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치명적인 아름다움
침까지 꿀떡 삼킨 아수스가 다시 크리스티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 도시를 빠져나가긴 힘들어. 너도 내가 너희 집에 숨기를 바라진 않을 거고. 차라리 여기서 좀 쉬는 게 어때?”
“미쳤어? 이런 상황에도 하고 싶다고?”
크리스티나가 경악했다. 오늘 일어난 급격한 변화에 아수스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내가 방금 말했잖아. 밖에 있는 그 사람만 잘 처리하고 이 안에 있는 놈들 통제만 하면, 한동안은 폭로될 위험이 없다고. 문도 닫혀 있는데 우리가 여기서 뭘 하는지 누가 어떻게 알겠어? 하긴, 문 닫고 할 만한 짓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냐만. 왜, 설마 넌 하기 싫어?”
아수스가 웃으며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성건우를 바라보던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장목화에게도 닿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다는 듯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잠시 가늠하는 듯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밖에 있는 사람 처리해. 난 계속 이 사람들 통제하고 있을게.”
고개를 끄덕인 아수스가 매우 신중하게 말했다.
“좋아. 나중엔 교대로 돌아가면서 하는 거야? 네가 통제할 때는 내가 즐기고, 네가 즐길 때는 내가 통제하는 식으로.”
크리스티나는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그래. 한 번 할 때마다 셋만 통제하고, 나머지 하나는 욕망 폭발을 발휘하면 되겠다. 그쪽이 더 재밌을 거야. 그러지 않고선 뭘 할 수가 없잖아.”
아수스는 천천히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사력을 다해 발버둥 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다시금 기대감이 끓어올랐다.
“여자들은 내 거야. 남자들은 네가 가져.”
크리스티나가 바로 대꾸했다.
“아니, 난 다 할 거야. 여자들까지.”
평소 크리스티나를 잘 아는 아수스는 그녀가 눈을 번득이는 것을 보고 딱히 놀란 반응도 없이 그저 웃었다.
“밖에 있는 저 사람 처리하면 네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할까?”
“네가 먼저 해.”
크리스티나는 꽤 신중했다.
그때였다. 크리스티나의 말이 막 떨어진 순간, 아수스는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누워 미친 듯 온몸을 긁던 성건우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 걸 발견했다. 아주 극도로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어째서인지 아수스의 마음속에서는 불꽃이 솟구쳤다.
“왜 웃는 거지?”
아수스가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건우는 계속 과장된 웃음으로 응할 뿐이었다. 애초에 이 극심한 가려움 때문에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를 향해 몇 걸음 다가간 아수스는 장목화와 용여홍 근처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못 참겠다는 듯 크리스티나에게 말했다.
“잠깐만, 얘 좀 덜 간지럽게 해봐. 대답 좀 들어보자.”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덧붙였다.
“딱 한 마디만이야. 딱 한 마디만 하게 해줘. 많은 이야기를 했다가는 내가 영향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능력들도 있잖아.”
크리스티나는 상관없다는 듯 성건우의 가려움 정도를 조절해주었다.
성건우는 기다렸다는 듯 황급히 한 문장을 내뱉었다.
“네가 먼저 해⋯⋯. 왜냐하면⋯⋯ 넌 금방 끝날 거니까⋯⋯.”
순간 아수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런 방면으로의 모욕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마터면 일그러진 표정을 드러낼 뻔했던 아수스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장목화를 보며 이야기했다.
“그럼 네 친구랑 하면서 한번 보여줄게.”
성건우의 가려움은 다시 극심해졌다. 그래도 성건우는 아수스의 바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죽을힘을 다해 억지로 말을 짜냈다.
“넌 너무 작아⋯⋯.”
“이 자식이!”
차오르는 분노에 아수스가 성건우를 거세게 노려보았다.
아수스는 자신이 평소보다 더 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
그때, 크리스티나가 약간 호기심이 생겼다는 듯 성건우를 한참이나 훑었다. 동시에 그녀는 성건우의 가려움 정도를 또 한 번 살짝 낮춰주기도 했다.
성건우는 다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불굴의 정신을 발휘했다.
“비교해보자!”
그의 도발에 아수스는 얼마나 화가 났으면 되레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비교해보자!”
마음이 동한 크리스티나는 성건우를 향해 다가가며 침을 꼴깍 삼켰다.
“벗는 건 내가 도와줄게.”
그녀가 허리와 등을 굽혔다.
이 흥미진진한 상황으로 인해 크리스티나는 집중력도 흩어지고 폭이 큰 동작을 취했다. 그래서 다른 구조팀원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튕기듯 가로로 이동한 장목화가 왼손으로 아수스의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막 스스로에게 욕망 폭발 능력을 발휘해 성건우와의 경쟁에서 편하게 승리를 거두려 한 그때, 아수스는 갑자기 튀어 올라 본인의 종아리를 움켜쥔 장목화를 목격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별다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중시할 공격도 아니었고, 몸에 큰 상해만 입힐 행위도 아니었다. 만회할 여지는 얼마든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아수스는 넘어지지 않게 다리만 차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파도치는 바다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퍽!
결국 장목화의 왼손은 아수스의 오른쪽 다리에 걷어차이고 말았다.
치직-
순식간에 밀려든 은백색 아크가 옷자락과 근육을 타고 위로 오르려 하고 있었다. 장목화가 줄곧 기다리던 기회였다.
극심한 가려움 때문에 행동도, 생각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장목화는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부터 극심한 가려움을 느끼기 전까지, 그 짧은 순간에 성건우가 적어도 한 번은 반격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런 상황에 추리 광대는 아무 소용이 없었고, 양손 동작 불능과 맹목 효과도 근본적인 문제해결엔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로지 억지쟁이만이 소리소문없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한동안 그 효과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장목화는 그 억지스러운 행위가 축적되기만 기다려왔다.
바로 그때였다. 장목화는 갑자기 통증을 느꼈다. 분명 아수스의 발에 살짝 차인 것인데 생체 공학 의수가 격렬한 통증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이 신호는 그녀의 뇌에서 직접 생성되고 있는 듯했다. 가벼운 충돌로 인해 급속도로 부풀어 오른 통증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졌다.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손을 거두고 몸을 움츠렸다.
이 때문에 위로 타고 오르던 대량의 아크는 끝내 아수스에게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 아름답고 몽환적인 흔적만 남겼다.
쿵!
이내 장목화는 바닥에 쓰러졌다. 일반적인 통증보다 수십 배 더 강한 통증이 그녀의 이성과 사고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장목화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리가 다 아찔해질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는 사이, 그녀의 몸에 걸려 있던 유탄발사기가 한쪽으로 밀려났다. 전에 취한 일련의 동작 때문에,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것이었다.
통각 지배!
아수스의 각성자 능력 중 하나로, 이것으론 목표의 통각을 제거할 수도 있고, 통증을 둔화하거나 심화할 수도 있었다.
이제 아수스는 대량의 고압 전류 습격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장목화가 맨 처음으로 방출한 아크 한 줄기는 그대로 아수스의 몸에 직격타를 날렸다.
파직- 파직-
아수스의 귓가엔 소음이 그치질 않았고, 눈앞은 계속 캄캄해졌다 밝아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꿈틀꿈틀 경련하던 끝에, 아수스 역시 마비된 채 쓰러져버렸다.
콰당!
아수스와 장목화 쪽의 기척에 크리스티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돌아보느라 가려움 정도에 대한 통제를, 눈앞의 성건우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성건우는 즉각 허리와 복부에 힘을 주고, 허벅지 근육을 크게 휘둘러 오른쪽 다리를 채찍처럼 위로 차올렸다.
그런데 성건우가 이 동작을 취하기 직전의 그 찰나, 크리스티나가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는 무슨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반대편을 보며 중심을 이동시킨 후 몸을 굴렸다.
붕-
안타깝게도 성건우가 차올린 다리는 허공만 갈랐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몸을 굴려 피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용여홍과 백새벽이 느끼던 가려움이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래도 불편함이 남아있었지만, 용여홍은 사력을 다해 통증을 참고 한 손으로 땅을 딛고 벌떡 일어났다. 다른 한 손은 빠르게 허리춤에 꽂힌 연합202를 꺼냈고, 용여홍은 반사적으로 크리스티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크리스티나는 권총 대신 몸을 연달아 굴렸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인 끝에 그녀는 용여홍의 총격을 성공적으로 피했다.
울려 퍼지는 총성에 이 아파트 8층 주민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다른 층 주민들 역시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용여홍의 연합202에는 소음기가 장착되지 않은 탓이었다.
한편 입에 넣은 손을 빼고 몸을 홱 뒤집어 일어난 백새벽은 충혈된 눈과 일그러진 표정으로 멀찍이 자리한 아수스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아이스모스 권총을 빼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건우는 다급히 몸부터 일으키려 하는 대신, 티테이블 쪽으로 굴러가며 동시에 전술 배낭을 풀어 그 안의 생명 천사 목걸이를 꺼내려 했다.
이 물건은 주머니에 넣어도 졸음을 유발했기 때문에 충분한 거리 유지를 위해 가방에 보관해야 했다.
곧이어 용여홍이 바닥에 쓰러지며 총성은 일단락되었다.
그 순간, 빠르게 굴러다니던 크리스티나의 몸은 멈췄지만, 그녀의 옅은 파란색 눈동자는 이상하리만치 깊어졌다.
쿵!
허공으로 몸을 던진 백새벽은 다시금 온몸을 휩쓰는 가려움에 더는 아이스모르를 쥐고 있을 수 없었다. 권총은 그녀의 손을 떠나 땅으로 추락했다.
콰당!
백새벽 역시도 아수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엎어졌다.
거의 동시에 크리스티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엇도 보이는 게 없었다.
성건우의 반격이었다. 다시금 시작된 가려움에 그는 생명 천사 목걸이를 찾으려는 대신 곧장 반격부터 가했다.
그의 왼 손목에 걸린 맹목의 고리가 타는 듯한 빛을 발산 중이었다.
하지만 성건우도 곧 용여홍과 함께 재차 몸을 뒤틀며 가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곳곳을 긁기 시작했다.
장목화 역시 가려움에서 무사하진 못했다. 다만 극심한 통증에 거의 기절 직전에 이르러 있던 덕에 잠깐은 고통을 무시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아수스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도 전기 충격으로 인한 마비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다시 상황을 통제한 크리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했다.
‘저 폐물!’
그녀도 성 중독을 앓는 자신과 아수스에게 이런 자극적인 환경이 얼마나 매혹적으로 느껴지는지 아주 잘 알았다. 더더군다나 눈앞의 이 구조팀은 남녀 할 것 없이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티나나 아수스는 이성을 잃고 오로지 하반신의 본능에만 따르곤 했다.
치명적인 미모에 빠져 실수를 저지르는 건 크리스티나의 인생에서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과 아수스가 모종의 능력으로 거의 표가 나지 않는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연달아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면서 뜻밖의 상황을 불러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크리스티나는 아수스를 폐물이라 욕하기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상황을 망친 건 어디까지나 아수스였지, 본인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는 현재 앞을 볼 수 없지만 인간 의식은 아직도 분명히 4명으로 느껴졌다. 다들 극심한 가려움에 시달릴 테니 당황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