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외나무다리
‘……아, 이런.’
그제야 어렴풋하게나마 뭔가를 알아챈 용여홍은 깊이 후회했다. 잠시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백새벽은 노예 상인 유진에게 붙잡힌 후 퍼스트 시티에 팔려 와 한동안 노예로 살다가 겨우 도망친 사람이었다.
백새벽은 애써 미소 지으려는 듯 입꼬리를 달싹였지만 끝내 웃지는 못했다. 그래도 말투는 꽤 침착했다. 아니, 상당히 침착했다.
“그 사람 대가도 성 중독일 가능성이 커. 게다가 육식주와 비슷한 부작용이 따르는 도구도 하나 갖고 있어. 바짝 말라 책갈피로 쓰는 꽃.”
육식주의 부작용은 색욕 증강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가가 따르는 능력은 만다라 영역에 속할 가능성이 컸다.
용여홍은 이번에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방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적막만 감돌았다.
몇 초 후에야 장목화가 먼저 목을 풀며 침묵을 깼다.
“우리는 일찍이 욕망 성인 교파가 반 지성교에 협조해 갈등을 만들어내고 소란을 일으키려는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보수파와 베울리스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일이지.
아수스와 아버지는 이전까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나? 아니면 욕망 성인 교파가 이전까지 했던 행동이 적들 사이에 첩자를 심어놓기 위해 시킨 짓이었을까? 욕망 성인 교파는 끝내 그들을 배반한 거고?”
조금 전 들었던 남녀의 대화를 떠올려 본 용여홍은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내 성건우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번에 퍼스트 시티에서 일어난 동란은 정말 심오하네요.”
그와 장목화는 백새벽과 용여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토론에 임하고 있었다.
장목화는 곧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집권하지 못한 자가 누군지 중요하다는 건 진짜 흥미로워.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달지기 게임에 이 말을 적용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
퍼스트 시티가 누구 영향을 받는지는 상관없어. 장생이나 깨진 거울, 보리만 아니면 돼⋯⋯. 이게 9월의 달지기 만다라의 태도일까?”
백새벽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지도요.”
성건우가 호응했다.
“그럼 달지기들도 편 나누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는 또 어떤 구세계 콘텐츠를 떠올린 걸까?
장목화가 웃었다.
“그래,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 달지기 레벨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거지. 음, 일단은 기억해두기만 하자. 지금은 아무 쓸모도 없지만 나중에는 쓰임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이내 웃음을 거둔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만다라 영역 능력 중에는 육감이 있어. 그 여자가 중간에 말을 끊은 건 자기 말을 엿듣는 사람 존재를 감지한 건지도 몰라.”
용여홍이 깜짝 놀랐다.
“헉, 우리를 발견한 걸까요?”
장목화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였다면 우리가 탄 엘리베이터가 6층에 도착한 걸 발견했을 거야. 그리고 내가 관찰하기로 여기 감시 카메라 같은 건 없어.
즉, 그 사람들이라도 이 방까지 쫓아오지는 못한다는 거지. 범위형 능력을 이용해 이 구역 전체를 뒤덮는 영향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야.
또 그 남자가 정말 아수스라면 당장 숨으려 할 거야. 신임 집정관의 숙청 대상 1순위잖아? 아무 기척도 없이 우리를 제거할 자신이 없는 한,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싸움을 일으키려고 하진 않겠지.
그러니까 우리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면 최대한 빨리 이 구역에서 벗어날 거야. 새벽, 우리 작은 흰둥이는 창가로 가서 밖을 관찰해봐. 혹시 아수스의 인영이 발견되면, 그리고 기회가 생기면⋯⋯.”
장목화가 백새벽을 보며 손들어 총 쏘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입술을 움츠린 백새벽은 오렌지 소총을 집어 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창이 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장목화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단이 자리한 쪽이었다.
“누가 올라온다. 세 명이야.”
그녀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감지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예상한 인원수와는 달라서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때, 성건우가 곧장 오른손을 뒤로 돌려 전술 배낭을 풀려고 했다. 동시에 그가 빠른 말투로 내뱉었다.
“한 명이에요.”
생물 전기 신호는 분명 셋인데 인간 의식은 하나뿐이라니, 이는 그중 둘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의식 파동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장목화는 성건우의 말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피부가 몹시 가려워졌다. 당장이라도 손톱을 세워 박박 긁고 싶을 정도였다.
너무 갑작스럽고 극심한 가려움이었다.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팔뚝과 팔을 긁기 시작했다.
절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안전부에 막 들어와 야외 작전에 처음 참여했을 때부터 잠복하는 동안은 모기에 물려도 목표가 사격 범위에 들어올 때까지 끝끝내 참았다.
물론 반고 바이오에서 개발한 모기 기피제면 모기는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특정 생물이 그 기피제 때문에 먼 거리에서도 그들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어서, 안전부 직원들은 특정 임무 수행 시엔 그걸 사용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장목화는 수백, 수천 마리의 모기에 뜯기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가시지 않는 가려움에 그녀는 현 상황이 어떻든 온몸을 긁기만 했다.
그 순간 장목화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위드 시티 사냥꾼 협회의 부회장 크리스티나!
위드 시티 성주 허양원과 그의 보호를 담당한 기계 승려 정념이 크리스티나에겐 가려움증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장목화는 바닥에 쓰러졌다. 양손만으론 가려움을 해소할 수 없어서 온몸을 비틀며 마찰을 일으키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녀도 빨랐지만, 성건우는 더 빨랐다. 용맹한 호랑이처럼 바닥에 몸을 던진 그는 허물을 벗는 뱀처럼 마구 꿈틀거렸다. 쓰러진 지금도 온몸을 긁느라 바빴다. 부상을 입은 왼팔까지 이용해 몸을 긁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장목화, 성건우 이 두 사람에 비해 신체적인 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용여홍과 백새벽은 진즉부터 그러고 있었다.
용여홍은 혼란스러웠다. 끔찍한 가려움에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각종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 돼! 기습이야. 아수스와 그 여자인가? 우린 어떻게 찾았지? 아무 단서도 안 남겼는데. 선수를 빼앗겼어. 각성자랑 전투에서 선수를 빼앗겼다고. 대비도 하나 못한 상태고. 준비됐었다면 한동안은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에 맞설 수 있는데. 도망도 가능하고.
근데 지금 팀장님의 생체 공학 의수 속에 있는 마취 가스는 다 소진됐고, 저장된 전량도 많이 써버렸단 말이야. 아, 진짜 간지러워 죽겠네. 건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각성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나? 아마도 아니겠지? 어쩌지?’
몸을 구석 쪽으로 굴린 용여홍이 모서리에 의지해 가려움을 해소하려 한 그때, 누군가가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쾅!
밖에 있는 누군가는 놀란 듯 탄성을 내지르다가 곧 조용해졌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계단을 올라 장목화를 헷갈리게 했던 무고한 사람이 뭔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한 것 같았다.
뒤이어 두 사람이 구조팀의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앞선 자는 검은 머리에 파란 눈,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전광을 방출할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매력적인 눈을 가진 남자. 전 집정관 겸 총사령관 베울리스의 아들 아수스였다.
지난번 만났을 때와 비하면 이 귀족이 입고 있는 검은 셔츠와 흰 바지는 모두 주름져 있고 너저분했다. 척 봐도 곤경에 처한 듯했다.
그의 뒤로는 위드 시티 사냥꾼 협회의 부회장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부드러운 금발의 그녀는 옅은 파란색 눈동자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어? 당신들은?”
크리스티나는 위장한 성건우와 장목화를 알아본 듯 의아해하면서도 기쁜 빛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녀는 왼손으로 방문을 닫았다. 현재 그녀의 오른손엔 소음기가 장착된 레드리버 권총 한 자루가 있었다.
그리고 아수스는 창가에 자리한 백새벽을 향해 웃으며 다가갔다.
“누군가 했어. 냄새가 익숙했거든. 이거 105 아냐? 정말 강단 있게 도망치더라? 난 네가 그 로봇을 못 잊고 다시 돌아와 구하려 할 줄 알았는데. 뒤도 안 돌아보던데. 그 로봇이 피폭돼 조각조각 분해되는 걸 보지도 않고.
솔직히 난 그 로봇 참 마음에 들었어.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주인이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은데 알아서 도시에 잠복해 있었잖아. 그러다가 내가 널 데리고 장원으로 가는 도중에 자기 안위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튀어나와 널 구해줬지.
그 로봇이 인간이었다면 원로원한테 충성 훈장을 받았을 거야. 근데 넌 그런 동료를 버리고 너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쳤지.”
몸을 튼 백새벽은 충혈된 눈으로 아수스를 노려보았다.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손으로 입 안까지 헤집어가며 가려운 혀를 긁기 바빴다.
“으, 으, 으⋯⋯.”
그녀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이것뿐, 입가론 계속 침이 흘렀다.
아수스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이 어두운 날, 몇 안 되는 즐거움이라도 되는 양 아주 자지러지게 웃었다.
한창 발버둥 치듯 꿈틀대는 백새벽을 보던 아수스가 낄낄대며 말했다.
“지금 그 모습을 보니까 옛날이 생각나네. 참 좋은 날이었잖아. 너도 꽤 즐겼지 않나? 근데 왜 갑자기 도망친 거야? 아! 참, 참. 깜빡했네. 내가 여길 어떻게 찾아냈는지 알아?”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모든 여자한텐 다 각자의 향기가 있어. 나한테 특별한 후각이 있는 건 아닌데, 이성을 워낙 좋아하니까. 몇 번 잔 여자들 냄새는 똑똑히 기억해.
좀 전에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공기 중에 익숙한 냄새가 나더라고.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서 다행이지, 안 그럼 나도 못 맡았을 거야. 결국 그 향기 덕에 너희가 8층, 바로 이 방에 들어왔다는 걸 알았어.
하하하, 넌 정말 재수가 옴 붙었구나. 이번에는 친구를 셋이나 데려왔네. 다들 상태도 너무 괜찮네. 너무너무 괜찮아⋯⋯.”
아수스의 시선이 반대편에 자리한 장목화에게 향했다.
“으! 으! 으으⋯⋯.”
커다랗게 뜬 백새벽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흘러내렸다. 코끝에서도 투명한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도 아수스가 어떻게 자신들을 찾아내었는지 대강은 파악했다. 성 중독이라는 대가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때, 아수스의 말을 듣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말이 너무 많네. 이런 상황에서는 최대한 빨리 저 사람들 처리하고 다른 곳에 숨는 게 나을 텐데.”
아수스가 고개를 틀어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들 통제하고 밖에 있는 사람만 잘 처리하면 여기 숨으나 딴 데 숨으나 똑같잖아? 하하하, 내 예상대로네. 너희는 나한테 아무 적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날 보호하고 싶어 해.
그래, 날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건 가이우스지, 욕망 성인 교파가 아니니까. 훗날 너희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내 역할이 무척 중요해질 거야.
반박하려고 하지 마. 너도 내 말이 옳다는 걸 알잖아? 지금이야 너희랑 가이우스 관계는 매우 좋겠지만 가이우스가 권세를 공고히 해서 다른 지지자를 얻게 되면 그때도 과연 너희랑 계속 관계를 이어갈까?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와서 널 찾았을까 봐? 네 상사는 분명 당부했을 거야. 기회가 생기면 최대한 나를 도우라고.”
크리스티나는 아무 답이 없었다. 침묵으로 그의 말을 인정하는 듯했다.
곧이어 아수스는 목을 이쪽저쪽으로 꺾다가 장목화와 백새벽을 몇 번씩 훑어내렸다. 그의 눈빛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