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말다툼
‘심장 마비라니, 강력하네.’
장목화도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들을 활용한다면 구조팀은 한층 더 높아진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육식주의 대가에 집중했다. 그녀는 성건우가 그걸 장시간 착용하면 변태적인 행위도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일반인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동료들의 인내심을 시험할 그런 행위일 터였다.
“포로를 데리고 다니는 건 확실히 불편한 일이죠. 처리하려면 적당한 기회도 찾아야 할 거고요.”
장목화는 간접적으로 포카스의 제안에 응했다. 하지만 곧장 이곳을 떠나진 않고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아비아와의 접촉에 충분한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셨죠? 근데 여태까지 저희한테 주신 건 통행증 하나뿐이시네요.”
“원하는 게 뭔가?”
포카스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물었다.
“저희는 최대한 빨리 퍼스트 시티를 떠나고자 합니다.”
장목화가 구조팀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포카스가 뭐라 답하기도 전, 알아서 자발적으로 물었다.
“동란은 거의 다 끝난 겁니까? 어느 쪽이 이겼습니까?”
포카스가 간단히 설명했다.
“가이우스가 이미 원로원을 장악했네. 알렉산더를 비롯한 사람들과 손을 잡았지. 신임 집정관으로 선출됐어. 도시의 각 출입구는 이미 통제됐거나 곧 통제될 거야. 들어오는 건 괜찮지만 나갈 순 없지.
지금 떠나려는 건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팻말을 들고 떠드는 거랑 다름이 없어. 나도 별로 도와줄 수 있는 게 없고. 어느 출입구에 충돌이 일어나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야.”
침묵에 빠진 장목화와 백새벽을 보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들한테 도시 방위군 제복 몇 벌과 신분증, 임무 집행 문서를 제공해줄 수는 있어. 하지만 이런 조치도 각 출입구의 경계가 어느 정도 해제된 후에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야. 그전까지는⋯⋯.”
다시 포카스가 북쪽을 가리켰다.
“다리 부근의 아파트로 가 있게. 포로의 것인데, 그들 거점이야. 지금 거기 머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열쇠는 아마 자네들이 가지고 있겠지? 하하, 그들은 북안 측량 회사의 일부 직원과 결탁했었는데, 이번 작전에 그 회사 헬기까지 사용했더군. 그 아파트는 그자들이 만나 소통하던 장소였어.”
북안 측량 회사의 절반은 군대와 연을 맺고 있었다. 주위 환경을 탐사하며 지도를 제작한다는 구실로 퍼스트 시티를 도와, 정규군이 대놓고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보통 그들은 노예 포획대나 황야 개척단으로 활동했다.
포카스의 말을 듣고 장목화도 당장 퍼스트 시티를 떠날 생각을 포기했다.
이후 포카스에게 자세한 주소를 받아내고, 장목화와 백새벽은 포카스가 미리 사람을 시켜 준비해둔 제복, 신분증, 문서를 갖고 후문으로 나갔다.
* * *
장목화와 백새벽이 무사히 지프로 돌아오자, 용여홍도 비로소 안도했다.
세 사람을 실은 지프가 막 이 구역을 벗어났을 무렵, 길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성건우가 그대로 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장목화는 즉각 몸을 틀어 성건우 아버지 사진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자. 한 가지 단서를 찾긴 했어.”
그녀는 북방 도시에서 있었던 일을 성건우에게 전해주었다.
얌전히 듣던 성건우는 돌연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전 좀 쉬어야겠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이 무슨 대꾸를 하기도 전 그는 눈을 감았다.
말없이 다시 돌아앉은 장목화는 무선 통신기로 게네바, 한명호, 정도연 조에 퍼스트 시티의 정세 변화를 알렸다.
* * *
북안 불모지.
시커먼 SUV 한 대가 짙게 깔린 먹구름 아래를 달리고 있었다.
주위로는 덩굴 식물에 뒤덮인 콘크리트 철근 건물들이 보였다.
“퍼스트 시티 동란이 거의 마무리됐다네.”
게네바가 상황을 알리자, 정도연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
한명호는 정도연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미리 출발해서 다행이야. 동란이 1시간 안에 완전히 안정되고 그곳에 소환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와 일부 부대가 당장 돌아온다 해도 우리를 따라잡지는 못해. 우리는 그 시간차를 이용하면 돼.”
“그건 그들이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게네바가 지적했다.
“……음, 날씨가 더 안 좋아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한명호는 전방의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 * *
포카스가 준 신분증, 제복, 문서 덕에 구조팀은 순조롭게 골든애플 구역을 빠져나왔다.
그 후 장장 30분 동안 검문과 검색을 거친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파트는 레드리버 강가에 있었다. 총 9층으로, 그린올리브 구역 안에서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높은 층에서는 다리 구역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그 주위의 환경과 주민 구성은 상당히 복잡했다.
적당한 곳에 지프를 세운 구조팀은 차에서 내려와 포로에게 찾은 열쇠를 꺼내 아파트 중앙현관으로 향했다.
이곳 주민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백새벽과 용여홍은 이미 군용 외골격 장치를 벗고 상자에 넣어 짊어지기까지 한 상태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데, 근처 계단에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쌍의 남녀가 말다툼 중이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2층에 있는 듯했다. 안 그럼 유전자 개량을 받은 용여홍도 그들의 이야기를 정확히 듣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남자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배신한 이유가 뭐냐?”
‘너희라⋯⋯.’
단순한 감정 다툼일 줄 알았던 용여홍은 귀를 쫑긋 세웠다.
“상부의 결정이었어.”
여자는 상당히 냉정하게 답했다. 목소리 역시 전보다 대폭 줄어들어서 용여홍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헷갈렸다.
이때, 성건우가 용여홍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사람들한테는 무슨 음악을 틀어줘야 할까? ‘선을 넘었어.’?”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재차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해서 너희가 얻는 이익이 뭔데! 원래 계획을 따랐다면 너희는 몇 년 안에 귀족들한테 받아들여져서 점차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어! 근데 왜 우리를 배반한 거지? 고작 시간을 줄이겠다고?”
‘헉.’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성건우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반응에 장목화와 백새벽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말다툼 중인 여자가 얼른 대답했다.
“나도 사실 이해가 안 돼. 상부 입장에서 그것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집권하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
어째서인지 그녀의 뒷말이 돌연 끊어졌다.
장목화가 막 질문하려던 그때,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전방을 가리키며 일단 엘리베이터에 탄 뒤에 이야기하자는 뜻을 밝혔다.
계단에서도 더 이상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서 용여홍도 바로 장목화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백새벽, 성건우도 차례로 들어오자 장목화는 숫자 ‘6’ 버튼을 눌렀다.
사실 구조팀의 진짜 목적지는 8층이었다.
* * *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장목화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방금 뭘 들은 거야?”
용여홍은 팀장의 신중함에 감탄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여자랑 남잔데, 배신, 귀족들이 수용한다, 권력 장악 뭐 이런 얘기들?”
용여홍 역시 현재 상황을 감안해 몇 가지 중요한 단어만 언급했다.
이를 듣고, 장목화도, 백새벽도 미간을 살짝 구겼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6층에 도착해 있었다. 장목화는 더 질문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팀원들과 내려 계단으로 8층까지 올랐다.
그린올리브 구역에 자리한 건물치고 이 아파트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몇 개 라인으로 나뉘었는데, 각 라인에는 한 층당 방 네 개가 있었다.
장목화는 어렵지 않게 포카스가 설명한 방을 찾았다.
그리고 성건우는 일찍이 전술 배낭에서 꺼낸 카오의 열쇠로 문을 열었다.
거실은 꽤 큼직했고, 구성은 간소했다. 소파 한 세트, 찬장 하나, 의자 세 개, 티테이블 하나, 이게 다였다.
장목화는 손을 뒤로 해 문을 꼭 닫은 뒤, 내내 참아온 질문을 던졌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용여홍은 재빨리 또렷한 기억을 더듬어 조금 전 들었던 남녀의 대화를 거의 그대로 재연했다. 심지어 그들의 말투까지도 비슷하게 흉내 냈다.
대화 내용을 모두 전한 뒤, 용여홍은 자신의 추측도 덧붙였다.
“오늘 있던 동란에서 어느 세력이 연맹에 배반을 당했나 봐요. 살아남은 그 세력의 구성원이 상대에게 질책하는 중이었던 거죠.”
성건우가 감상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살기 싫나?”
용여홍도 어렵지 않게 그 뜻을 이해했다. 상대 세력이 그들을 배반했는데도 굳이 직접 찾아와 질책하다니, 알아서 함정에 걸어들어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었다.
비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상당한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몇 년 안에 귀족들 대부분에 받아들여져서 점차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
조용히 생각을 곱씹던 장목화가 팀원들을 쳐다보았다.
“첫 번째 문장을 들을 때 생각나는 세력이 어디야?”
퍼스트 시티 상황을 비교적 깊이 파악하고 있는 백새벽이 답했다.
“욕망 성인 교파요.”
이곳의 여러 귀족은 암암리에 만다라를 믿으며 욕망을 마구 방출했다. 일찍이 구조팀은 직접 확인한 적도 있었다. K, 콜론자의 집에서 열린 심야 파티.
순간 용여홍도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왔네. 그 사람들은 음, 어느 정도 친분이 있던 거예요.”
용여홍은 솔직히 여러 번 침대에서 함께 뒹굴던 사이란 표현이 떠올랐지만, 좀 지나치게 저속한 것 같아 친분으로 점잖게 돌려 표현했다.
그러자 성건우가 가차 없는 평가를 내렸다.
“그건 친분이란 말에 대한 모욕이야.”
생각에 잠겨 아까부터 용여홍, 성건우의 대화는 계속 신경 쓰지도 않던 장목화가 바로 다음 화두를 던졌다.
“그럼 그 남자는 누굴까? 그 남자가 속한 세력은 퍼스트 시티의 여러 귀족한테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귀족들한테 천천히 욕망 성인 교파를 받아들일 기회를 만들 수 있지만 이번 동란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었지.
남자의 지위도 낮지 않을 거야. 각성자이거나 다른 방면의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직접 상대를 찾아와 따질 수 있었겠어?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는 사람이.
그리고 여자는 집권하지 못한 사람이 누군지가 중요하다고 했고⋯⋯.”
하나하나 나열되는 정보에 용여홍은 금방이라도 답이 도출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답이 형성되기까지는 마지막 하나가, 가장 중요한 하나가 모자랐다.
그때 백새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수스요. 집정관 베울리스의 아들 아수스.”
화들짝 놀란 용여홍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왜?”
백새벽은 단숨에 여러 이유를 댔다.
“그 사람 지위를 봐, 아버지는 보수파 대표에, 동란 전엔 퍼스트 시티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거물로 집권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었지.”
그리고 몇 초간 침묵하던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은 적어도 기원의 바다 급 각성자였어. 만다라 영역에 속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뱉듯 질문하다가 용여홍은 문득 장목화의 눈짓을 받았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