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구조를 위해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장군 저택이 점점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용여홍은 약간 긴장이 되었다.
“포카스 장군이 갑자기 배신하면 어쩌죠?”
아비아에게 얻은 정보를 포카스에게 알려주고, 포로를 포카스의 집에 데리고 들어간 후부터는 사실상 구조팀의 이용 가치는 거의 없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포카스는 사람을 죽여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든, 약속을 어겨 잠재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든 충분히 구조팀과 반목할 수 있었다.
구조팀의 현재 실력으로 포카스의 집에서 그에게 맞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인 안위를 오로지 상대의 양심에만 맡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찍이 이에 대해서도 고민했던 듯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넌 이따 차에서 내리자마자 적당한 곳을 찾아 숨어. 의식도 숨기고. 만약 우리가 30분이 지나도록 안 나오면, 기다렸다가 기회를 틈타 곧장 빠져나가. 그리고 회사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복수를 해줘.”
성건우는 구조팀 내 유일한 각성자였다. 의식을 숨겨 포카스에게 감지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아무리 잘 숨어도 의식의 존재 때문에 바로 들통날 것이었다.
성건우는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네.”
대신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그때 어떤 노래를 듣고 싶을 것 같아요?”
장목화가 오랜만에 그를 팩 노려보았다.
“이렇게 진지한 순간까지도 장난을 쳐야겠어?”
그러다 문득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걱정돼서 그러지?”
“…….”
성건우는 침묵했다.
‘오호, 너한테 그런 구석도 있었어?’
용여홍이 속으로 장목화를 흉내 냈다. 퍽 즐거웠다. 성건우는 자신에게 밥 먹듯 장난치는 친구였지만,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걸, 정말로 착한 사람이라는 건 친구인 용여홍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장난기 탓에 성건우도 걱정을 하고 불안해한다는 평범한 사람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성건우의 모습이 새삼 참 신선해 보였다.
이윽고 백새벽이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차를 세웠다.
성건우는 다치지 않은 오른팔로 차 문을 연 뒤 전술 배낭을 메고 내렸다.
몸을 꼿꼿하게 세운 그는 2초간 침묵하다가 옷 안쪽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장목화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을 본 적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장목화는 전에도 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사진 속 우아한 분위기의 30대 남자는 여러 해 전 실종된 성건우의 아버지였다.
그녀는 많은 것을 묻는 대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성건우가 몇 걸음 만에 길가의 어느 가로수를 타고 올라갔는지 사라져 버리고, 백새벽은 다시 지프를 몰며 한담하듯 말했다.
“전 야가 30분이 지나도 우리가 나오지 않으면 곧장 쳐들어와서 우리를 구하겠다고 할 줄 알았어요.”
장목화가 웃었다.
“건우는 자기 혼자선 절대 우리를 구할 수 없고, 그러다 자기도 붙잡힐 거란 걸 알아. 그보다는 칸나 씨를 찾아가 회사에 연락하는 게 훨씬 낫지.
이런 상황에 함께 불바다에 뛰어들어 동료들과 같이 죽겠다는 건 분명 감동적이긴 한데 바보 같은 짓이야. 나도 함께 말없이 억울하게 죽기보단 동료들 죽음에 복수해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백새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에 집중하는 척 전방을 주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프는 장군 저택 후문 근처에 이르렀다.
장목화는 한 손으로 포로를 들어 올린 후,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용여홍에게 말했다.
“넌 차에 남아있어. 나랑 작은 흰둥이만 들어갈게.”
“저랑 같이 가는 게 좋지 않나요?”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제안했다.
장목화는 웃으며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려면 내가 아니라 작은 흰둥이를 설득해야 할걸.”
용여홍은 그와 마찬가지로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채 벌써 차에서 내려 장군 저택의 후문으로 향하는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상의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용여홍도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 * *
포카스는 일찍이 구조팀을 맞을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포로를 데리고 숨겨진 후문 안으로 들어간 장목화와 백새벽은 하인의 조용한 안내에 따라 아무도 없는 1층의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감시 카메라와 음성 수신기가 설치된 이곳에 포카스는 없었다.
아무런 말도 없는 하인은 군용 무전기 하나를 꺼내 장목화에게 건넸다.
장목화가 버튼을 누르자 무전기에서 바로 포카스의 음성이 흘렀다.
- 포로를 깨우고 심문을 시작해도 좋아. 포로가 능력을 사용하려고 하면 내가 바로 막아주지.
지금의 포카스는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숨겨놓고 있었다. 카오가 깨어나 이 근처에 영향을 발휘한다 한들, 그의 의식을 포함하지는 못할 터였다. 포카스는 그렇게 상대의 영향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장목화는 곧장 전술 배낭에서 구급함을 꺼낸 뒤 주사기로 카오의 체내에 뭔가를 주입했다.
잠시 후, 장목화와 백새벽의 눈꺼풀이 돌연 아래로 내려가고 몸은 땅을 향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아직 깨어나지 않은 척 몰래 강제 입면 능력을 발휘했던 카오가 눈 깜짝할 사이 다시 의식을 잃었다.
뒤이어 방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덕분에 장목화와 백새벽은 몽롱했던 상태에서 바로 깨어났다.
이와 같은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된 후에야 카오는 마침내 자신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있는 상대를 찾을 수도, 상대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원하는 게 뭐냐?”
결국 포기한 카오가 고개를 들어 장목화와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장목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와 네 배후는 왜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하려는 사람들을 막는 거지?”
카오가 턱을 살짝 쳐들며 답했다.
“이 세상이 다시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해서.”
거만한 태도로 보건대 그는 자신의 행동과 사명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장목화로서는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뭐?”
백새벽은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카오의 미묘한 표정을 자세히 관찰했다.
카오는 계속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구세계 파괴 원인에 대한 조사는 특정 사건을 촉발할 테고, 재난 속에서 가까스로 회복된 세계는 다시 파괴될 거야.
우리 인간들은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간을 들인 끝에 무심병과 환경 오염의 영향을 겨우 줄였어. 비교적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도 갖게 됐고, 기초적인 질서도 되찾아 문명을 지속할 수 있게 됐지.
근데 어떻게 그걸 파괴할 수 있겠어? 이 모든 건 아직 너무 나약한 상태야. 약간의 타격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장목화는 어떤 사건을 촉발하게 되는 거냐고 묻는 대신 주제를 틀었다.
“그래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 많은 무고한 사람을 죽였어?”
카오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 중 정말로 무고한 자는 많지 않아. 다들 자신의 호기심, 혹은 모종의 이익을 위해 인류 문명의 존속을 무시한 채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했지.
그 외의 나머지로 말할 것 같으면,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공교롭게도 알아선 안 될 비밀을 알게 됐거나 나타나면 안 될 곳에 나타난 거니까.
애쉬랜드와 인류 문명에 비하면 고작 몇 명, 몇십 명, 몇백 명 정도쯤은 죽어도 상관없어. 재난이 다시 강림하고 질서가 사라지면 겨우 그 정도 희생으로 끝낼 수 있을까? 인류는 더 이상 문명을 잇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장목화는 상대의 말 중 일부는 억지라는 걸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나름의 신념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들의 행위에 따르는 논리 역시 확실하고 또렷했다.
물론 아비아가 제공한 정보를 감안하자면 카오의 말은 누군가가 그를 세뇌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반드시 사실이리라 볼 수는 없었다.
퍼스트 시티의 황제였던 오레이 우비스는 제8 연구원의 어떤 이들은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어떤 무시무시한 변화를 겪고 어둠의 앞잡이가 되었을 테니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제3 연구원의 수석 과학자였던 그는 제8 연구원의 누군가가 큰 화를 일으켰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 사람은 겉모습으로 볼 때 구세계 파괴 이후에 태어난 것 같아. 제8 연구원 내의 생존자는 아닐 거야. 그러니 무시무시한 변화를 겪거나 하지도 않았겠지. 그보다는 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길러진 부하일 가능성이 커.’
몇 초간 고민하던 장목화가 물었다.
“네 말에는 아무 증거도 없어. 구세계 파괴 원인에 대한 조사가 어떤 사건을 촉발할 수 있다는 거야?”
카오가 재차 코웃음을 쳤다.
“원래는 나도 그렇게까지 확신하진 못했지. 10년 전,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하다가 어느 정도의 수확을 얻은 어떤 자들이 북방의 한 도시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 도시는 대형 세력에서 독립된 정착지였어. 주위에 살던 사람까지 더하면 그곳 주민은 수십만에 달했고, 그중에 포함된 적잖은 강자는 거래할 수 있는 수많은 자원도 장악하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밤, 무심병의 대폭발로 파괴된 그 도시는 폐허로 변해버렸어. 우리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더라면, 사전에 제대로 격리하지 못했더라면 온 애쉬랜드가 영향을 받았을 거야.”
그 말에 장목화와 백새벽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주위 공기가 묵직해지는 것 같았다.
백새벽이 다시 입을 뗀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너, 제8 연구원 사람이야?”
“맞아, 난 제8 연구원 특파원이다.”
카오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 신분을 굉장히 뿌듯해하는 듯했다.
‘역시.’
느릿하게 한숨을 토해낸 장목화가 곧 화제를 전환했다.
“구세계 파괴 이전, 각 국가가 연합해 비밀 연구원 아홉 곳을 세운 건 알아. 그중 제3 연구원은 인공지능과 영생인 연구 담당이고. 너희 제8 연구원은?”
침묵하던 카오는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각성.”
카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장목화에겐 마치 천둥같이 울렸다.
제8 연구원의 연구 방향이 인간의 각성이었다니!
정말로 뜻밖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상당히 그럴듯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상하거나 믿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구세계 기술 수준이 영생인 관련 연구를 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러 있었다면, 인간의 각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리도 없었다.
각성이 재난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 아닌 이상에는 그랬다.
“성과는 있었나?”
장목화는 이런 질문을 했을 때야 자신이 위장을 상당히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소리는 침착했으며, 말투도 덤덤했다. 마치 오늘의 날씨에 관해 얘기하는 것 같았다.
카오는 피식 웃더니 전처럼 거만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각성했겠어?”
장목화가 막 질문을 이어가려 한 그때, 백새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각성을 보장할 수 있는 거야?”
카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
“성공률은 30퍼센트 정도밖에 안 돼.”
‘30퍼센트 정도밖에 라니! 안정적이기만 하면 설령 10퍼센트밖에 안 되더라도 엄청 대단한 일이잖아!’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포효했다.
현재 각 대형 세력 중 구성원을 안정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달지기를 믿는 종교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든 걸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그곳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곧 달지기를 뜻했다.
달지기의 기분이 좋을 때는 각성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달지기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누구도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안정적으로 각성이 가능하다는 건 분명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 성공률이 일정 정도 이하로 낮지만 않다면, 각 대형 세력에서는 대량의 각성자를 만들어 낼 방법을 마련하려 할 터였다.
애쉬랜드에는 인구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