 총알은 티테이블에서 약간 옆으로 치우친 전방을 때렸다.
조금 전까지 성건우가 극심한 가려움에 몸부림을 치던 그곳이었다.
이미 일어나 있던 성건우는 옆으로 몸을 날리며 상처의 통증에 몸을 웅크린 상태였다. 현재 크리스티나는 앞이 안 보이는 관계로 느껴지는 인간 의식에만 기대야 했기에, 목표를 정확히 명중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허공으로 몸을 날린 성건우가 양손을 펼쳤다. 애써 고통을 참은 그가 왼손을 움직여 일찍이 앞으로 돌려 안은 전술 배낭을 뒤지고, 오른손으론 허리춤에 꽂힌 연합202를 뽑아 들었다.
그는 순수한 감각에만 의지해 크리스티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유전자 개량자 성건우는 재능이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구조팀에 들어온 이래로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다.
물론 사격 솜씨가 장목화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 방면에서만큼은 평범한 수준인 크리스티나보다는 월등히 뛰어났다.
순간 크리스티나는 몰려든 불길한 예감에 방 구조를 떠올리며 침실과 화장실 쪽으로 냅다 몸을 굴렸다.
탕! 탕! 탕!
연달아 발사된 총알 세 발은 그녀가 조금 전 서 있던 곳을 관통해 옆쪽 벽에 구멍을 내거나, 그녀가 굴러 지나간 곳에 박히며 먼지를 일으켰다.
크리스티나는 특수한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이미 총상을 입었으리란 걸, 심지어는 이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로 인한 충격에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출렁출렁 차올랐던 욕망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성건우가 통증을 이용해 짧은 순간이나마 간지러움을 억누른 모양이라 추측한 크리스티나의 초점 없는 눈에서 빛이 번득였다.
그러자 흰 셔츠에 달린 세 번째 단추 안쪽에서 돌연 보이지 않는 회오리가 일어나며 무너져내리려는 조짐을 보였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사격을 마치고 두 개의 물건을 찾기 직전에 이르렀던 성건우는 착지하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균형을 잃었다.
쿵!
결국 성건우는 그대로 뚝 떨어져 버렸다. 손에 쥔 연합202 역시 바닥과 충돌하면서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유일하게 다행이라 할만한 것은 줄곧 품에 안고 있던 전술 배낭만은 날아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성건우가 쏜 총을 피하고 그에게 반격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한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간지럼 통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용여홍과 백새벽을 괴롭히던 가려움이 겨우 완화되었다.
용여홍은 옆에 떨어진 연합202를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탄창을 바꿀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난 용여홍은 아수스를 향해 몸을 날리며, 한 손으론 무장 벨트에 끼워놓은 아이스모스를 꺼내 들었다.
그는 이번 사격으로 크리스티나를 명중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녀를 이리 구르고 저리 뛰게 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다시 가려움을 유발하기도 어려울 것이었다.
그 사이 용여홍은 일단 아수스부터 처리할 작정이었다.
근 1년간 단련을 거친 용여홍의 전술 실력도 꽤 훌륭한 편이었다.
탕! 탕! 탕!
용여홍의 사격은 1, 2초 정도 간격을 둔 채 성건우의 사격을 바로 뒤따랐다. 크리스티나는 쉴 새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남은 기억을 따라 침실 쪽으로 끊임없이 구르며 그 안으로 피할 수 있기를, 이 반격을 버텨낸 뒤 다시금 적들에게 가려움을 안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각을 잃은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은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굴리는 몸이 수시로 뭔가에 긁히는 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통증을 참으며 계속해서 굴러야 했다.
만약 출중한 예감과 강력한 직감이 없었더라면, 어디가 가장 위험하고 어디가 상대적으로 안전한지 알지 못했더라면, 크리스티나는 이미 어느 가구나 벽 모서리에 가로막혀 총알받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몸을 날린 용여홍이 누워 쏴 자세로 사격하는 동안, 백새벽도 드디어 허리춤에서 연합202를 뽑아 들었다.
약간 먼 곳에 떨어진 아이스모스를 줍기 위해서는 최소 2, 3초의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었다.
백새벽이 가장 먼저 하려고 한 일은 아수스에게 총을 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들 모두에게 간지러움을 유발할 수 있는 크리스티나부터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만약 크리스티나에게 숨 돌릴 틈이라도 주어진다면 장목화, 성건우가 가까스로 만들어놓은 기회는 그대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백새벽은 관찰 결과와 전투 경험에 의지해 크리스티나가 침실 쪽으로 숨으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곧장 손을 들어 올린 그녀가 침실 문으로 이어진 복도를 겨눴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계속 구른다면 백새벽에게 적중당할 것이고, 잠시 멈춰 망설이기라도 한다면 허공에 떠 있는 용여홍의 총에 맞게 될 것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온통 캄캄한 시야 속에서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처지를 절감했다. 전호후랑(前虎後狼), 그야말로 위태롭고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저릿해지는 머리를 안고 계속 침실 쪽 복도로 굴러갔다.
그와 동시에 백새벽의 눈빛이 돌연 굳어졌다. 곁눈에 어느새 경련을 마치고 일어나 앉은 아수스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아수스의 손가락 사이에는 금색 오레이 동전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팅!
위로 튕겨 올려진 금화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윽고 백새벽은 돌연 돈을 향한 강렬한 탐욕이 차올랐다.
고작 금화 한 닢이었지만, 지금 백새벽에게는 모든 걸 다 버려서라도 꼭 가져야 하는 물건처럼 여겨졌다.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는데도 백새벽은 결국 크리스티나를 향한 사격을 멈추고 들고 있던 연합202를 포기해버렸다.
이제 그녀는 주인이 던진 공을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가 되어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제기랄!’
허공을 가로지르는 와중, 백새벽의 얼굴에 자책과 후회의 빛이 번졌다.
콰당!
이내 엎어진 그녀는 온몸으로 아수스가 던진 금화를 덮쳤다.
시야에는 실실 웃는 아수스의 익숙한 표정이 들어왔다. 그녀의 생사고락을 손에 쥔 채 애걸의 몸부림을 감상하는 악마의 웃음이었다.
‘안 돼!’
백새벽은 곧장 바닥에 이마를 세차게 박기 시작했다. 통증으로나마 탐욕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쾅!
뒤이어 용여홍도 백새벽의 옆에, 아수스 근처에 떨어졌다.
그때,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아수스는 장목화가 떨어뜨린 유탄발사기를 집어 들었다. 그는 웃으며 쓰러진 백새벽과 용여홍을 겨눴다.
한창 침실 문 쪽으로 굴러가던 크리스티나도 뭔가를 느낀 듯 그 자리에 멈춰서 다시 간지럼 유발을 위해 집중했다.
유탄발사기를 보자마자 용여홍의 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생각은 멈춰도 각양각색의 기억은 수도꼭지에서 쏟아진 물처럼 터져 나왔다.
과묵한 아버지의 애정,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잔소리, 자신이 뭐라고 늘 우러러보는 동생들의 눈망울.
푸근한 식사가 차려진 식탁, 어려운 시험에 고득점을 받았던 날의 기쁨.
단짝 성건우, 그리고 양진원을 비롯한 친구들과 시시껄렁하게 얘기하던 한가롭던 언젠가.
처음 구조팀에 들어왔을 그때의 불안함, 벌써 수많은 임무를 하며 조금씩 성장해온 것에 관한 뿌듯함, 이젠 너무도 깊게 쌓여버린 팀원들과의 우정.
‘아니야, 난 죽기 싫어!’
용여홍은 몸 안에서 폭발한 한 줄기 힘에 옆으로 날아가 총구를 피했다.
그 순간, 용여홍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언젠가가 떠올랐다.
지하 방주에서 디마르코의 공격을 받았을 때, 용여홍은 백새벽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조건반사적으로 혼자서만 뛰어올랐다. 생각할 새도 없었다. 워낙 겁이 많은 성격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생각을 앞선 것이었다.
결국 그때 거의 죽을 뻔한 백새벽은 오랫동안 한쪽 팔을 쓰지 못했다.
그날도, 그날 이후로도 백새벽은 단 한 번도 그 일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용여홍에게 그날은 씻지 못할 죄책감으로 깊이 새겨졌다.
그래도 남잔데, 아무리 못나도 남잔데 위험에 처한 여자 동료를 두고 그래서는 안 됐다. 장목화도, 백새벽도, 성건우도 모두 동료들을 위해 제 목숨도 아끼지 않는데, 자신만 그렇게 겁쟁이처럼 굴어선 안 됐었다.
그때 그날은 용여홍에게 늘 짙은 후회로 남아있었다.
이를 악문 용여홍은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득이며 홱 돌아서더니 그대로 달려가 백새벽을 밀었다.
무게를 잔뜩 실은 그의 힘에 방금 막 허리와 등을 세웠던 백새벽은 거의 날아가듯 떠밀려 멀찍이 자리한 소파에 떨어졌다.
콰릉!
유탄은 용여홍과 백새벽 뒤에서 폭발했다. 화르르 부풀어 오른 불빛은 용여홍의 옆쪽 몸통 절반을 매섭게 때렸다.
용여홍은 부옇게 흐려진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맴돌고 있었다.
‘그래, 난 나약한 겁쟁이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